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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교수님] 방언을 체험하는 방법

초록 등불 2011. 4. 15. 13:17

방언을 체험하는 방법


방언 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0년 초 미국 흑인 교회에서였지만 방언은 1960년대에 이르서는 전통적인 백인 교회에서도 광범위하게 체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순복음 교회에서 시작된 방언 운동은 이제 전 교단으로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민초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체험했다면 이제는 많은 사회적 명사들도 자신들의 방언 체험을 간증하고 있다.
과거 방언에 대한 반대자들은 주로 초자연적인 영적 현상을 반대하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말씀 중심신앙을 가진 일부 복음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방언은 신학과 교파를 초월하여 나나탐으로 어느 신학적 전통에서도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아직도 방언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교회에서는 방언에 대한 태도는 이전 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변했다. 이제 방언이 바울과 누가가 긍정적으로 말한 것이고, 이것이 유익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방언을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과제가 남는다.

모든 신자가 방언을 체험할 수 있는가?

방언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기 전에, 모든 신자가 방언을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30에서 바울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는 수사학적 질문을 한다. 물론 답은 “아니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신자가 방언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한 바울이 이어지는 논쟁에서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라고 말한 것이다. 즉 바울은 모든 신자가 다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로만 보면 이 두 말은 모순이다. 하지만 바울이 한 주제로 이어지는 글에서 완전히 모순되는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매우 상세한 주석적 작업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이미 논문을 쓴 일이 있다(참고. 신약논단 13[2006년 봄] 169-193). 그 핵심을 간단히 말하면 전자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용되는 방언을 말한 것이고, 후자에서 바울은 개인 기도로서 사용되는 방언을 말한 것이라는 것이다. 공적으로 예배 가운데 하는 방언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다른 사람은 예언을 혹 다른 사람은 지식의 말씀을 한 것이다. 하지만 개인 기도로서의 방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은사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하는 은사로서(고전 14:2)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방언 기도의 은사는 신자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방언은 연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가끔 기도원에 가면 “할렐루야”를 계속 발음하다 보면 방언이 된다고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물론 그렇게 연습하여 된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방언은 성령이 우리의 육체의 일부인 혀를 직접 컨트롤하여 자기도 모르는 말로 기도하는 은사이다. 그런데 성령이 컨트롤 할 때 개인마다 느낌의 차는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때 하나님의 임재의 첫 경험을 하면서 놀라운 황홀경에 빠진다. 이 때 방언은 회개와 감사와 감격과 함께 온다. 하지만 모든 신자가 이렇게 방언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별다른 느낌 없이 혀만 스스로 컨트롤 안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때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 방언을 그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 느낌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혀를 움직일 수 없을 때 불안감에 그만 기도를 그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 혀를 주장한다고 믿고 그대로 맡기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험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인도된다.

방언 체험은 방언에 대한 태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방언을 체험하는 방법은 여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모은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주어지는 것으로 성령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나타나게 된다. “이 모든 일을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래서 방언의 은사도 은사 체험자의 태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강권적으로 임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은사는 은사 체험자의 태도와 은사 체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울은 은사를 체험하려는 자들에게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고전 14:1) 여기서 “사모하라”는 동사는 영어로 질투(jealousy)라는 말의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즉 사모하라는 말은 질투하듯이 열정적으로 그것을 열망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방언의 은사를 비롯하여 모든 은사는 어떤 사람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신자의 열정에 의해서 체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체험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방언을 사모하면 된다.


열정적으로 방언을 사모하려면 먼저 이것이 마음으로부터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이 지금도 방언을 주시며 그 은사를 활용하면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면 방언 체험에 도움이 된다. 가끔은 이러한 태도와 무관하게 어떤 사람은 방언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방언을 체험하게 된다. 또 하나님의 역사 중에서 이론적이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만 중요시 여기고 몸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는 사람도 방언의 은사 체험에 동참하기 어렵다. 이런 사람은 그러한 생각과 신학을 한 번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매우 실제적으로는 방언의 은사를 설교하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집회에 참가하여 방언하는 사람과 같이 기도하면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기 쉽다. 혼자 기도하다가 방언을 체험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과 이후 사건 모두에서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가운데 신자들이 같이 모여서 기도할 때 많이 경험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방언에 대해서 보다 열린 생각을 가진 교회 지도자 밑에서 방언에 대해서 옆에 사람이 기도를 하는 교회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방언을 체험하게 된다.


방법은 다양할 수 있지만 정말로 방언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체험할 수 있다. 방언에 대해서 아직도 완전히 거부감이 있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는 지성인 신앙인들의 경우에는 고린도전서 12-14장을 있는 그대로 읽고 믿으면서 기도하기를 권한다. 또 방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신자가 있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방언을 하는 집회에 참가하여 방언하는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기를 바란다. 이외 여러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모하는 심령에 방언이 체험되는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방언을 하다가 그만 어느 순간 그친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이 경우는 회복하기 매우 쉽다. 필자는 그 동안 방언 사역 가운데 이런 사람을 여러 사람 만났다. 어떤 사람은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 수련회에서 방언을 체험했는데 대학교 선교 단체에서 방언을 부정적인 것으로 가르쳐 그만 방언이 그친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했지만 그 의미와 뜻과 중요성을 몰라 자연스럽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두려운 마음에 그만 방언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경우에, 방언에 대해서 성서적 입장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기도하면 다시 회복된다. 지금까지 필자는 방언을 하다가 그친 사람은 방언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다시 기도하자 회복하는 것을 목도했다. 나는 아직까지 방언을 과거에 경험했다가 다시 사모하게 될 때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내가 본 사람은 100% 회복되었다. 곧 방언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방언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김동수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