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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의 언어, 방언

초록 등불 2011. 5. 11. 18:00

 

※ 아름다운 영의 언어, 방언 ※

 

 

 

방언의 은사를 받고 방언기도를 해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방언은 성령 충만의 여하에 따라 잘 되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가령 저의 경험을 돌아보면 성령이 충만하면 의지와 상관없이 방언이 자꾸 튀어나옵니다. 마치 프라이팬에서 달구어진 곡식의 열매가 똑!똑! 튀어나오듯이 방언이 자꾸만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때로는 의지와 상관없이 나와 버립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에 다소 게으르거나 침체된 생활을 할 때면, 받은바 은사이니 기도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매끄럽지 못하게 방언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왜 생길까요? 그것은 방언은 영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 안에서 창조하는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하여 영이 강건할 때는 영이 강하니 영의 언어가 수시로 나오려고 하는 것이며, 성령을 소멸하면 영이 약해지고 혼이 강해지므로 다소 방언이 매끄럽지 못하게 나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방언이 영의 언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화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분은 워낙 기도를 많이 하시고 영적인 경험과 그 깊이가 놀라운 분이라, 때때로 우리가 들어가는 영의 의식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저 깊은 영의 의식세계에 종종 가곤하셨더군요. 해긴 목사님의 말씀을 빌리면, 그 때는 마치 자연적인 영역, 곧 다시 육체의 생명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임할 정도였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을 하나님이 어떻게 그냥 데려가셨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하시더군요.


실제로 때로는 집회를 인도하고는 영의 의식상태에서 자연적인 혼의 의식상태로 돌아오는데 2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잘 걷지도 못하여 누군가가 운전과 부축을 하여서 집으로 모셔다 드리곤 하였더군요.


그런데 한 번은 집회를 인도하는데, 예배와 설교 시간이 끝나고 안수를 받기 위해서 줄어선 환자들과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혼자 기도해서는 육체적으로도 무리일 것 같고, 시간적으로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을 향해서 저 쪽 어느 줄부터는 목사님이 대신 안수를 좀 하시라고 말씀을 하려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으심 가운데 영의 의식 세계로 너무 깊이 들어가버려서 혼적 영역의 언어인 영어가 나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영어로 그 의미를 전하고 싶어도 영적 세계로 깊이 들어가버려서 영의 언어인 방언만 나오지 혼의 언어를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때때로는 다시 영어를 말하게 되는데 역시 1-2시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할 때도 계셨더군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할 수 없이 그냥 영의 언어인 방언으로 그 목사님을 향해서 자신의 뜻을 담아서 말을 하니, 그 담임 목사님이 그 말뜻을 알아듣더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담임 목사님도 역시 영어가 아닌 방언으로 대답을 하는데 그 의미가 자신에게 전해져 오더라는 것입니다.


이 간증글을 읽다가 그 상황이 다소 우스워보여서 책을 보다가 혼자 웃었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며,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임하신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성령의 강한 기름부으심 가운데 타락한 혼과 육의 세계가 아닌 저 깊은 영의 세계로 들어가서, 해긴 목사님의 영과 담임 목사님의 영이 서로 영의 언어로 의미와 뜻을 전달하며 사역했던 그 집회의 현장,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적인 풍경입니까? 마치 하늘나라 곧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현상 같지 않습니까?


이처럼 방언은 성경이 전하는 대로 성령께서 우리 영안에서 창조하는 영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이 강건해지면 방언을 말함이 유창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다소 그렇지 않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생활을 하지 않아서 혼이 강해지면 방언이 다소 껄끄럽게 잘 되지 않으려고 하듯이, 영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혼의 언어를 일시적으로 말하기 어렵게 되기도 하는 것이니다.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면 어떻게 하여 이 방언의 은사가 우리 개인의 덕을 세울까요?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아시겠지만, 덕을 세운다는 의미는 “집을 건축하다”, 혹은 “밧데리를 충전하다”라는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위의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어떤 분들에게 통변을 통하여 예언기도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경우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에게 어떠한 목적과 섭리를 두시고 인도하시고 계십니다”등등의 안위와 권면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새로운 영적 힘과 용기가 생기곤 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을 교회와 공중을 향하여 주어지지만 방언은 설혹 통변이 잘 되지 않더라도 영적인 빛이 성령을 통하여 영으로부터 흘러 나와 혼으로 비추이게 됩니다. 초기엔 통변이 잘되지 않더라도 어떤 거룩한 느낌이나 생각을 갖게 해 줍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 안에서 활동하시며 영, 곧 우리 몸의 지성소 안에서 비추이는 하나님 임재의 빛을 혼으로 흘러보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방언기도를 하면 우리의 영혼이 세워집니까?”라는 묻는 기도 앞에, 주님은 교통을 먼저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교통적인 부분이지요.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가르치고 배움을 받는다면 우리의 생각과 의식은 달라져 가지요. 이는 혼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세움이지요. 마찬가지로 영 안에서 성령께서 창조적인 언어로 기도하시며 영 안에서 영적 빛을 비추이면 우리의 영과 혼이 그 빛의 비추임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영 안에서 우리의 영과 교제하시며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이 우리의 혼과 의식과 마음에도 전달이 되어져 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충만해짐”을 말씀하셨는데, 그 영적 원리를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령으로 기도하면 밧데리가 다시 충전함을 받듯이 우리의 영에 새로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고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육과 혼이 아닌 우리의 영, 곧 속사람이 강건해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워져 갑니다.


나아가 “성령의 그 빛의 비추임”속에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과거에는 누군가가 욕하고 미워하면 나도 그 사람을 미워하고 욕을 하곤 하였다면, 기도하지 않을 때는 그다지 마음 쓰이지도 않고 신경 쓸 일도 아닌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며 넘어갑니다. “그 사람이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니 나도 그러는 것 아닌가” 세상적인 윤리관으로 봐도 별 자책할 것이 없으니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성령의 계시와 빛의 비추임 안에서, 말씀 빛이 비추어오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아가 마음의 부담이 됩니다. 영적인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고뇌하게 됩니다.


육신은 용서하기 싫은데 미워하기 싫은데, 비춰오는 밝은 빛은 “용서하라, 사랑하라”말씀하십니다. 내적인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전쟁 앞에서 멈추어버린다면 영적인 성장은 끝나고 다시금 혼적으로 돌아가 버리겠지만, 성령의 뜻대로 온전히 살기를 열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시간은 다소 지체가 될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 앞에, 성령의 빛 앞에 자신을 죽이고 항복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나머지 육신적인 것들과 혼적인 것들이 하나씩 제거되어져 갑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육적, 혼적, 영적 쓰레기와 더러운 것들이 하나씩 그렇게 제거되어져 갑니다. 성령의 생수로 씻겨져 내려가고 성령의 불로 태워져 갑니다. 그러한 정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은 평생에 걸쳐서 일어나는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점차로 높은 영역을 향하여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하는 기도”로 우리는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나름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적이거나 혼적인 기도는 대부분 간구입니다. “하나님, 이것 좀 해 주세요. 저것 좀 도와 주세요”그러한 간구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닌 대부분 우리 육적, 혼적인 욕망에서 기인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듯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다 통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영이 무엇이라 기도하는지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바라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드리기 원하는 기도를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삼위이신 성령께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하는 기도를 성령께서 우리의 영 안에서 언어를 창조하셔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갈멜산 산상 대결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먼저 구하였지만 하나님은 먼저 성령의 불을 받기를 원하셨지요. 성령의 불이 임하고 그 다음에 하늘에서 비가 오고 물이 공급되었지요.


이처럼 때때로 우리는 육적, 혼적 욕망에 이끌려 자아적이고도 욕망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기도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도 통달하시기에 우리의 영 안에서 방언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온전히 기뻐하시고 받으실 기도를 창조해서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영은 세워지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영적인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왜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가 세워져 가는지에 대하여 주님께서 감동과 영적인 빛의 비추임으로 알게 하신 것들입니다.


결언적으로 방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강건함을 위하여 주신 너무도 귀하고 아름다운 영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기도하시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충만한 방언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세워지고 새로워지고 날마다 성숙, 성장해가는 저와 여러분이면 좋겠습니다.


잠시 내리는 비는 결코 땅을 흠뻑 적시지 못합니다. 매일 그리고 지속적인 기도와 경건한 삶에 애써서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세워져 가는 저와 여러분이면 좋겠습니다. 샬롬!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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