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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훈련] 마귀의 일을 끊으려는 노력을 합시다

초록 등불 2011. 8. 8. 19:29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멸하려고 했던 그 마귀의 일은 마귀가 이 땅에 있는 한 계속 이어져야 하며, 그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었던 축사의 일은 이후 우리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며,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이 일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완벽하게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그 최종적 승리가 십자가의 승리이지만 마귀는 아직도 그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 땅은 여전히 마귀의 활동무대인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먼 훗날까지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대로 마귀의 일을 멸하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의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의 일을 너무도 관념적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는 관대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에 대해서 스스로 방어하는 것은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이성적인 판단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행하는 대부분의 행위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세속적인 비유지만 ‘자신이 하면 로멘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는 태도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 가운데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정도의 경미한 것을 우리는 죄얼(iniquity)이라고 부릅니다. 사회적으로는 경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이런 죄얼은 스스로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호한 주관적 판단에만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습관이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마귀의 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막연한 생각과 관념적인 판단 때문에 쉽사리 물리칠 수도 있는 마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심하게는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먼저 세상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교육은 세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학교는 역시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만을 다루기 때문에 머릿속에 막연하게 들어와 있을 뿐입니다. 주일학교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전일 교육을 하고 있는 세속적인 학교교육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합니다.

세속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도 역시 그런 식으로 교육을 하고 받습니다. 그러므로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험이 전무한 학교 교육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서 실험에 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이른 바 ‘주입식 교육’은 검증이라는 중요한 과정을 생략하게 만들며, 그렇기 때문에 검증하는 실험은 정상적인 활동이 아니라 비판하거나 의심하는 옳지 못한 행위로 인식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절대 다수가 검증을 비판이나 꼬투리를 잡으려는 의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취급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분석하거나 점검하는 능력이 무척 약한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누구도 선뜻 나서서 검증하거나 따지려고 하지 않는 이런 사회적 흐름은 우리 사회를 가장 부패한 사회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마귀는 검증을 가장 싫어합니다. 이 말을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분별력이나 식별력입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이 마귀의 일을 멸하도록 우리들에게 주신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 능력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세상에 물들어서 영적 분별(spiritual discernment)을 신령한 은사로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영 분별의 은사’라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분별의 의무를 영분별의 은사에 떠넘기고 있습니다.

제가 항상 주장하는 바인데, 은사와 권세는 같은 것이며, 다만 은사는 집중적으로 전문적으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부어주시는 더 강력한 능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와 같은 권세는 누구든지 받은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예언할 수 있으며, 다 병을 고칠 수 있으며 다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은사를 받은 사람은 더 강력하고 빈번히 사역할 수 있으며, 그 일에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오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분별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일은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의식하지 않은 채로 살아오면서 몸에 길들여진 어떤 행위를 통해서 작용하게 됩니다. 아무런 반성이나 식별 없이 자연인으로 살아왔기에 용납되었던 대부분의 행위에 대해서 마귀는 손쉽게 자신들의 의도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마귀로부터 알게 모르게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남이라는 영적 변화를 통해서 마귀의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 힘은 식별력이며, 영적 분별력이며, 말씀을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이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능력이 우리 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힘든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몸을 만들기 위해서 헬스크럽에 회원 등록을 하고 다니지만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합니다. 6개원 할인 등록을 하였지만 그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처럼 몸을 만드는 운동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비를 견디고 운동이 몸에 배게 되면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됩니다. 몸에 익숙해지면 일상처럼 운동을 하게 되듯이 영적 훈련 역시 그렇습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고 공부하는 일을 어느 수준까지 이를 악물고 하지 않으면 몸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수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선 부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전문가의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것 역시 마귀의 일에 속하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들의 수준이 대충 수준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마추어가 되어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도록 부추깁니다.

마귀의 일은 우리가 전문화하지 못한 영역에서 작용합니다. 앞의 글에서 군중심리에 관해서 다루었는데, 상식수준에서 전문가가 다룰 영역을 취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설픈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동하는 모든 부분에 관해서 항상 살피도록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라는 행위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보는 분별행위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다림줄로 점검해서 자신 안에 있는 마귀의 일을 찾아내고 그 일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깨우침을 얻는 것입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회개라는 분별과 식별을 통해서 마귀의 일을 분별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지만 죄를 짓는 것이 결코 자랑일 수는 없습니다. 죄에서 떠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귀의 일에 대해서 인식이 필요합니다. 마귀의 일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견주어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식별을 통해서 깨닫게 된 죄 즉 죄얼 쉽게 말하면 그릇된 습관이 발견되면 그것을 끊으려는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이 성결로 나아가는 성화의 길입니다. 우리는 멀고도 험한 성화의 길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마귀의 일을 제대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기 안에서 발견할 때 제거되는 것입니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마귀의 일에 익숙한 채로 살아왔기 때문에 버릇처럼 몸의 일부처럼 기질처럼 본성처럼 그렇게 굳어버린 죄얼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고치려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절하지 않으면 결코 떠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마 9:43) 이 얼마나 엄격한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너무도 대충 살아가려는 안일함에 휘말렸습니다. 마귀의 달콤한 속삭임에 우리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마귀의 함정은 ‘수동’입니다.

웟치만 니는 『영에 속한 사람 』하권 2장 ‘피동과 피동의 위험’이라는 글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번역마당에서 이 부분에 관해 일부분을 번역해서 소개했습니다.(60~62번 게시판 글을 참고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믿음이란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해야 할 것조차도 방임하는 수동에 빠질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이런 부분에 관해서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바처럼 우리가 의당해야 할 부분마저도 손은 놓고 있기 때문에 마귀는 더욱 우리를 쉽게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취급하는 반대편에는 판단은 곧 불순종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하는 오류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독선과 아집이라는 마귀의 일이 자리를 굳게 잡아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조차도 두 세 사람의 검증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 식별한 후에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도 역시 마찬가지로 판단과 식별을 통과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교양강좌나 코미디 같은 설교가 강단에서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영성이야기 (갓피플카페:healinghouse), 장봉운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