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세계 영성은사/† 영성-연단.시련

[연단훈련]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숙성해야 합니다

초록 등불 2011. 8. 8. 18:38

최근에 비무장 지대에서 전란 전에 묻어두었던 간장이 발견되어 화재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조선 시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간장이 발견되었는데, 한 병에 수억이나 호가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숙성된 간장의 맛은 우리가 먹고 있는 일반적인 간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독특한 맛을 지녔을 것입니다. 수백 년 숙성시킨 포도주의 값도 엄청나지 않습니까? 발효식품은 세월이 많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집니다.

영적인 일에도 숙성기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기능성 직업은 반드시 오랫동안 몸에 익혀야 하는 숙성기간이 꼭 필요합니다. 평생을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한 장인들의 작품은 예술품으로 대우를 받지 않습니까? 몇 년 기술을 익혀서 흉내 내는 기술자들의 제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높은 예술성과 정교함은 보는 사람들을 감탄으로 이끕니다.

오랜 세월 한 가지를 연구하고 단련하는 숙련의 기간을 보낸 장인의 작품이 예술이 되듯이 영의 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긴 세월을 하나님과 홀로 있기를 배운 사역자의 사역은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에 대중에게 나서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입니다. 그는 다메섹 사건 후 14년간 대중으로부터 잊혀졌고, 아라비아라고 하는 지역에서 홀로 지내는 숙성기간을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선교초기에는 독단과 관용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나친 정의감이나 극단적인 의가 나타났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지나친 정의감은 젊은이들의 상징이며 특성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젊은이가 아니겠지요. 의에 대해서 분명한 소신을 밝히지 못하는 것을 타협이라고 판단하는 젊은이들은 나이 든 세대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첫 전도여행에서 마주친 두 가지 사건을 보면 그의 독단적인 판단이 젊은이들의 의와 비슷하다고 여겨집니다. 젊은 마가 요한의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와 어려운 일을 피하려고 하는 젊은이로서의 생각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동행에서 배제시켜버린 것과 구브로 섬의 바보에 이르렀을 때 총독 서기오의 책사인 바예수라고 하는 술사가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려고 하자 그의 눈을 당장에 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14년의 긴 세월 동안 고독한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 전도여행은 이처럼 거칠고 아량이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사역을 행하면서 그의 이 같은 날카로운 생각들은 모가 깎이어 둥글어집니다. 법정에 섰을 때에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유연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행 23:1~5).

사역자의 유연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유연성(pliability)은 세상에 적응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의만으로 다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얼마나 상대방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맞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세월을 살아야만 터득할 수 있는 삶의 지혜입니다. 이 유연성이 젊은이들에게는 타협처럼 보일 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타협해서 의지를 꺾는 것을 도무지 용납하지 못합니다. 의협심이 강해서 흑과 백을 선명하게 구분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툼이 많이 생깁니다. 젊은이들의 이 같은 태도는 자신의 의 때문에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합니다. 다양한 입장들이 있고 그 입장들마다 존중해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연쇄살인마에게도 변호해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희생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과격한 투쟁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반세기 전에 일어난 육이오는 이런 가치관으로 무장된 젊은이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전쟁이었습니다. 30대의 젊은이들이 정권을 주도했기 때문에 저돌적이었습니다.

영적인 일에서 숙성이 꼭 필요하지만 젊은이들의 생각 속에는 이런 부분이 약합니다. 숙성에 대한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사역현장으로 나갑니다. 일반적인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는 이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데, 사람을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경제의 주체가 재화인 일반적 경영에서는 우선되는 것이 상품과 돈이지만 영적인 일에서는 대상이 사람 그 자체입니다. 일반적인 경영에서도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고객우선 경영’이나 ‘감성경영’등이 있지만 이는 방법론일 뿐이며, 본질은 재화를 다루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사역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취급하는 것이므로 섬세함이 무척 필요합니다.

실족이라는 말로 표현된 ‘상처를 주는 일’은 그 원어인 헬라어 ‘스칸달리조’가 ‘스칸달론’이라는 말에서 파생한 것인데, 영어의 ‘스켄들’은 이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불미스런 일이나 창피한 일을 일컫는 스켄들의 어원인 스칸달론은 덫, 올가미, 함정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실족케 하다’라는 말은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덫에 걸리게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상대방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올무를 놓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의협심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며 상대방이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합니다. 젊은 마가 요한을 추방한 바울은 그 일로 인해서 입게 된 마음의 상처를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바울 보다 나이가 더 많은 요한의 삼촌인 바나바는 이런 조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바울에게 다시 요한을 받아들일 것을 청했지만 바울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마가 요한의 소심함만 보였지 그가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가까웠던 바울과 바나바는 결별하게 되고 맙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의만 앞세운 결과였습니다. 인생을 많이 살아보지 못한 젊은이들은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특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무척 이지적이기 때문에 사로 상처를 주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를 주는 일(스칸달론)은 불미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런데 그 주체는 그 일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반성도 없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처음에는 그 일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 상처는 내면으로 스며들어 사사건건 장애를 만들어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나타나는 상처로 인한 병증은 본인도 그 원인을 모릅니다.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다 모르는 상처의 후유증은 정신적 질환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고 후유장애를 만들어내는 주범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내적 치유’(속사람 치유가 성경적입니다.)는 이런 과거의 상처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런 불행한 일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미숙한 대응에서 비롯됩니다. 영적 사역에서 젊은 사역자들이 자칫 범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옳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둔 나머지 성도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고 독려하는 일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다보면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7). 없을 수 없다고 해서 상처 주는 일 자체가 면죄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게 모르게 주게 되는 상처는 받는 사람의 책임만도 아닙니다. 하찮은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준 사람의 면밀하지 못함에 대해서 주님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숙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혈기는 목적만을 우선한 나머지 수단을 소홀히 하게 되며, 그 때문에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젊다는 것은 연륜이 모자란다는 뜻이며, 이는 숙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푯대가 되는 지도자를 두고 경륜과 유연성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타협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타협과 조화는 그 구분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易地思之’는 맹자 ‘이루’(離婁)에 나오는 ‘易地卽皆然’이라는 말에서 온 것인데, 중국의 전설적인 성인인 하우는 물에 빠진 백성이 있으면 자신이 치수(治水)를 잘못하여 그들을 빠지게 하였다고 여겼으며, 후직은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을 잘못하여 백성을 굶주리게 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현상에 대해서 자신이 원인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영성이야기 (갓피플카페:healinghouse), 장봉운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