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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교수님] '마귀 방언'도 있는가?

초록 등불 2011. 4. 14. 13:35

‘마귀 방언’도 있는가?

방언이 활발히 나타나는 현장에는 의례 이런 풍문이 떠돈다. ‘마귀 방언도 있다더라.’ 과연 마귀 방언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 이방 종교들 혹은 유대교에 이런 현상이 있었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만약 방언이 크리스천의 체험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다른 종교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있었다면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현상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근원했는지를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 이외의 고등 종교나 무속 신앙에서 이런 현상을 찾아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만약 비슷한 체험이 있다면 이것과 마귀 방언과의 관련성은 어떤 것인가도 검토하게 될 것이다.

고대 이방 종교에 방언이 있었는가?

바울이 방언이라는 어구를 쓴 것은 당시 헬라 종교에 이런 현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지금까지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해 왔다. 특히 델피 신전의 예언 행위나 그레꼬-로마 전통의 종교에서 행해지는 신탁이 방언과 비슷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그래서 학자들은 고대 세계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예로서 마리 문서, 벤-아몬, 카산드라, 디오니시우스 제의, 델피의 신탁 등을 든다. 하지만 이 분야를 최근에 철저히 연구하여 『신약의 방언』이라는 연구서를 낸 호벤덴(Gerald Hovenden)의 말과 같이 “그레꼬-로마 배경에서 신약의 방언 현상과 분명히 부합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들이 “신약의 방언과 부합되는 것은 양자 공히 초자연적 출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뿐이다.(G. Hovenden, Speaking in Tongues: The New Testament Evidence in Context, 30).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향해진 것이 아니고 신에게 향해진 것이고 말하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현상들은 기본적으로 예언자가 신탁을 받아 자기도 알고, 그 신탁을 듣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바울이 말한 예언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고대 이방 종교에서 방언과 동일한 것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구약이나 유대교에 방언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바울이 방언을 말하기 이전에 구약 시대나 중간시대 혹은 신약 동시대에 방언이 존재했었는가? 아니면 이에 관한 어떤 언질을 줄 말한 배경이 있었는가? 우선, 구약 성경에는 단순한 이성에서 근원한 것이 아닌 영감을 받아 말을 하는 사건이 많이 언급된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인 사울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무엘은 사울이 예언을 할 것을 선언한다(삼상 10:6). 실제로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라마 나욧에 이르러 예언을 했다(삼상 19:20-24). 여기서 예언이란 영감 받아 말하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이것은 영감 받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울이 말하는 방언과는 다른 것이다. 다음으로, 이사야서 28:11에는 “다른 방언”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사용된 방언이란 단어는 신약에서 말하는 성령의 영감으로 나타나는 방언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마음이 굳은 유치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린아이 같은 말과 ‘다른 언어’(아마도 앗시리아어)로 말하겠다는 것이다. 또 유대교 문서로『욥의 유언』에 보면 욥의 딸들이 영감 받아 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 받은 언어로 다른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호벤덴을 따라 유대교에 방언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다. “(1) 당시 인간 중재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2) 그러한 소통은 자발적이고 하나님께 향하여 질 수 있었다. (3) 이러한 말들이 방언/혹은 실제 언어였는가 하는 것에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앞의 책, 53) 결국 구약과 유대교에도 신약에 나오는 방언과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다른 종교에도 방언이 있는가?

심리학자들과 종교학자들에 의하면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혹은 무속 신앙에도 그 종교의 신자가 무아지경에 빠져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영감을 받아 말하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는 없지만 그런 현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적 방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당연히 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 악령이 틈타 사람들 중에는 이른바 마귀 방언을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귀가 영물이고, 선한 것을 가장하여 흉내 내는 데 명수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말하면 이런 의미에서는 마귀 방언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마귀 방언도 있다더라.’는 말은 만약 사용하더라도 조심해서 해야 한다. 이 말을 들을 때 과연 우리는 방언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아마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방언을 사모하게 되지 않고 조심스럽게 경계하면서 방언에 대해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런 말과 같은 것이다. ‘요구르트에 독극물을 넣었다는 괴편지가 한 방송국에 배달되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도 적어도 그 의문이 해소되기 까지는 요구르트를 사먹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마귀 방언도 있다고 할 때, 이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 방언 체험하는 것을 중단하고 기다려야 할 것인가? 결코 아니다. 비록 어떤 경우에는 마귀가 미혹할 때가 있지만 신자는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바울도 고린도교회 방언 현상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룬 후에 앞으로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적절하게 질서를 유면서 방언을 계속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14:40).

바울은 마귀 방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바울이 마귀 방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바울이 언급한 것은 마귀 방언이 아니라 ‘천사(들)의 방언’이다. 고린도전서 13:2에서 바울은 사랑이 없는 방언은 소용이 없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의 방언과 천사들의 방언”(개역 성경에는 “사람의 방언의 천사의 말”로 번역)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 여기서 “천사들의 방언”이란 다름 아닌 천사들이 쓰는 말이다. 바울은 사람이 천사들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서 그렇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 방언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자가 천사들의 방언을 한다는 것은 아마도 높은 경지의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방언 문제가 논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언이 혹시 마귀에서 근원했을 것인가는 가정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마귀 방언’이라는 어구를 쓰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방언은 성령으로부터 근원한 것임을 자명한 것으로 여기면서 바울은 방언이 사랑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마귀의 방언이라는 개념은 없다.
우리도 방언을 말할 때 마귀 방언 운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 중에 영분별의 은사가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당연히 이 은사를 통해서 분별하면 되는 것이다. 방언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마귀 방언을 말하는 것은 갈증해소를 위해 요구르트를 막 마시려고 하는 사람에게 단순한 가능성만 가지고 요구르트에 독극물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그런 위험이 있으면 당연히 말해야 한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에 독극물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를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안심하고 방언을 비롯한 여러 은사가 교회와 개인에게 나타나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귀 방언’, 이 말은 정상적인 방언을 사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마귀가 퍼뜨린 말이 아닐까?

 

김동수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