성령사역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성령사역자가 되기 위한 조건
성령님께선 내게 성령사역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내가 이해하기 쉽고 암기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은 영 혼 육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사역자는 먼저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혼적으로는 한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육적으로는 성령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조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먼저 생각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영적인 상태를 보다 더 쉽게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하박국 3장을 예로 들으셨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박국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했으며 기뻐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자신의 삶이 매우 궁핍해 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뻐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박국의 말처럼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는 삶은 매우 비참한 삶일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면 더욱 비참한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즐거워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성령사역자에게 하박국과 같은 기도가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길 원하십니다. 성령사역자에겐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하며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나의 집이 가난했지만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아주 어렸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위인전을 읽으면 가난하지만 훌륭하게 성장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운 내용들이 감화를 받았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목사가 되었을 때 어렸을 때 가졌던 마음을 실천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일 먼저 실천한 것은 교회로부터 사례금을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사례금을 받지 않아서 그 금액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 열심히 헌금생활을 했습니다. 충분치 않는 생활이었습니다. 신학교 생활을 했을 땐 풀타임으로 수업을 하면서 일주일에 50시간 이상을 일했습니다. 아내는 60시간 이상을 했습니다. 만삭이 다 되어 아이를 출산하기 직전까지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에 한번씩 신학교 싱글들을 식사초대했습니다.
처음 개척했을 때는 교인과 상관없이 혼자 계신 분들을 초대해서 식사했습니다. 그때는 매주마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아내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집의 빈 방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자녀가 있으면 방을 두 개있는 아파트를 얻어야만 했습니다. 우리 부부와 세 아들이 각각의 방을 쓰면 되겠지만 우리는 다섯 식구가 한 방에 쓰고 나머지 한 방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했습니다. 아내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지만 섬기는 것을 배우면서 기뻐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돈이 있는 것이 오히려 부담될 정도로 가난이 몸에 박혔습니다. 그래서 거지에게 가장 부담되는 것이 돈인가 봅니다. 늘 없이 살면 돈이 조금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막상 돈이 생기면 누구에게 줄까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점점 나이를 먹어가니까 “아빠, 우리는 언제 부자되?”라고 자꾸 물었습니다. 솔직히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도 유학생활에 도움을 준 한국의 식구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의 마음에 하박국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정말로 하박국처럼 알거지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개척할 때 그랬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밥을 먹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냉장고를 열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김치조차도 없었습니다. 라면도 사먹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야 괜찮았지만 한참 커가는 아이들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만 보면 마음에 평안이 있었지만 아이들만 보면 그 평안이 뭉개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은 아이들을 통해 오는 아픔보다 더 크고 진한 것이었기에 우리 부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어쩌면 보잘것없는 우리 부부에게 너무도 빨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특혜(?)를 주신 것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지 않고서 성령의 ‘성’자도 모르는 부족하고 미천한 목사에게 그런 큰 능력과 영광을 허락하실리는 없을 것입니다.
혼적인 조건
성령사역자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조건은 한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한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배우려고 한다면 마땅히 주님으로부터 배워햐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랑도 주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람도 주님보다 더 큰 사람을 베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실체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7)
간혹 의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고 선인을 위해 용감히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도 하며 의를 위해서 용감히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인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거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의인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죄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사랑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실제로 죄인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의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손양원목사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게 한 죄인을 사랑하였습니다. 금보다 소중했던 자신의 두 아들이 하루아침에 공산당원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때 손양원목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상황에서 주저앉는 것을 거부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게 만든 그 장본인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잇는 죄인을 찾아가 그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죄인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죄인이 감옥에서 석방했을 때 그는 그 죄인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마치 자신의 친 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보살폈습니다.
손양원목사의 사랑이야기를 듣노라면 나의 사랑과는 한참 먼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나에게 그런 사랑의 마음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비록 나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열님의 도우심으로 그러한 사랑이 나오게 될 것을 믿습니다.
육적인 조건
성령사역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세번째 조건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사역자가 되기 위해선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서 성령과 권능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님께서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서 성령과 능력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성령이라 함은 성령충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령세례를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세례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 말씀을 전하고 물세례를 집행했을 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부은 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노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하지만 성령세례만으로는 성령사역을 행할 수 없습니다. 방언이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방언만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큰 권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방언만 행했을 때 사역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33)
하지만 방언을 통해서 성령사역자는 다른 성령의 은사들을 받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을 가리켜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의 영이 열리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를 바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영으로도 기도할 줄 알며 마음(혼)으로도 기도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의 말을 계속해서 들어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한 구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으로 기도하는 것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의 차이가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영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도와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그 자체는 영의 기도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방언을 통해서 우리의 영이 열리게 되고 더 깊고 더 황홀한 기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영의 기도를 통해서 다른 은사들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 먼저 성령과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하나님의 권세를 받고서 사역을 행하셨던 에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병을 치료하고 마귀를 쫓아 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나갔으며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병을 치료하고 마귀를 쫓아 냈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눅 9:1)
또한 예수님은 칠십인 제자를 세우셨고 저들을 세상에 보낼 때 12제자에게 준 것 같은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12제자와 칠십인에게 주었던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권세를 갖고 있어야 성령사역을 행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출처 : 다음 카페, 사랑받는 주의 자녀(ckdtjr12), 올린이: 솔로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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