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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원리] 영적 민감한 사람

초록 등불 2014. 2. 11. 00:08

 

  [영의 원리] 영적 민감한 사람

 

동물이던 식물이던지 곤충이던지 빛을 좋아하는 주행성과 어두움을 좋아하는 야행성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이지요.


빛을 주행하는 주행성의 존재들은 빛을 좋아하여 빛이 비취면 빛을 향하여 밖으로 나오고 가지와 줄기를 뻗고 하지만, 야행성의 존재들은 빛이 비취면 오히려 어둠 속으로 숨었다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와야만 비로소 나오지요.


성경은 사람의 이러한 영적인 성향과 행동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3: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우리 사람도 가령 빛 된 삶을 살다가 죄를 짓게 되면, 그 내면에 어둠이 깃들므로 조금씩 빛을 피하려는 성향이 나타나게 되고 점점 어둠이 짙어지면 더욱 그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나 영적 지도자들과의 참석이나 만남을 피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제가 근광자백(近光者白), 근암자흑(近暗者黑)이라는 영적 원리, 곧 “빛을 가까이 하면 밝아지고 어둠을 가까이 하면 자신이 더욱 어두워진다”라는 원리를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자신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떨쳐 일어나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용기를 내어서 빛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수록, 마음이 어두울수록 더욱 오히려 기도에 새롭게 도전하고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고 예배와 집회 등의 참석을 통하여 자신의 밝은 세계로 끌어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더욱 더 깊은 어둠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만큼 모두 어두움에 속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사단이 어둠의 근원이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는 것들이 모든 것들이 대부분 어두움에 속한 것들이요, 우리의 수고로운 삶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것이므로 우리에게서 또한 빛을 주기보다는 마음에 어두움을 주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오직이시요, 유일하신 빛의 근원인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그러한 노력이 없이 자연적이 상태로 살아가면 반드시 어둠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죄를 짓거나 마음이 어두울 때, “앉으면 죽고 서면 산다”라는 격언을 생각하며 마음을 새롭게, 다시금 그리고 언제나 일어서는 오뚝이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찾지 아니하면 점점 어두움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빛과 어두움에 속한 것들은 영적인 것, 혼적인 것, 그리고 육적인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기록하여도 이해하실 듯 하여 이 부분은 간략하게 다루겠습니다.


영적으로 빛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과 그분께 속한 가까이 하는 행위와 시간들, 곧 기도와 말씀, 그리고 예배, 성도의 교제, 경건한 서적이나 방송매체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혼적으로 빛에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건전한 음악, 서적, 영화, 친구들과의 건전하고 밝은 사귐, 좋은 강연이나 세미나 등등이 있겠지요.


육적으로 빛에 속한 것들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 살아 있는 생명체, 우리의 몸에 유익한 각종 좋은 음식들 등이 있겠지요.


반면에 어두움에 속한 것들은 타락한 본성을 좇아 그대로 살아가는 삶, 이방종교나 풍속을 좇는 삶, 퇴폐적이고 어두움에 속한 음악, 좋지 못한 서적들이나 영화, 어두움에 속한 친구들이나 사람들과 사귐 등이 있겠지요.


그리고 영혼육의 구분이 구별이 없이 어두움에 속한 것을 조금 논하고 싶은데, 술이나 담배나 마약류를 가까이 하는 한 결코 영의 빛 된 삶으로 올라갈 수 없겠지요.


술도 그러하거니와 특별히 담배나 마약류를 가까이 하는 한 절대로 그리고 결코 빛 된 삶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향정신성 식물로 우리의 정신자체를 바로 어두움으로 떨어뜨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결코 빛 된 삶으로 올라설 수 없기에 필사의 노력을 해서라도 반드시 끊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조금 새롭게 들릴지 모르지만, 동식물 그리고 사람까지 포함하여 실상 죽은 것들이나 아픈 것들이나 시들어 죽어가는 것들도 실상 어두움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서 빛을 빼앗아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그러한 것들 특별히 죽은 시체를 만졌을 경우에는 부정하다 하면서 가까이 하지 말고 부득불 가까이 되게 한 경우에는 반드시 정결의식을 거치게 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영적으로 밝고 빛 된 삶을 살아가려면 살아 있는 생명체, 푸르고 아름다운 식물들, 아름다운 숲들과 강과 시내 등 밝고 아름다운 것들과 곳들을 가까이 함이 유익하며 한 영적인 원리입니다. 장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나 건전한 장소 등은 우리에게 좋은 영적인 영향을 주지만, 퇴폐향락 업소나 혹은 장례를 치루는 장례식장이나 병원의 환자 병동 같은 곳들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나쁜 영향을 줍니다. 뒤에 가서 논하겠지만 나라와 지역과 그리고 좁은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다 그곳에 흐르는 영적인 흐름이 있고 그곳을 장악한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생명을 얻고 사망을 가까이 하면 사망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는 항상 빛 되고 좋은 사람이나 것들이나 장소에만 만나거나 가까이 하거나 갈 수 없는 상황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부득불 그러한 어둡고 부정적인 것들을 가까이 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할 때는 자신의 영을 지켜주시길 기도하거나 하는 마음으로, 혹은 좋지 못한 영적 흐름을 차단한다는 생각으로, 또는 그곳의 악한 영의 흐름을 예수 이름의 권세로 선포하여 묶는 등으로 나쁜 영의 흐름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그곳에서 나오면 즉시로 주님께 기도하여 혹은 상처를 입었을 지도 모르는 영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주님, 나쁜 영의 흐름이 제 속에 들어왔으면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주옵소서. 저의 영을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고 정결하게 회복시키시며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회복시켜 주옵소서”라는 형식으로 기도 드리면 됩니다.


아니 “목사님, 그렇게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며 신앙생활, 영적 생활을 해야합니까?”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장성하여 그 힘이 굳세고 강건하면 일일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넉넉함과 자연스러운 대처요령이 몸에 익혀지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는 장소나 것들을 대할 때는 이러한 영적 방어와 영적 치유를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민감한 분들은 가능하면 조금 더 세세하게 신경을 쓰시면서 살아가셔야 합니다.

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시고 일상의 삶에 있어서 매사에 정한 것인지 부정한 것인지 일일이 살펴 행하게 하셨고, 지중이던 부지중이던 혹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하게 되면 반드시 정결의식을 거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항상 영적으로 빛에 속한 것과 어두움에 속한 것들, 곧 영에 속한 것들과 육에 속한 것들을 분별하며 영분별 안에서 살아가라는 상징의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였듯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반드시 모든 것들에 영분별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다 영적인 에너지가 있고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말 한 마디에도 다 영적인 에너지가 있고 흐름이 있습니다. 특별히 말에는 강력한 영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가령 길을 가다가 누군가 심하게 욕설을 하는 곳을 지나가 보십시요. 영적으로 성장하고 예민한 사람은 영적으로 힘겨움을 느끼게 됩니다. 영이 그 악한 소리의 영의 흐름에 힘겨워하는 것이지요.


가령 텔레비전에서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이나 이야기가 흘러나와 보십시요. 폭력성의 영, 선정적인 음란의 영 등이 그 속에 담겨 흐리기 때문에 영적으로 민감해지면 힘겨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는 영분별하면 그 흐름을 차단하고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곧 위에서 가르쳐 드린 회복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이 곧 회복되어 다시금 빛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원리를 모르고, 또 영적으로 성장하거나 민감하지 못하여, 하루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별스런 죄를 짓거나 하지 않고 지내도 설령 아침에 ‘성령충만’하였다할지라도 저녁때 집에 돌아오면 성령은 다 소멸되고 냉랭한 영적 상태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있어도 자연스럽게 방전되는 배터리처럼 우리의 영은 이 세상 자체가 어두움에 속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도 영적 에너지를 잃게 되어 있는데, 생활 속에서 그런 강력한 악한 영의 흐름을 깬 의식으로 차단하고 막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회복의 기도를 드리지도 않았다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진정한 영성의 삶을 살아가려면 주일이나 몇 예배시간에 참여하고는 일상의 삶에서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면, 결코 영적인 삶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 없고, 세상의 어두움의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몰입하지 아니하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나 주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생각하고 무시로 그리고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영을 분별하고 영의 흐름을 분별하며 좋은 것은 받아들여 충전하고 나쁜 것들은 차단하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합니다. 사람은 곧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가까이 하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모릅니다. 반드시 사람을 가까이 하시되 자신과 같은 수준의 영적인 사람이나 반드시 그보다 상위의 삶을 사는 사람을 가까이 하려 하십시요.


사람의 본성은 타락한바 빛과 어둠이 어울리면 반드시 어둠을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영적으로 자신보다 낮은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을 영적으로 이끌어 올리거나 하는 섬김의 경우는 다르겠지요. 그런 때에는 자신이 중보의 영적 에너지의 손실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다시금 충전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섬김의 삶이요, 중보의 십자가의 삶이지요. 이런 정신으로 어두움에 속한 누군가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능히 주님으로부터 다시금 빛으로 충만하게 자신을 채우실 수 있는 분 일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자연적인 사귐의 사람들의 경우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그리고 영을 지닌 영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실상 자신과 수준이 맞지 아니하면 어울리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 높은 사람과도 낮은 사람과도 실상 어울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영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영적으로 성숙하고 민감한 사람은 일반적인 평범한 그리스도인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아무렇게나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입술로 어둠의 영이 흐르는 말을 들으면 괴롭습니다. 힘겹습니다. 그러니 다음에는 가까이 하려 하지 않게 되지요.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더 빛에 속한 사람과 그리고 더욱 빛 된 영의 존재들을 우리 곁에 가까이 오게 하려면, 우리가 그만큼 올라가야 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세계이던지 빛의 세계에서든지 자신의 영적인 수준에 맞는 존재들이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깨어서, 그리고 도리어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죄를 범하였거나 혹은 어두움의 마음 등으로 떨어졌을 때 더욱 빛 된 것들을 가까이 해서 자신을 영적으로 끌어 올려야 하며, 그리고 일상의 모든 삶과 시간 속에서 이러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영을 지키며 보호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적인 삶을 결코 쉽지 않습니다.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에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영분별을 하면서 빛에 속한 삶과 것들과 사람들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깊어지면 행동이나 모습이 다소 특이해지지요. 말이 거의 없어지고 일상의 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이 다소 적어지고 홀로 주님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옷도 유별하게 흰 옷만을 입거나 하는 등의 행동등이 나타나기도 하지요. 그것은 부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영적 수준에 맞게 그렇게 인도함과 강권하심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힘겨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니다.

오늘의 주제인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특별히 영적으로 섬세하고 민감한 영적 민감성 체질로 불리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영적 민감성 체질이란 쉽게 말하면 감수성이 섬세하고 마음이 여리고 섬세한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천재들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러한 사람들은 큰 축복과 재앙의 가능성을 동시에 다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재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지성과 감성 등을 지니고 있기에 여러 분야에서 남들보다 앞서는 탁월한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좋고 감성이 뛰어난 만큼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생각하는 것들도 많고 생각의 차원도 높고 감성적으로도 거스르고 힘겨운 것들이 많아서 한편 어려움도 많이 겪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민감성의 체질의 사람은 성령 안에서 영이 활짝 열리고 개발되어 평범한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깊은 영적인 세계를 경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영의 세계는 같이 통하는바 동시에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히고 그 속에 떨어질 가능성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수성이 섬세하고 마음이 여리고 섬세하게 태어난 사람은 축복인 동시에 한편 잘못 살아가면 그것이 재앙의 근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영이 활짝 열리고 개발되어 평범한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들로 다른 사람보다 쉽게 상처를 받고 감정이나 기분의 변화 등이 심할 수 있기에,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혀 우울증 등으로 힘겨운 삶을 살게 될 수도 있고, 심하면 악한 영에 사로잡히게 될 가능성도 많은 것입니다.


일반 무속 신앙에서 영매 체질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영적인 민감성의 체질의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감수성이 보통 사람에 비하여 섬세하고 마음이 여리고 상처를 잘 받거나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특별히 영분별을 하면서 생명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들과 선한 것들과 그러한 것들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심한 공포 영화를 보거나 괴기 영화를 보게 되면 심각하게 영이 손상되고 그 잔상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보지 말아야 합니다. 심한 폭력성 등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영적 민감성의 사람들은 정말로 자신의 영을 눈동자처럼 지키고 보호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언제나 천상의 영광 위를 걷는 놀라운 영적인 수준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어두움에 떨어지고 사로잡혀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온 세상은 어두움에 속한 것들로 가득 찬 바, 빛보다는 어두움에 떨어져 우울증에 사로잡히고 어둠의 영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더욱 많기에 있기에 정말로 일반적인 사람보다 보고, 듣고, 가까이 하는 것들을 조심하여야 하며, 언제나 영에 속한 것, 생명에 속한 것, 아름다운 것들을 가까이 하며 자신의 눈동차처럼 여린 영을 잘 지키고 보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다소 둔감한 사람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섬세하고 깊은 영적인 세계는 경험하기 쉽지 않지만, 더럽고 추한 것이던지 악한 영인 귀신등도 별스런 거부감 없이 용감무쌍한 무사처럼 다 해치우기 때문에 주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감성이 섬세하면 견뎌내기 힘든 피고름의 각종 병든 사람을 치유하게 하시는 능력과 은사를 주시기도 하시며, 또한 귀신을 쫓아내거나 기적을 행하는 등의 강력한 담력이 필요한 일을 맡기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각 사람의 기질과 성향에 기름을 부으셔서 그 뜻대로 우리를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하던지 저러하던지 항상 감사하며,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길을 가며, 적은 일이던 큰일이던 충성하면 많은 달란트로 충성하였던 사람이나 적은 달란트로 충성하였던 사람이나 같은 칭찬을 받았던 것처럼 주님 앞에서 같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영분별에 관한 글이므로 담력이 있고 용감무쌍한 사람은 다소 삶에서 쉽게 영이 상처를 받지 않지만, 섬세하고 여린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기 때문에 더욱 유의하라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카페에는 교계나 세상의 이런저런 좋지 못한 소식이나 글들을 올리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이러한 영의 원리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지면 각종 기사거리, 사건 사고 소식이 힘겹게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세상의 어두움에 속한 사건과 사고들을 다루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물론 세상의 소식들도 접해야 하겠지만, 대부분이 부정적이고 어두움에 속한 각종 소식들, 지나치게 가까이 하여서 하나도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듣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좋은 이야기를 듣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유익한 지 모릅니다.


영의 세계는 믿음의 세계, 마음의 세계, 그리고 곧 생각의 세계. 그 생각을 대표하는 것이 말이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빛의 상태인지 어둠의 상태인지 어떻게 분별하는지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주 쉽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였지요. 여러분의 마음에 생명과 평안이 흐르면 영적 상태가 빛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곤고함과 우울함과 어두움을 느낀다면 영적 어두움의 상태인 바 반드시 빛된 삶과 빛된 것들을 가까이 함으로써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은 ‘영적 민감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세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아무쪼록 언제나 깨어 기도하며 그리고 영분별을 하며, 사망과 곤고를 가져다 주는 육이 아닌 생명과 평안의 영을 좇아 살아가는 우리 모두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길을 생명과 진리로 언제나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샬롬!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출처 및 저작권 :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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