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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진리 ☆ 육의 소욕, 영의 소욕

초록 등불 2014. 2. 7. 23:10

 

  [핵심 진리] 육의 소욕 영의 소욕

 

방언으로 기도해 보라고 한 뒤에 영으로 그 의미를 들어보니, 영혼의 애절한 울부짖는 기도소리, 그 영의 애타는 목마름이 제 영에도 전이되어 잠시였지만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집회 날짜가 다가오면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느꼈던 것과 같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일반 예배, 곧 말씀 증거도 길어야 몇 십분이면 끝나는 그러한 예배가 아니라, 영적 감각으로 분별하여 오신 분들의 각종 어두움의 영과 세력을 몰아내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회복시키며, 성령의 임재 안에서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도록 영력을 다소나마 회복시켜 주어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복음 전도자 사도바울도 자기 자신만을 살펴볼 때는 두려워 떨었듯이, 저 역시 너무도 본성이나 모든 면에서 연약한 사람, 집회 시간이 다가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진리 안의 경건한 두려움 속에서 또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더욱 성령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집회 전날 꼭 주님의 한 말씀을 붙잡고 나아갑니다.


이번 집회 때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한 말을 잊었느냐!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해 주셔서 그 말씀을 붙잡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전날 밤 모든 예배 준비를 마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너무도 강력하게 “기뻐하라” 감동하셔서 일어나서 찬양을 드리는데, 영으로 제 곁에 늘 보이는 어린 소녀 모습의 천사가 춤을 춥니다. 늘 기도하다 쉬며 누워서나 앉아서만 보다가 일어나서 제 앞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니, 모습이 새로워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니, 제 손을 잡고 빙그르 돌기도 하며 춤을 춥니다.


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 이름은 붙일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땅에 속한 저와 하늘에 속한 영적 존재인 천사가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었습니다. 영적 존재를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이겠지만, 영적 존재를 보시는 분들은 이해할 것이고 주님의 깊은 은혜로 제게는 하늘과 땅을 함께 누리며 사는 것이 지금은 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 3차원 입체 영상의 거대한 환상이 열립니다. 저의 경우는 2차원 평면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3차원 입체 영상으로 열리기 때문에 영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실제 세상처럼 보입니다.


주님께서 푸른 초장에서 양들을 먹이고 계시는데, 한 켠에 개울물이 맑게 흐릅니다. 일어서서 그 환상을 보고 있노라니 제 발이 마치 시냇물에 잠긴 듯합니다.


푸른 초장에서 뛰놀던 양들이 시냇가로 몰려와 물을 마시곤 사람으로 치면 만족하여 웃듯이 행복한 표정으로 뛰놀고 장난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주님은 이번 예배, 곧 집회를 통하여 참석하시는 분들이 주님의 생수를 마시고 기뻐하게 될 것을 보여 주신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주님의 위로로 “나는 연약하나 주님은 강하시니”라는 의지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주님은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함께 해 주셨고, 은혜롭고 풍성하게 예배를 마쳤습니다. 대략 예배 시간은 3-4시간가량 소요되는데, 참여하시는 분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언제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성령 안에서 기쁘게 예배를 진행합니다.


이런저런 말씀과 영적인 진리를 나누고, 이제는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생수를 마시는 은혜의 시간, 모두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제게는 일종의 하나님의 영광 곧 쉐카이나와도 같은 환상이 열립니다. 온 교회에 성령님을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가 가득 날아다니는 것이 영으로 보였습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매번 집회 때마다 다소 거룩한 두려움 안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몸가짐과 마음가짐도 정갈하게 하며 애쓰곤 하는데, 이번 집회도 주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영의 양식을 배불리 먹었으니 다음은 육의 차례, 나누지 못한 인사와 얘기들, 그리고 신앙과 삶에 관한 이야기 등을 나누며 늘 애찬 시간을 갖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오신 분들 중 어떤 계기로 방언 기도를 한번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시켜보니 나름 유창한 방언을 말하십니다. 그런데 그 영적인 세계, 곧 초자연적인 흐름의 세계로 인도하는 문이요, 통로요, 모든 영적인 은사와 능력의 뿌리가 되는 방언기도를 왜 한동안 하지 않으셨는지, 집회에서 배우셨으니 이제는 무시로 기도하며 새로운 영적인 영성과 능력의 삶을 살아가게 되실 줄 믿습니다.


방언이 임하고 그리고 통변의 은사가 임하면, 처음에는 자신의 방언이 통변되다가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의 방언도 통변이 됩니다. 그리고 깊어지면 아주 세밀하게 읽어내게 되지요.


개인적으로 그럴 기회도 자주 없거니와 왠지 쑥스러운 면도 없잖아 있어서, 다른 사람의 방언을 통변을 잘 하지는 않지만, 때로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영으로 그 의미가 전달이 되어져 옵니다. 그 사람의 영이 무엇이라고 기도하는 영으로 들려옵니다.


식사 곧 애찬을 하다가 우연스레 시켜본 방언기도, 그분은 아직 통변이 깊이 잘 열리지 않아서 자신의 영이 무엇이라고 기도하는지 잘 아시지 못하는 듯 하였지만, 제게 들려오는 영의 애절한 부르짖음, 영적으로 곤고하여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그 영의 울음에 가까운 기도 소리가 저의 영에도 전이되어, 식사를 잘 하다 말곤 제 눈에 살풋 눈물이 어렸습니다. 오래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저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에 근거하여 집에 돌아와서 영의 소욕육의 소욕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살펴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적으로는 풍요로움과 부요함을 누렸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부족함과 곤고함을 느끼는데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도다”라고 고백할 정도였으면 상당히 풍족함을 누렸나 봅니다.


다시 말하면 육의 눈으로 바라보면, 부족한 것도 없고 불만도 없으며 만족하며 편안한 삶을 살았나 봅니다. 그러나 육이 아닌 영을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곤고하며 가련하며 가난하며 눈이 멀었으며 심지어 벌거벗었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영적인 안목에서 삶을 바라보지 못하고 혼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육의 눈으로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거의 동일한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고 그 삶이 한편 소중하기에 육신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초월할 수는 없지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기도하고 애쓰며 극복해야 하고, 현실적으로도 주님의 축복도 누려야 하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궁극에는, 궁극적인 마음의 푯대는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은 썩고 말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는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하지요. 본질이 얼마나 더 소중하면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요?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하지만 신앙상담을 하다보면 거의 모든 분들이 현실적인 어려움들로만 상담을 해 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도 중요하고 현실적인 삶도 충실하여야 하지요.


하지만 그 이전에 정녕 우리가 영적인 문제들도 그처럼 심각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영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가 문제이지요.


가족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그다지 별로 심각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으로는 상담을 해 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거나 하면 그 때야 상담을 해 옵니다. 무엇이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까?


물론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 세상의 축복이나 번영에 있어서는 아니 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두나니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을 것이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신랄하게 말씀하고 있지요 (신명기 28장)


또한 사도요한은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노라”라고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성경이 말하는 우선순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여, 영적으로 병들고 죽어갈 때는 무관심하다가, 영적인 안목으로 먼저 그것들을 심각하게 보고 엎드려 기도하고 때로 상담하며 회복하고 해결하려 애쓰면서 살아왔다면 겪지 않아도 될 현실적인 어려움, 그러한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영적인 문제들이 심각한 현실문제로 나타날 될 때에야 뒤늦게 발버둥을 많이 치곤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섭리와 이유가 많으니 다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인 안목으로 영적인 건강을 제대로 누리며 살지 못하기에, 때로는 이처럼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고 영적인 것들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육의 눈으로 잘못 판단하고 스스로 부요하다고 착각하며 지내는데, 주님께서 환경 등으로 연단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그 길에서 돌아서고 눈이 밝아져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우리는 육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 이전에 영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영적 지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의 성실한 삶을 통하여 영적 감각이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내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 내 가족이나 지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영원한 사망 앞에서 얼마나 위중하고 큰 해결 받아야 할 문제인지, 내가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것이 악한 종으로 심판 받을 수 있는 얼마나 중한 것인지 등등 이러한 부분을 먼저 살피는 영의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운동도 하고 좋은 음식과 약도 먹고 하지만, 현실의 부를 쌓기 위해서는 밤이 늦도록 일도 하곤 하지만, 자녀가 이 세상에서 잘 살도록 학업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질도 아끼지 않고 투자하지만, 정작 영혼의 건강과 하나님의 나라의 부와, 자녀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는 과연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살아갈까요?


우리가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육, 현실, 이 세상.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육을 입고 현실을 살아가기에 한편 소중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단정합니까?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주님은 현실의 삶을 무시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육 곧 세상의 부와 귀와 명예와 그 모든 것은 전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영이 본질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본성이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그리고 육의 눈과 영의 눈,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은 언제나 상반하며 싸우기에, 항상 영의 눈과 안목과 가치관으로 살아가기가 마냥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가 항상 말씀을 읽고 기도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언제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분의 임재와 다스림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우연히 시켜본 방언기도, 그분의 영은 간절하고 애절한 사모함으로 주님 앞에서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에만 관심을 가지고 겉사람으로만 살아가면, 우리의 속사람, 곧 본질이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인 우리의 영혼이 곤고하여도 심지어 죽어가고 있어도 영적 감각이 둔감해져서 잘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던 아니하던지 간에 우리의 속사람은 때로 우리가 겉사람으로만 살아갈 때에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곤고해져가며 주님 앞에서 한없이 탄식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본질인 영이 우리가 혼에만 사로잡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도다”착각하며 살고 있을 때, 우리의 영은 주님 앞에서 “주님 너무 곤고합니다. 가난합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벌거벗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이 탄식하고 힘들어하며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우리가 때때로 살아가다 일상의 바쁨에 쫓기다보면 자녀들의 생활과 행동과 표정과 마음을 못 살피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다가 어떤 가정은 자녀들의 돌발적인 어떤 행동으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요. 우리의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깊은 관심과 마음을 가지고 그 생명과 생명력을 지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그리고 이후부터 육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아니 육에 앞서 언제나 그리고 늘 영의 건강을 살피십시오.


자신의 영의 건강을 돌아보고 가족의 영의 건강을 돌아보고, 지인과 이웃의 영적 건강을 살펴보고, 나아가 직장, 교회, 나라, 더 크게는 세계의 영적 상태를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작은 중보자로써 품에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분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영적 건강을 위한 강력한 영적인 무기, 은사인 방언을 받고서도 그냥 묵히고 썩히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듯 방언은 우리의 덕을 세웁니다. 우리의 영혼을 강건하게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을 따라 말하게 하심으로 하는 영의 언어입니다.


곧 우리가 둔하여 때로 잘 알지 못하고 살피지 못하는 영의 상태, 그러나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깊은 곳이나 것이라도 다 통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우리의 영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은 강건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은 미소를 되찾고 강건해져 가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없더라도 기도와 말씀에 힘쓰면 영적 감각이 살아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영의 소욕대로 기도의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러한 경건생활을 통하여 우리의 영이 생명력을 얻고 강건해져 가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이런저런 신앙상담을 해 옵니다. 고난과 아픔 많은 우리네 생에서 그런 힘겨운 문제들조차 안고서 신음하시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고난과 아픔의 이유와 섭리에는 다양한 것이 있기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씀에 청종할 때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도 분명히 있는바, 적지 않은 경우는 우리가 육의 눈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우리의 영적인 부분, 가족의 영적인 부분들을 미리 살피며 영적 건강을 위해서 미리 애쓰며 살아왔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현실의 어려움도 많은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부분을 헤아려 살피지 못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사랑의 매요 내리신 고난과 징계의 회초리라면, 모세나 사무엘이 와서 중보하며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자신이 혹독하게 치루어야 할 고난의 시간을 어쩔 수 없이 걷게 되는 것입니다.


렘15: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


그러므로 주 안에서 우리 모두 늘 기도와 말씀에 힘쓰고 애쓰며 늘 성령의 인도하심바 안에 거하여, 육적 안목 이전에 영적 안목, 곧 영의 눈과 지각과 감각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육신을 입고 현실을 살아가는 몸, 현실의 삶에도 충실하여야 하겠고 현실의 문제해결을 위해서도 애써야 하겠지만, 우리의 마음의 궁극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 나라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본래 수고로움이 적지 않은 우리네 생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하심 안에서 나름 평안과 행복한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원리 중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영의 소욕과 육의 소욕을 결코 하나될 수 없으며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의 소욕을 좇아 살면 사망이요, 영의 소욕을 좇아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영의 소욕을 좇아 살 수 있는 영적 감각과 영의 눈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거할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도와 말씀에 힘씀으로 날마다 성령의 신선한 기름부으심을 받으며 날마다 새롭게 성령충만을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좇아 육의 감각과 눈만 가지고 살게 되고 육을 좇아 살아가게 되어 결국 곤고와사망을 맛보며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언제나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으로 글을 마치며 함께 가슴에 새기어 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소욕이 있습니다. 곧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기도와 말씀에 성실하며 영적 감각과 영의 눈을 잃지 말고, 육의 아닌 영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을 좇는 삶에 생명과 평안과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샬롬!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6:27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출처 및 저작권 :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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