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세계 영성은사/† 은사-은사 일반론

성령으로 빚어지는 거룩함과 의와 순종의 생활 / 심슨

초록 등불 2011. 3. 2. 13:56

성령으로 빚어지는 거룩함과 의와 순종의 생활 - A. B 심슨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4)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성령 을 받았다”는 것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이미 그 전에 어느 정도의 성령을 받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신 사실은 분명히 그것을 뜻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바울에게서 에베소 서신을 받은 제자들도 구원의 유업의 보증이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엡 1:13)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는 못하였다.

성령 받음과 성령충만의 구별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영적 은혜의 단계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애타는 심령으로 영적 은혜를 찾아 희미한 어둠 속을 헤매듯 애타게 사모하다가 드디어 성령을 충만히 받기에 이른 성도들이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영적 진리를 전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뜨겁게 사모하며 그것을 찾기까지 끈기있게 추구해 나가야 한다.


자연 속에 있는 가장 비근한 사실이 이 차이점을 힘있게 설명하고 있다. 수심 얕은 개울과 수량이 풍부한 대하의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양쪽 다 ‘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개울은 겨우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데 지나지 않지만, 대하(大河)의 경우는 그 양쪽 기슭에 즐비하게 서있는 공장의 무수한 기계를 가동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넘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진리는 이 차이점을 명료하고도, 힘있게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딤후 1:6)라고 말했다. 그들은 은사를 이미 받았고 그것을 완전히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 은사가 이제는 꺼져 가는 불꽃이 되어 버린 모습이다. 불은 재가 되어가고 불꽃이 사라지려 하는 모습이다.

 

 ‘불일듯’이라는 말씀은 꺼져 가는 불을 북돋우어서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한다는 뜻으로써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다시 일으키려 한다는 말씀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 구절 속에서 ‘유익’이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과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유익하게’ 하여 그 은사를 향상 발전시켜 가장 충만한 활동을 하기에 이르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 설명이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의 비유” 속에 나타나 있다. 종들이 받은 한 므나 씩은 봉사를 위한 사업 자금으로 받은 특별한 성령의 은사이다. 므나는 각자가 다 똑같이 받았으나 근면과 충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그 결과로 거기에 따르는 보상에도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영적 은사들, 특히 은사들 중에서도 최고의 은사인 성령 자신을 활용한다는 것은 놀랍고도 엄숙한 진리이며,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엄숙한 책임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특별히 주목할 만한 말씀이 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 한 성령을 마신다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되어 있다. 전자는 일회적인 행위이며, 후자는 반복되어 습관화하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를 한몸이 되게 하는 행위이며, 후자는 그 관계의 정당한 운용으로서 충만하게 되기까지 계속 충만하신 성령을 마시는 반복적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 속에 보편적으로 우리가 계속 내주하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항상 충만한 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이와 같은 진리가 열왕기하 4장 1-7절의 “과부와 기름 그릇”을 통하여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그 이야기 속의 ‘작은 기름병’은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 그 넘치는 성령이야말로 우리의 생애의 모든 결핍을 보충하며,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영적 생명의 향상과 보다 부요한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게 하기 위한 경로로써 우리에게 부여한 모든 환경을 충만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받은바 기름병을 하찮게 여기고 농 속에 가두어 놓고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 생애의 모든 경우에 응용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있는 어떠한 그릇에도 가득 가득히 성령으로 채우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전 생애가 그리스도의 크신 능력을 입증하는 살아있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


그러면 성령충만하심의 결과는 무엇이며 그 증거가 무엇인가.


첫째, 성령의 충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다. 성령의 인격과 역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떠나서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일 있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강신술 같은 심령주의에 빠져 들어갈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자연 종교는 영계를 시인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심령주의로 가득 차 있다.


성령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재하시면 성령 스스로를 증거하시지 않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점을 유의해야 한다. 때로는 영적 은혜에 충만하셨으나 무지한 까닭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줄 모르고 도리어 교만하여져서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죄를 범하고 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성령의 목적은, 예술가처럼 캔버스 위에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주님을 우리의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게 하여 주신다. 결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나타내지 않으신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그리스도를 잘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되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모시고 살게 된다. 그러므로 ‘충만’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충분히 소유한다는 것과 밀착되어 있다.


골로새서 2장 9-10절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놀라운 관계를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성령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충만케 하시며 그리스도는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그리스도는 이상적인 인간이시며 모든 인간이 본받아야할 모본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재생하여야 하며 그에게까지 자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생명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친히 사시도록 하여야 한다.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관련시켜 본다면 참된 결론을 다음과 같이 얻을 수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결합된 생활과 계속적으로 신뢰하는 생활인 것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충만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가 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생활을 우리는 끊임없이 체험하며 증거해야 한다.

거룩함과 의와 순종의 생활


둘째,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자아를 죽이며 죄의 생활을 버린다. 따라서 우리가 거룩함과 의와 순종의 생활을 하게 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이것은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의 참 모습이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하심은 자아의 죄를 내몰아 버린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전 존재에 충만하시면 거기에는 자아가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이다.


셋째, 성령의 충만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며 또한 그 기쁨을 충만케 한다. 주님은 성령의 약속을 우리에게 하신 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사도들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너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기원하였다.


성령의 충만은 고통과 의심, 두려움과 슬픔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우리의 전 인격에 채워 주신다. 풍금에서 선율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손가락으로 건반을 능숙하게 누른다고 해서 음악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패달을 움직여 파이프 속에 바람을 충분히 채울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생산되는 것이다.


풍금이 공기로 충만해지지 않는 한 아무리 능숙한 솜씨로 건반을 누른다 해도 헛수고 일 것이다. 하나님의 입김이 우리 온 몸을 충만케 하여주시지 않는 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시체처럼 차가운 것이 되고 만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만이 뜨거운 찬송을 부를 수 있으며, 그 기쁨은 흘러 넘치는 생수가 될 것이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넷째,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충만을 받은 심령에 열린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 23). 적어도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은 성령의 충만에서부터 끝없이 솟아나는 것들이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 우리의 생애는 경건으로 충만케 될 것이다. 의와 거룩함과 축복의 열매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미롭게 샘솟아 올라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 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또 다시, 성령이 우리의 생각과 이해력을 지식과 빛으로 충만케 하여 조화와 맛과 힘으로써 우리의 사상을 다스리신다. 모든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며 우리의 사상은 주님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렇다. 우리의 육신까지도 그러한 충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성령은 육체적 활력과 완전한 건강을 위한 진정한 강장제이다. 성령의 충만은 육체와 두뇌와 온 몸에 생기를 충만케 한다. 그의 은혜로운 생명으로 충만케 될 때에 우리의 발은 가볍게 움직여지며, 심장은 힘있게 고동하며, 두뇌는 건전한 활동을 전개하여 혈액 순환을 원만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한 봉사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경까지도 이 복된 마음속에 받은 바 충만함에 부합하도록 보조를 맞춘다. 마치 넘치도록 부었던 과부의 기름병과도 같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의 생애 속에 찾아 들어오는 모든 사건에 역사하신다. 그 결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목적을 성취한다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환경이 우리에게 적합하게 되든지,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우리의 전 생애가 “그의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활기를 얻으며 능력과 은혜로 충만하여진다.
이 은혜는 자신의 충족만으로 그치지 않고 더욱더 충만하여져서 넘치고 넘치게 된다. 그리하여 넘쳐흘러 나가는 은혜는 고통받는 세계에 널리 공급된다. 넘쳐흐르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당의 돌항아리에 물이 넘칠 만큼 되었을 때에 비로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다. 그 물이 성전에서 출발하여 사막을 향하여 흐르면서 점점 더 깊어졌고 충만해졌다. 우리의 생애가 자아를 잊어버릴 만큼 깊은 사랑 속에 빠져들어 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어떻게 충만함을 받을 것인가


먼저 빈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나에게 한 대의 녹음기가 있다. 내가 하는 말을 예민하게 잘 녹음할 수 있다. 어느 날 대단히 많은 양의 말을 녹음했다.


며칠 후 나를 돕는 타이피스트가 타자하려고 녹음기를 틀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가 한 녹음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내가 녹음할 때에 그 전에 한 녹음이 지워지지 않은 채 겹쳐졌던 것이다. 깨끗이 지워지지 않은 테이프에 다시 녹음하면 모든 녹음이 헛수고라는 것이다. 내가 한 고생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지만 그 이상의 큰 교훈을 얻었다. 그 교훈이란 비우지 않은 곳에 새 것을 더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것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더 이상 말씀하실 수 없다. 비어 있지 않은 심령에는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실 수 없다.


또한 사모하는 심령을 간직해야 한다. 주님은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다”(눅 1:53)고 말씀하셨다. 불타는 뜨거운 사막을 여행하는 대상(隊商)들이 항상 이용했던 샘물을 찾지 못하여 애쓸 때가 있다. 그러면 그들은 먼저 목말라 하는 사슴들을 사막에 풀어놓는다. 사슴들은 샘물을 찾기까지 목말라 허덕이면서도 결코 쉬지 않고 이리저리 질주한다.


굶주린 심령도 그와 같이 열심히 생명의 양식을 찾아야 하며, 목마른 심령은 생명수를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 가장 신속한 길은 열심히 주를 사모하는 심령을 가지는 것 외엔 없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나아가 충만함을 받고자 하면 그 심령이 활짝 열려 있지 않으면 안된다. 시편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진리의 음성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편견이나 억측을 버려야 한다. 성령의 속삭이는 음성을 듣고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준비를 다해야 한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세를 가져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마음은 너무나 넓어서 순간적으로 충만될 수 없고 심령은 너무나 심오하여 한 입에 만족할 수 없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다”(사 40:31).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에 힘쓰며(골 4:2) 은혜의 보좌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간구함과 동시에 은밀한 교제를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할 때에 충만함을 받으며, 우리가 받은 바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풍족하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끝으로 충만함을 사모하는 사람은 받는 것과 동시에 주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위대한 경제가이시다. 하나님은 받은 은혜를 잘 활용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에게 더욱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신다. 받은 은혜를 밑천으로 삼아 타인에게 은혜가 되도록 축복하시는 사람을 축복하신다. 성령은 섬기는 생활을 하도록 임재하시지, 이기적인 사람의 심령을 충만케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축적해 두기만 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없다. 지금도 은혜 받은 성도들의 이기적인 태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이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 가고 있는가!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잠 11:25).
잃은 자를 찾아 전도하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데서 우리는 풍족을 누리며, 윤택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풍족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는 충만이 아니겠는가!

 

 

- 출처 : 두란노 빛과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