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세계 영성은사/† 영성-내적치유

버림받은 소외감의 치유

초록 등불 2011. 3. 14. 09:57

버림받은 마음(소외감)의 치유


  여기서는 버림받음의 치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34편 9절과 10절입니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첫째, 버림받은 마음을 치유하기가 어렵습니다.


  버림받은 마음을 치유하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픔을 감추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또 자기 자신만 아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홀로 되고 소외되니까, 무가치함 속에서 자기를 학대하다 보니 나 같은 것은 나아질 수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원망과 분노 때문에 치유자와 구원자에게 돌을 던집니다. 자기 가까이 아무도 못 오도록 하기 때문에 치유가 어렵습니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신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단은 이 같은 점들을 이용해 아픈 마음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함으로 우리들을 영적인 아닌 육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우리들 속의 상처를 사단의 점유물로 만들어 놓습니다. 이렇게 되면 버림받음의 상처 때문에 또 다시 하나님께 버림받을까봐 더 이상의 상처를 입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게 됩니다.


  버림받음의 상처는 악순환을 반복시킵니다. 나아가려다가 도망하고, 또 나아가려다가 도망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을 큰 바위 뒤에 숨게 만듭니다. 마치 거북이가 고개를 등껍질 속에 숨겼다가 내밀었다하는 것처럼 만듭니다. 아무도 없을 때에 고개를 내밀었다가 인기척이 나면 안으로 쏙 숨깁니다. 그래서 치유가 어렵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오라고 하시지 않고 자신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악순환을 반복하는 우리들을 이해하시고 계십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방주를 지으신 후 사람들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왜요? 그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 시대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눈에 즐거운 대로 살았습니다. 자기들을 즐겁게 만드는 일을 사랑했습니다. 성서는 그들이 결혼하는 일에 바빴다고 전합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인 삶을 버리고 인간 중심적인 삶을 택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빈마음을 하나님외의 것에서 찾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창세기 6장1절입니다.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인간들이 왜 하나님을 버린 걸까요?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은 분이신대도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어려서부터 입었던 상처 때문에 방주 가까이 오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버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어 보내실 때에도 그들이 죄를 지은 상태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 비참하게 늙어가는 일을 막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자 배려입니다.


  인간에게 찾아오시기를 기뻐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아브라함을 택하십니다. 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오라고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쉽게 오지를 않았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다가 이제는 도망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올 자가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오라는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오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문제를 아십니다.


  나아가고 싶으나 다시 버림받기 싫어하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상처를 치유하려면 다시 그 상처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처들을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아십니다. 화살 맞은 때를 아십니다. 마치 공항장애 환자들이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인간들의 내빼는 심정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감싸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픈 곳을 잔인하게 드러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상처를 아프시게 하기보다는 싸   매어 주시는 분입니다.


  넷째, 고통은 언제 오는가? 를 이해하십시오.


  왜 우리가 버림받은 마음으로 아파합니까? 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걸까요? 고통은 언제 오는 걸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피하려고 하니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열등한 존재인데 내가 그 점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몇 년 동안이고 도주다니다가 잡힌 죄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 이제는 두 다리 쭉 펴고 잘 수가 있겠구나.잡히면 징역을 사는데도 우선은 마음이 편하다는 말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가 죄인인데 죄인이 아닌 것처럼 살려니까 고통스럽다는 말입니다. 도망 다니는 고통이 잡히는 고통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가 왜 고통스럽습니까? 우리가 버림받은 존재인데 버림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니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이 버림받은 사람인 것을 알면 고통은 사라집니다. 고통이 두려워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고통이 자리 잡게 되는 법입니다. 사실 말이지, 내가 버림받은 존재인 것을 인정하면 누가 나를 버린다고 해도 별로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소리쳐 봅시다. 어이 고마워 나는 열등한 게 맞아. 그래 나는 원래 버림받았던자야. 나는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면 무지 화가 납니다. 인정하면 화낼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병원에서 주사 한 대 맞으면 될 걸가지고 악을 쓰며 도망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인정하십시오. 우리는 다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인입니다. 죄로 인해 다 죽었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찢어진 사람들입니다. 인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돈이 좀 없어졌다고 해서 마음이 크게 아프지는 않습니다.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나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버림받은 자로 살게 하옵소서.

주여 내가 이 사실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자로 살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누가 날 조금 무시해도 덜 섭섭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깨달을 것입니다. “주여 저 사람을 통해 내가 버림받은 자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분노가 일지 않습니다. 나 혼자가 되더라도 그렇게까지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니 세상 속에 속하려고 긴장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 내 대신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 아픔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고통을 순간을 지나 보십시오. 치유의 기쁨이 옵니다. 아픈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인정만 하시면 됩니다.


  사단은 오늘도 우리를 기만합니다. 너 그 화살 기억 못하니? 그 때 얼마나 아팠는지 벌써 잊었니? 또 아프고 그래?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마! 사단은 자꾸만 아픔을 계속 기억나게 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주님, 나는 버림받은 자입니다”하며 나아가는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를 안아 주시고 대신 고통을 받으십니다. 오히려 고통대신에 새생명의 기쁨을 주십니다. 인정하십시오. 절대로 아프지 않습니다. 우리는 화살에 맞아 죽은 자임을 인정하십시오. 버림받은 자임을 인정하십시오.


  다섯째, 예수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신 것을 믿으십시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병중 하나가 소외감입니다. 소외감이란 “나 혼자다”라고 생각하는 병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병입니다. 이 소외감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소외감은 버림받았을 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 속에 있던 버림받음의 상처가 순간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버림받으심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버림받는 그 순간에 예수께서 오십니다. 우리가 버림받는 그 곳에 예수께서 찾아오십니다. ‘버림받았다’라는 말은 아무도 곁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버림받아도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버림받았다는 것을.


   내가 외로울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 속에도 다 아픔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저 숨기고 부지런히 살아갈 뿐입니다. 버림받았으나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바삐 살뿐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들의 귓전에다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만 외로운 거야.”우리 마음을 충동질 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사단은“너 같은 것 하나님이 또 버리실 꺼야”강조합니다. “네가 얼마나 못되고 나쁜 줄 알아?”속삭입니다. “너 같은 게 뭘 하겠다고, 네가 얼마나 거짓말 잘 하는지 알지?”계속 충동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우리들을 받아 주십니다. 절대 속지 맙시다. 사단의 참소와 주님의 긍휼을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눈에는 아픈 자들이 보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찾아 읽어봅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위 말씀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만 있으면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을 조건을 가진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상한 것을 드러내고 죄를 드러내는 자를 찾아 가까이 가십니다. 장자가 아닌 탕자를 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를 택하십니다. 내가 자격이 없는 것, 내가 무가치한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심판하실 분이라면 우리에게서 좋은 면만 찾으실 터이지만 치유자이신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아픈 면이 보입니다. 의사의 눈에는 아픈 곳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픈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의사에게는 건강한 자들이 보이지 않고 아픈 자들이 보입니다. 아픈 자를 찾으면 기쁩니다. 물론 당연히 일부러 아프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비추시며 우리의 본 모습을 보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빛 아래서 우리의 아픈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픈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아픈 것을 사랑하십니다. 나의 무력하고 버림받은 것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를 위해 자기의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버리셨습니다.


  일곱 째, 더 큰 축복에 눈을 돌리십시오.


  가끔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왜 나를 버리시는가? 원망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내 속의 상한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살까봐 내 속이 의지하던 것을 잠깐 허무신 것입니다. 내 속의 냄새나는 것을 잠깐 들추신 것입니다.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이 고생을 시키시는 건가? 원망어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이 아닌가? 라며 비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데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에덴동산의 모든 과실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자그마한 주문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먼저 배신하였다는 점을 유의하십시오. 하나님 가슴에다 못을 박은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가슴에다 화살을 쏘았습니다. 부모가 어찌 자식을 버리겠습니까? 자식 된 인간들이 먼저 부모를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적반하장 격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먼저 버렸다고 화가 나서 소리칩니다.


  여덟째,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버림받으신 분노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죽이셔도 마땅하신데 자기의 독생자를 죽이시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 사랑을 알면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이신 그 사랑 앞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불신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버림받음의 상처 앞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있는 마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내 속에서 나를 속이는 마귀의 권세를 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말라는 마귀의 음성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버림받음의 치유는 영적인 싸움을 동반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치유를 할 수 있습니다. 버림받음의 상처로 나를 꽁꽁 묶어놓는 사탄의 사슬을 다 끊어야 합니다.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시간 우리 곁에 오시도록 임재를 사모합시다. 그 분에게 여러분의 버림받음의 상처들을 내어놓으십시오. 성령님이 내 속에 역사하시기를 기다립시다. 이 시간 주님께서는 우리 속의 아픈 것을 보시면서 우리를 오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에게 안기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