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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세계] 비둘기 같은 성령 (2)

초록 등불 2012. 3. 2. 18:45

 

  [영의 세계] 비둘기 같은 성령 (2)

 

“비둘기 같은 성령”의 글의 전편에서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관한 설명과 내용이 다소 부족하여 연하여 글을 써 봅니다.


가만 누워서 어떻게 설명할까 성령 안에서 생각해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가령 어떤 나라에 왕이 있는데, 그 본성상 자신이 나타나는 것보다 대리자를 내세워 실제적인 정치를 하게 한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실제적인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이 어떤 정치적 명령을 내리면 그것을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을 감당 사람이 있다고 상정해 봅니다.


이런 경우 숨어서 실질적인 명령을 내리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표면에 대리자로 나타나셔서 실제적으로 지휘 하시는 분은 성자 예수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성자 예수님이 어떤 명령과 지휘를 내리시면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삼위일체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신비이라 어떤 유비나 비유로도 실상 정확한 설명은 어렵습니다. 대략 이러한 개념으로 삼위의 역할과 주권을 이해해 볼 수 있음직 합니다.


위의 예를 인간적인 관계의 사회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사이에는 어떤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사이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 인간과는 달리 성삼위 하나님은 전혀 다른 세 분이지만, 또 동시에 온전한 신적 사랑 안에서 전혀 같은 한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부의 예를 들어 볼 수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부부의 온전한 상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여야 함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어떤 위계적 질서가 보이긴 하지만, 서로 온전히 사랑하면 한 몸이고 남편이나 아내나 동등한 것에 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도 성경을 보면 어떤 위계적인 질서가 보이긴 하지요.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고, 성령님도 성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달하고 읽어내셔서 그 뜻대로 기도하게 하시곤 하지요. 그리고 종말의 때에 관해서는 성부 하나님이 전권을 가지고 계시다고 성경은 말씀하지요.


요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마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래서 위에서 든 예처럼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왕처럼, 숨어 계시는 성부 하나님께서 세 분의 질서 속에서 섭리와 경륜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듯 합니다. 가장 주권적인 권한과 영역을 가지신 분이지요.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권한과 역할의 사랑의 질서만 있을 뿐 위계의 차이는 없으며, 동일한 위엄과 존귀를 갖추신 한 하나님으로써 동일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십시요. 성자 예수님도 찬양하고 경배하십시요. 그리고 성령 하나님도 찬양하고 경배하십시요.


나아가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 속에서 기도론을 조금 심도있게 생각해 보려 합니다.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자신의 문제를 가져가서 간청하고 또한 해결 받았으며 죄 사함도 받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성자 예수님은 한편 성자 예수님의 고유한 자리의 역할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이 땅에 오신 것이었지요.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성부 하나님을 대리하여 오셨던 속성에서 바라보던지, 아니면 성자 예수님의 고유한 자리에서 바라보던지 이 땅에 예수님께서 계실 때에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간청하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죄 또한 사함을 받기도 하였고, 천국 곧 영생을 약속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말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참람한 일이지요. 참 육신을 입으셨으나 참으로 하나님 되시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아래의 구절도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할 수도 있음을 말해 줍니다. 실제로 찬송가나 많은 찬양들에서도 성부 하나님이 아닌 주님을 향한 간구와 기도의 찬양도 많이 있지요.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수많은 찬송 찬양이 있지만 한 찬송가의 가사를 들어보면, “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주사 곧 충만케 하옵소서, 이 주리고 목마른 나의 맘에 주 성령을 부으소서”


그리고 앞의 글에서 말씀 드렸던 성령님과 우리의 특징 중 하나가 교통하심인데, 그 의미가 임재, 친교, 나눔, 동역, 친밀, 우정, 지시 등 다양한 의미가 있다고 볼 때, “성령님, 이것 좀 도와 주세요”라고 우리가 요청하고 간구할 수 있을 진대 이것 또한 포괄적인 기도에 넣을 수 있지요.


찬송가에도 기도나 간구형태의 찬송가도 있지요.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 줍소서..”


이처럼 성부 하나님이시던, 성자 예수님이시던, 성령 하나님이시던 우리가 기도와 간구와 요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기도의 원류는 “성부 하나님께 성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드리는 것”이 원류이지요.


저는 이것을 포괄적 기도, 협의적 기도라고 분류하고 싶은데, 협의적 기도로서의 기도는 성경은 분명 성부 하나님께만 드릴 것을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도 그러하고 당신께서 드리신 기도 또한 그러하지요.


그러므로 기도의 원류는 성부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포괄적이고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기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그 누구에게도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이를 위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리자면, 위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숨어 있는 왕, 대리자, 실행자로 유비시켜서 설명을 드렸는데, 가령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이런 세 직위의 사람이 있다면 개인적인 요청이나 간청은 실상 어느 누구에게라도 가능할 것입니다.


왕을 직접 찾아가 간구와 요청을 드리던지, 아니면 대리자나 실행자에게 간구와 요청을 드리던지 결국은 세 사람에게 모두 흘러들어가고 합의된 사항 안에서 응답이 될 것이니 마찬가지이지요. 특히나 우리 사람과는 달리 온전히 사랑 안에서 또한 전혀 한 분이신 성삼위 하나님 그 누구에게나 우리가 간청하고 요청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 나라가 이 나라에 어떤 정식적인 요청을 하는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겠지요. 이 때는 반드시 그 나라를 상징하는 왕에게만 정식적으로 공문을 발송하고 요청하여야 하겠지요. 이에 견하여 이런 경우라면 반드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헷갈리시나요?


이제 앞에서의 모든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친교나 간구의 형태로는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어느 분에게도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의 기도는 삼위 하나님께 모두 다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문제 좀 도와 주십시요”, “예수님, 주님, 저 좀 도와 주십시요”, “성령님, 제게 힘을 공급해 주십시요” 이런 사적인 친교나 기도나 간구나 요청은 어느 분에게도 드려도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국가간의 어떤 문서가 오가듯 공식적인 예배 자리나 공적인 모임 자리에서는 반드시 “성부 하나님께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해야 옳은 것입니다”


나아가 개인적인 기도나 간구라도 할지라도 이것이 기도의 원본이고 원류입니다. 가능하면 이 원류를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원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친교나 교통의 개념으로서의 포괄적인 기도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그 누구에게라도 간구, 요청, 대화, 교통, 친교, 기도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시대를 거쳐서, 그리고 성자 예수님의 시대를 거쳐서, 지금은 성령 하나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계실 때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도 물론이지만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귐과 그분의 말씀이 소중하였듯 지금은 성부 하나님을 향한 공적이나 사적인 원 기도류도 중요하지만, 성령님과의 교통이 너무나도 소중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지금은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사귐과 교통이 어느 시대보다도 중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어느 시대보다도 더 잘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분과의 교통과 친밀함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간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신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시대를 주관하신 성부 하나님을 보면 한편 정말 죄는 용납하시지 못하시는 엄하고 무서운 면도 많습니다. 율법의 작은 것을 어겨도 죽음으로 형벌하시는 곳이 많이 나옵니다.


민15: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민15: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민15: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민15: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레21:9 아무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스스로 더럽히면 그 아비를 욕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두 가지 예를 들었지만 광야에서나 성막에서나 그분의 금령을 어기면 반드시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본성은 참으로 경외하고 한편 두려워해야 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도무지 용납하시지 못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를 여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십니다.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시며 가능하면 모든 죄인들과 허물을 안아 주시는 모습이십니다.


요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는 율법 시대를 넘어 복음 시대를 섭리 경륜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성자 예수님의 모습은 성부 하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 속의 너무나도 엄격하고, 만약 그 율법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아마도 살아남을 자가 그리 많지 않을 만큼 엄격하신 성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누리는 것은 성자 예수님의 보혈이 성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덮고 있기 때문이지요.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 시대를 살고 있기에 너무도 잘 알고 또한 경외하며 사랑과 마음을 드려야 할 성령님은 또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는 다소 다른 특성을 보여 주시지요. 그것은 앞선 글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사람으로 표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상처를 잘 받으시고, 여리고 민감하셔서 근심하시기도 하시고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기도 하시는, 가장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님에 대한 죄를 성경은 엄히 단죄하고 예수님도 나를 거역하거나 훼방하는 것은 괜찮지만 “성령님께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가 영원히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심각하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영원한 사망에 처하는 죄가 철저하고도 깊게 고의적인 죄를 말하듯, 성령 거역죄나 훼방죄도 철저하도 고의적인 거역과 훼방을 말하니까요. 부지 중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히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히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하지만 부지중에라도 그분은 상처를 드리면 다른 두 위에 비하여 상처를 많이 받으시므로 늘 우리는 상처받기 쉬운 여린 마음의 연인을 대하듯, 그렇게 성령님 앞에서 조심스럽고 분별하며 배려있게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대략적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특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예배와 경배와 기도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론적으로야 이러하지만 그러한 것을 떠나 성부 하나님이던, 성자 예수님이던, 성령 하나님이시던 아무튼 누구이시던지 열심히 찾고 구하고 친교하는 것이 주의 영의 충만함을 덧입는 길이요, 영적 능력을 받는 길이요,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기도는 반드시 원본 기도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개인적인 경건한 기도시간에서도 그것을 따르는 것이 좋겠지만, 구체적이고 사적인 개인적인 친교, 간구, 요청 등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성령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성부, 성자, 성령 시대를 거쳐서 마지막 때,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심판의 권세를 가지시고 예수님이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때는, 다시금 죄에 대해서는 오직 죽음을 명하시는 행한 대로 보응 받는 성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두렵고도 떨리는 심판이 다가올 것임을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시대를 살아가지만, 한편 성삼위 하나님을 경건한 두려움으로 경외하며, 어머니 같으시고 때로는 영의 거룩한 친구나 연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과의 사적인 깊고도 깊은 교통과 사귐을 통하여, 거룩한 능력과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아멘. 샬롬!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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