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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프랜지팬] 영광의 새벽별

초록 등불 2011. 11. 2. 16:41

영광의 새벽 별 - 프랜시스 프랜지팬

 


▒ 예수님의 삶을 닮는 능력 ▒

 

단순히 기도만 드린다고 해서 악령은 물러가지 않는다.
사단의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신도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세벨을 대적하여 성공적으로 싸우는 교회는 밖으로는 가시적인 영광이요 안으로는 감추어진 순결의 상징인

"영광의 새벽 별"을 상급으로 받을 것이다.
그러한 교회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는데 이는 주의 종들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빼앗으려고

책동하는 이세벨의 영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교회에는 특히 병을 고치는 은사가 충만하게 부어진다.

 

우리의 승리는 입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완성은 우리 심령 속에 "예수님의 성품이 자리잡기까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세벨과의 전쟁을 제데로 치루려면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악령과 타협하고 있는지

성령님께서 밝히 보여주시도록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마음의 어느 한 구석에 감추어진 은밀한 죄까지 포함한다.
일단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하늘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악령인 원수를 이기려면 '예수님을 닮는 삶의 능력'이 필요하다.
모든 영적 전쟁은 "마음의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이세벨이 좋아할 만한 사고방식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신앙이 교회터를 넘어서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투되어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면 자기 집에 거할 때에도 사실은 교회에 있는 것이다.

 

만일 한 남편이 고집이 센 아내를 두려워함으로 인하여 가장으로서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면

그 남자는 이세벨의 영을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전투의 장소는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이다. 매일 매일 삶의 터전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 속에서

우리는 '이세벨의 영'과 대면하고 싸우게 되어있다.


 

▒ 위임받은 책임 ▒

 

이세벨의 영에 동조하게 만드는 악령도 있다.
이 악귀가 하는 일은 사람의 혼을 연약함과 두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그 귀신의 이름은 '아합의 영'이며, 그의 본성은 '자신의 권위를 이세벨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아합의 문제는 '남편'이라는 칭호는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 권위가 없다는 점이다.
아합이 왕의 자리에 있을 때 실제로 지배력을 행사한 사람은 이세벨이다.
자기 집을 경건하게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영적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그런 남자는 자신의 두려움을 회개하고 단호함과 온유함으로 자기 집의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권위란 한마디로 위임받은 책임이다.
그러므로 누가 우두머리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책임질 것인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최종의 권력과 권위를 가지신 분이다. 그러나 그분의 권위의 기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집에서 가장의 권위가 단지 지배하려는 권력에 머무른다면 그 가정은 평안할 날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함께 결정을 내리고, 서로의 지혜를 의지하며, 친구로서 솔직한 교제를 즐기는

그런 부부가 되는 것이다.
억압의 형태를 아내가 다스림에서 남편이 다스림으로 뒤집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면 억압하는 구조는 여전히 유지된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내가 남편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남편도 아내의 푸근한 사랑을 받음으로

삶에 대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실천만이 이세벨의 영을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이다.


 

▒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 ▒

 

아내의 경우에 , 이세벨의 오만함이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란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이다.(벧전 3:4)
아내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가정의 질서를 지켜야하며 특히 남편을 존경하는 태도로 대해야한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0)

 

악령이 틈탈 기회를 제공하는 여인의 삶이란 참으로 기구한 것이다.

사랑 받지 못한 여인으로, 권위주의적인 남성과의 심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시작한 반항이

결국 자신의 삶을 얽어매고, 급기야는 도리어 억압하는 자로 둔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가장 증오했던 사람과 비슷한 사람으로 닮아가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여인을 돕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담겨있다.

그러므로 이세벨의 영에 대한 해독제는 예수님의 겸손함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자신의 권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억울하게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건들의 목록도

역시 십자가에 못박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면 그리스도게서 만사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 악령으로부터 건지심 받는 것과 해방 받는 것의 차이 ▒

 

나는 이세벨의 영에 사로잡혔다가 해방된 여인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지금 기독교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자신들이 여성인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여성스러움 (womanhood) 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세벨의 영은 오늘날 남성을 여성으로 그리고 여성을 남성으로 둔갑시키려는 책동을 벌인다.

이세벨의 영은 과분한 권력을 인간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에 회복되는 단계에서는 일시적인 '무력감'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측면에서 그러한 무력감을 끌어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존하는 사람마다 자신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강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타인을 교묘하게 조종함으로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어진다.

 

이세벨의 영은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한 두려움이라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안에 거한다.

이세벨의 영의 힘을 빌어 타인을 자꾸만 조종하려고 덤벼드는 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특히 타인을 신뢰할 수 없기에 도리어 지배해 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고 하신다. (요일 4:18)

그러므로 이세벨의 영에서 치유 받고 회복되려면 반드시 주변에 넘치는 사랑으로

감싸주는 성도가 함께해 주어야한다.

그러면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편안한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을 끌어 안을 수 있게 된다.

 

치유에는 단계가 있다. 악령으로부터 혼이 건지심을 받는 건 영이 해방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인간의 혼은 살아오면서 겪은 사건들로 꽉 차있다. 그래서 혼 안에는 추억과 소망, 사랑과 미움,

그리고 수많은 경험에 대응한 삶의 방식이 들어있다.

그 모든 것이 합하여 지력, 성격, 그리고 감정을 형성한다.

그러나 영은 늘 조용히 그것들을 관망하고 있는 존재이다.

영은 혼의 모든 움직임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후 2:11)

 

그러므로 순서적으로 보면 영이 먼저 해방을 받아야 한다.

내면 깊숙이 심령의 중심에 있는 존재가 먼저 이세벨의 영으로 인하여 굳어진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어루만져주심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영이 구원 받게 되면 다음 단계로 혼을 치유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혼은 마음의 새로움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이 개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씻겨내고 바른 생각들로 대치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영이 깨어나는 것보다는 더 오랜 기간이 걸린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그릇된 삶의 태도가 죽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낡은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5)

이세벨의 영에 말려들지 않고 평안히 웃을 수 있는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머무는

신앙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