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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제대로 이해합시다

초록 등불 2011. 6. 6. 15:50

여러분들은 이미 오래 전에 ‘엑소시스트’라는 영화를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처음에 ‘무당’이라고 번역해서 소개했었는데, 그 뜻이 올바르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엑소시스트라고 원작의 이름 그대로를 사용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비로소 엑소시스트라는 축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이 영화가 60년대에 소개된 것이니까 그 이전까지 우리 교회는 축사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축사를 우리는 ‘엑소시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엑소시스트라는 말은 이교도적 용어인데, 헬라어 ‘엑소르키조’(eξορκίζω)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맹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깊은 간청 또는 탄원’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원상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엄숙하고 열렬하게 탄원하는 것으로 이는 귀신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엑소시즘을 행하다’라는 말이 두 차례 나오는데, 이 모두가 예수께 드리는 신실한 기원을 가리킵니다(“the Prince of Darkness”, Jeffrey Russell, 178쪽). 3세기에 이르러 엑소시즘은 사람이나 사물에 깃든 악령을 몰아내기 위해서 예수에게 기도하는 간접적인 좁은 의미만으로 국한시키게 됩니다. 이때 세례에 쓰이는 물과 향, 소금, 기름 등도 엑소시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 ‘피조물 소금아, 내가 네게서 귀신을 몰아낼 것이니... 이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적을 쫓아낼 성사(聖事)의 도구가 되리라.’라는 명령기도를 함으로써 정결해졌고, 그 후에 성사에 사용했습니다.

3세기부터 기독교에 입문하는 초신자들에게 사제들은 얼굴에 입김을 불어서 귀신에 대한 경멸을 나타냈으며, 귀신들을 쫓아내는 수단으로 ‘불어쫓기’(exsufflation)가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불신자들은 모두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존재로 보았고, 그들을 귀신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에 초심자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축사를 행하여야 했으며, 그 대표적인 행위가 ‘불어쫓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례 역시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의 땅인 하계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며, 다시 나오는 것은 재생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사단에게서 풀려나오는 과정의 최고점으로써 정신의 타락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권능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고 일종의 축사의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불어쫓기 대신에 향을 피워서 연기가 흩어지게 하는 것으로 축사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초심자에 대한 축사는 교회 안에서 사라졌습니다. 개신교 안에서는 일체의 축사 행위가 예배에서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배 밖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능력 사역에서 불어쫓기가 다시 되살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부 사역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성도의 얼굴에 입김을 불어내어 쓰러지게 하는 행동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행위가 일종의 불어쫓기에 뿌리를 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귀신이 들린 사람을 ‘에너규민’(energumen)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 귀신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므로 그 자신에게 책임이 없으며, 따라서 귀신을 추방하면 그는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중세에는 ‘악도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라는 명목론이 대두되게 되었습니다. 이 명목론의 거두인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am: 1285~1347)을 비롯해서 쿠사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와 놀위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4세기 수도사) 등이 있는데, 줄리안은 ‘사랑과 평화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악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했으며, 귀신의 유혹에 맞서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것을 가르칩니다.

중세는 기독교 신비주의가 부흥하는 시대였는데, 이는 ‘명목론’이 힘을 얻어가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명목론과 신비주의는 ‘하나님은 이성 보다는 경험과 직관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비주의적 직관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 속에 살아있고 움직이며,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레이 페트리(Rey Petry)는 ‘이것을 이해하는 자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만 있고, 또한 오로지 하나님만 생각하므로 그에게는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이다. 그는 일거수일투족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며 어느 곳에서도 예외가 없다. 그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향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세의 대표적인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는 ‘오로지 하나님 만이 절대적 존재이며, 피조물들은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순수한 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악령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순수한 무’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피조되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의 관점은 죄악에 물든 피조물들을 포함해서 만물이 하나님과 통합되어 있다고 봅니다. 악 역시 궁극적으로는 무이며, 공허라고 보는 것입니다.

공허(emptiness)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혼에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을 비우면 그 영혼은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것이 첫째이며, 다음은 존재론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아닌 비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도덕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벗어난 것의 무가치함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중세 신비주의 수도사들은 악령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영과 하나님이 하나 되는 것이므로 이를 이루는 구체적인 행위인 묵상을 가장 중요한 방해 대상으로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일체가 되고 친밀함을 누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여기에 사단의 방해가 그 어떤 부분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악령은 우리의 기도가 가치가 없고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유혹하며, 이것이 통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해서 얻은 환상이나 계시나 친밀함을 드러내놓고 자랑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게 하여 따돌림을 당하게 함으로써 기가 죽도록 자극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해갈수록 하나님과 친밀함을 방해하려는 악령의 방해는 더욱 교묘해지고 치밀해진다는 것입니다. 영적 유혹은 하와가 당한 것처럼 더 나은 어떤 것을 향해서 월권하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교회는 능력 사역자들(은사자들이라고 부름)이 이런 유혹으로 인해서 교회와 갈등 관계에 빠져 있었지 않습니까?

중세는 마법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법(witchcraft)이란 1400년부터 170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유럽을 휩쓴 악령 숭배적인 주술행위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동물로 변하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중세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이런 이야기는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된 ‘헤리포터 이야기’에서 다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는데, 이 책은 중세의 마법의 내용들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황당한 이야기는 흥미를 일으켜 사람들의 의식 속에 마법에 대한 동경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것이 마법을 사용하는 사단의 첫 번째 계략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중적인 것은 남자를 유혹하고 어린이를 죽이는 흡혈 귀신의 등장으로 악마는 어디에나 있다는 광범위한 공포심을 증대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인 드라큐라는 쇼몽의 이야기에 기인합니다. 로렌티 모티라는 자의 아내인 바르도네체라는 여자가 남편의 바람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악마를 불러옵니다. 악마는 그녀 앞에 긴 겉옷(튜닉)을 걸친 창백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후 이런 이야기들은 일제히 까만 두건에 빨간 튜닉을 걸친 창백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 다음으로 사단의 막강한 권능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도록 위협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교회에 가면 불행이 닥친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멀리하려고 합니다. 사단의 능력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함으로써 두려워하게 하여 그 올무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법의 네 번째 요소는 데오필루스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데오필루스는 사단과 계약을 맺어 동등한 자격을 갖게 됩니다. 이 쌍방의 계약을 치른 사람은 사단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런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사단의 노예가 되어 루시퍼의 일에 동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의 요소는 ‘사법적 억압’으로 이는 세속적인 법정과 교회 법정에서 다 이루어진 것으로 이단 심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고문과 위협에 직면한 수많은 피의자들은 교회가 만들어놓은 고소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마녀의 존재를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법정에서 언급되는 마녀에 대한 고소문을 통해서 마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438년 프랑스 남부에서 피에르 발랭이라는 노인에게 행하여진 재판은 그가 63년 동안 악마의 시종이 되었고, 이 기간동안 하나님을 계속 부인했으며, 십자가를 모독했고, 정기적으로 마법집회(사밧)에 참석했으며, 어린 딸을 희생으로 바쳤고, 바알세불과 관계를 맺었으며, 어린 아이의 살을 먹었다고 자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마법에 빠진 사람의 고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로 인해서 중세 사제는 물론 신학자들까지 유럽 전역에 사단의 세력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단정하고 대대적인 색출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광기어린 행위가 만연하게 된 동기는 1486년에 발행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에서 비롯됩니다. 이 책은 성경을 제외한 가장 인기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고도의 마법에 기인한 것이며, 사단의 철저한 계략으로 인해서 단계적으로 발전해서 마침내 중세 기독교 사회 전반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갔습니다. 이런 행동은 후에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인민재판’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여론재판’이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일종의 마법의 변형인 것입니다.

중세에 사단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강화되면서 마법이라는 특별하고 기이한 형태의 악마열을 불러 일으켰지만 실제로 그것은 사단이 교회를 무력하게 만들고자 한 고도의 계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교묘한 책략으로 우리들을 속이려고 하며, 마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엘리트들을 속입니다. 중세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 책략에 휘말려 마녀사냥이라는 과오를 범하면서 신앙을 두려움으로 몰아갔고, 영성과 신비주의는 이 이름 아래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마법은 오늘날 우리 지식사회에 스며들어 군중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을 위협합니다. 장차 666으로 대표되는 사단의 최후 발악은 오랫동안 마법의 기술을 익혀온 악령들의 최후 반란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끊임없이 축사를 해서 사단의 계략을 드러내야 할 의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출처: 영성이야기 (갓피플카페:healinghouse), 장봉운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