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세계 영성은사/† 영성-용어이해

내사

초록 등불 2011. 7. 24. 00:0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의미가 무엇인지도 살펴야 합니다.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힘을 얻을 수 없게 되는데, 우리 가운데는 이런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지식이 부족하고 아직 신앙의 연륜이 짧은 경우도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 언급하는 바는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를 살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서 적용하는 능력이 더불어 자라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바울이 지적한 대로 말하자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쉬탈트 심리학에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원인을 내사(introjection)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규명합니다. 내사란 게리 욘테프(Gary Yontef)의 설명에 의하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식별하거나 소화하지 못한 채로 대충 뭉뚱그려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그는 ‘as if personality’라고 규정했는데) 내사된 가치와 행동은 자아에 영향을 미칩니다. 경계장애(boundary disturbances)가 있는 경우 환경과 알아차림의 정도에 따라서 건강에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학생이 강의를 듣는 경우, 내사에만 의존하면 강의를 듣거나 기억하거나 정리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하게 됩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개인은 환경과 접촉을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여 이를 소화하고 동화시킴으로써 성장하게 됩니다. 이 소화작용(stimulating)은 퍼얼스(Stephen Perls)는 ‘치아공격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치아공격성이란 아이가 자라면서 음식을 씹어먹기 시작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만약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 않으면 소화가 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되어 결국에는 병을 유발하게 되는 것처럼 치아 공격성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적 삶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치아 공격성은 ‘말씀을 먹는다’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식별작용은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해서 필수입니다. 그런데 개인이 환경으로부터 이러한 자신의 공격성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을 제지당하게 되면 권위자의 가치관이나 행동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 지식은 자기 것으로 동화하지 못한 채로 남아서 개인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쓴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타인의 행동방식이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내사’라고 부릅니다.

개인이 이러한 내사로 말미암아 고정된 행동양식과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면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행동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규정화된 행동양식인데, 전근대화 된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률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억압하는 경우에 집단적 내사가 일어납니다. 독제 정권에서 모든 국민들은 각 사람의 개인적은 판단은 용납되지 않고 오로지 국가 이념에 따라서 획일적인 주의를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교육했던 것은 전형적인 내사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음을 성경은 바리세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연단을 받은 지각”(히 5:14)을 사용할 기회를 빼앗음으로써 내사가 일어납니다.

부모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도덕률을 너무 많이 내사한 사람은 그러한 것들이 자기 것인 양 착각하게 되고, 모든 상황에서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런 내사된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보수주의 또는 극우주의라고 부르며, 성경은 바리세파라고 정의합니다. 그들은 내사된 규칙과 도덕적 명령에 의해서만 행동하게 되는데 교회 안에 교리주의가 그 전형일 것입니다. 이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물질에 대해서 그것을 파괴하고 소화시키는 ‘치아 작용’인 분별력이 제제를 받음으로써 그 공격성이 오히려 자신에게 향해서 자신을 괴롭게 하거나 혹은 외부로 투사되어 편집증적인 공포심을 갖게 된다고 퍼얼스는 주장합니다(S Perls: "Ego, Hunger and Aggression" 1969, 128~145쪽 참고).

우리는 사회에서는 물론 교회 안에서도 ‘착해야 한다’ ‘부모님께 순종해야 한다’ ‘화내지 말아라’ ‘남을 얕보지 말아라’ ‘주일 성수하라’ ‘헌신하라’ 등과 같이 개인의 자율적인 행동을 억누르는 초자아적인 명령과 통제 속에 우리들을 가두려고 합니다. 이런 내사의 형성에는 문화와 교리가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여자는 얌전해야 하고 남자는 용감해야 한다’라든가 ‘남자는 울어서는 안 된다’라든가 하는 내사를 받아온 사람들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사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반항하게 되는 시기를 지나게 되는데 바로 사춘기입니다. 이 시기를 심리학에서는 ‘정체성을 인식하는 시기’라고 봅니다.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행위는 바로 식별력을 얻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주된 행동양식이 공격성입니다. 이것을 거쉬탈트 심리학에서는 ‘치아 공격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교회 안에서 성도가 2~3년 정도 신앙생활을 거치고 나면 스스로 분별하려고 하는 욕구인 이 치아공격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분별력의 증대는 목회자에게는 달갑지 않게 보일 수 있습니다. 마치 사춘기를 지내는 자녀를 부모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사춘기의 공격성이나 영적 성장에 의한 공격성 모두 실별력을 얻기 위해서 내사를 거부하는 정상적인 발전단계에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교회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행위로 취급하는 지도자들은 이들을 문제 있는 성도로 취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춘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교사나 부모는 그런 자녀를 반항아 또는 비행아로 여기고 통제하고 억압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비판이란 식별의 한 형태입니다. 이것은 음식물을 소화하기 위해서 씹는 작용입니다. 우리 말에 ‘씹는다’라는 의미는 매우 부정적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남을 헐뜯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지요. 사실 씹는 작용은 분별작용이며, 비판작용입니다. 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침을 씹지 않으면 소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비판작용은 각 사람이 자신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그 행위를 싫어합니다. 이는 부모의 지시에 토를 달기 시작하는 아이를 나무라는 현명하지 못한 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제제와 통제에 순응해서 내사된 사람은 지도자의 말에 고분고분하기 때문에 착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내사가 심한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모른 채 타인의 기대에 따라 맞추어 사는 데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어떤 욕구나 의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창의적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없게 되며 오로지 시키는 일만 정확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모범생이 되고 조직생활에 무척 잘 순응하므로 모범적인 직원이 됩니다. 이들이 공직에 나가면 창의성은 없고 윗사람이 시키는 일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서 승진도 잘 합니다. 이들은 피상적이고 틀에 박힌 일을 하며 대인관계의 기술이 부족해서 집단 안에서만 머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나 지도자들은 성도의 개인적인 직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이 책임을 가지고 어떻게 헌신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며 지도자는 그것을 구태여 알 필요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씹어서 소화해야 함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사된 지도자는 씹기 보다는 타인의 것을 그냥 삼키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가 씹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그냥 받아 삼키라고 가르침으로써 제자들을 내사시킵니다. 이런 제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책임지기 보다는 권위 있는 사람이나 집단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가는 안전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런 내사된 사람은 대체로 타인과 사회로부터 인정은 받지만 그 자신의 내면에서는 축적되어 있는 미해결 과제가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부르심에 대한 갈등임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내사를 받으며 성장한 사람은 내사된 명령과 이에 반발하려고 하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가 서로 다툼을 일으켜 ‘자기고문 게임’이라는 혼란에 휘말리게 되는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부르심이나 직임이나 은사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면 자아와 타율을 정확하게 구분할 줄 모르는 ‘경계선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작용해서 자신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의 경계역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계선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춘기는 이런 경계선 혼란에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행위입니다. 이 시기를 제대로 지나지 못하면 ‘경계선 장애’라는 가치혼란을 일으키는 병증이 생기며, 이것을 우리는 흔히 비행이라고 부릅니다. 거쉬탈트 치유에서 이런 경계선 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부모 이미지 심기’(reparenting)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나쁜 부모 이미지와 결별하는 힘을 얻도록 돕는 치유 방법인데, 자신의 개성을 억압하는 권위에 의해서 내사된 가치관과 가르침으로부터 결별하여 자신의 분명한 경계를 느끼도록 해 주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스미스(Smith)와 클라크손(Clarkson)이 1990년에 발표한 이론인데 요악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Petruska Clarkson: 'Gestalt Counselling in Action' 1990).

윗사람의 무리한 요구에도 싫으면서도 계속 복종하는 자신의 의지를 전혀 표현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에게 ‘싫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빈 의자기법이라는 방법인데, 상사의 무리한 요구에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어릴 적에 부모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고 자란 성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내사를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빈 의지를 대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부모나 상사의 요구에 직면할 때 느끼는 감정을 느껴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도록 치료자는 여러 가지로 질문을 던집니다.

클라이언트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 보도록 하되 다소 과장되게 하도록 합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집에서 나가!’ ‘꼴도 보기 싫다!’등과 같은 말을 하게 합니다. 이러한 말을 하거나 듣는 순간 신체 감각을 자각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러한 요구에 어린 시절 맹목적으로 순종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젠 더 이상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부모 분리작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일을 온 몸으로 행동하면서 ‘싫어요’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면 됩니다. 그래야만 개체에 해독스런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속사람의 억압된 부분이나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회복시켜 경계를 분명히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경계장애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제도와 사회의 억압된 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사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순응형으로 물들어버린 질환입니다. 지도자와 권위에 무조건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오늘날의 교회는 자신도 모르게 내사를 일으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별력을 키울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가 깊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율의지를 주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런 의사표시 없이 마냥 고분고분하기만 한 성도들로 가득하다면 이것은 심각한 내사가 일어난 증거이며, 분별력을 상실한 환자들인 것입니다.

 

출처: 영성이야기 (갓피플카페:healinghouse), 장봉운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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