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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바울 목사님] 나의 인생 나의 신앙

초록 등불 2012. 3. 14. 08:38

고바울 목사님 간증- 2000년도 국민일보 [나의인생 나의신앙]중

낮아진 하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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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①] 가난했던 유년시절…교회는 ‘마음의 안식처’

 

◇ 고바울 목사 <공주국제금식기도원장>

 

기도원을 운영하며 계룡산 우상의 땅을 복음의 땅으로 일구는데 전념하고 있는 나는 지난 42년 충남 공주 옥룡동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지금은 늘 감사와 기쁨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너무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 기억은 해맑지 못한 것 같다.

 

어머니에 이어 8세 때 병환으로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어린 가슴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어머니는 내가 4세 때 세상을 떠나 슬프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병환으로 고생하셨던 어머니는 당시 6남매 중 막내인 내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과일을 사들고 오면 다른 사람은 손을 못 대게 하고 “막내야 많이 먹어라”고 말씀하셨다.

두 손에 사과를 들고 또 겨드랑이에 사과를 끼워 집밖으로 나가 놀던 추억이 생생하다.그렇게 막내를 사랑해주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형,누나들은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저 멀리 가서 놀다가 오라며 손에 용돈을 꼭 쥐어주었던 기억도 난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가난했던 우리 가정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소천하시자 더욱 어려움에 빠졌다.형과 누나들은 제각각 자기 앞길을 개척하느라 막내를 돌봐 줄 겨를이 없었다.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고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교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차를 몰고 나타난 선교사님이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7세되던 해 선교사님은 공주제일감리교회에서 전도를 시작하셨는데 그분이 타고 다니시는 차를 구경하려고 선교사님이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이 보통 30∼40명이 몰려들었다.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들면 선교사님은 차 트렁크에서 껌과 초콜릿,통조림 등을 꺼내 우리에게 나눠 주셨다.

 

선교사님은 먹을 것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고는 하셨다.“하나님께서 인간과 흙,돌,산,물 등 모� 만물을 만드셨습니다.여러분,하나님을 믿으시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나는 선교사님들이 닭고기를 먹을 때 살점이 붙어있는 뼈를 그대로 버리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해 놀란 적이 있다.우리는 당시 살점을 싹 먹어치운 뒤 다시 그 뼈다귀로 국을 끓여 먹었으니 참으로 가난한 시대였다.

 

선교사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소와 돼지,양,닭 등을 많이 길러야 잘 살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구하면 주십니다.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고 부지런히 일해 가난을 떨쳐버립시다”

 

겨울이 다가오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하루는 너무나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았다.밤 12시쯤 모두들 잠든 사이에 김장김치를 꺼내 먹으려고 방문을 조심조심 열고 밖으로 나갔다.땅 속에 묻어둔 김칫독을 열어 김치를 꺼내려고 하는데 손에 잡히지 않았다.더 깊이 손을 넣었다.결국 밑바닥에 조금 남아있는 김치를 꺼내려다 김칫독에 몸이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형님이 새벽에 화장실 가다 추위에 떨며 신음하는 나를 발견하고 건져냈다.먹을 것이 많은 시대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이같은 일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②] 축산서 첫 시련…양복기술 배우러 상경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됐지만 집안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어렸지만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고 억울해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방에서 하염없이 울고나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다.교회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돌보심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주일학교 박인규 선생님은 용기를 잃지 말라면서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뿐만 아니라 교회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 목욕도 시켜주시고 머리도 깎아주셨다.옷과 신발도 교회에서 얻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렇게 성장한 나는 14세 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친구들은 부모,형제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그럼 무엇을 해 돈을 벌어야 할까.선교사님의 말씀대로 가축을 길러보자’

이렇게 결심한 뒤 남의 집 농삿일을 해주고 받은 품삯으로 닭과 토끼,돼지,염소 등을 한마리씩 사기 시작했다.자재를 살 형편이 못돼 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고 공사장에서 철사를 주워와 조그맣게 축사를 지었다.

 

이렇게 시작한 가축사육은 번창해 3년만에 닭은 100마리,돼지는 10마리나 됐다.토끼와 염소도 그 수가 늘어갔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공주 일대에 전염병이 나돌아 가축이 몰살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연단이 시작된 것이다.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주여,너무 하십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원망과 애원이 뒤섞인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길을 열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동네 선배 한 분이 양복기술을 배우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일러줬다.귀가 솔깃했다.왜냐하면 공주읍내에서 양복점 하는 집이 농사꾼보다 훨씬 잘 살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구나.그래 양복기술을 배워 우리 가정을 일으켜세우는 거야.최고의 기술자가 돼 떵떵거리며 살려면 서울로 올라가 유명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워야 해’

부푼 꿈을 안고 상경했다.당시 양복기술자들은 동대문에서 일을 배워 종로나 명동,소공동으로 진출하는 코스를 밟고 있었다.동대문 양복점으로 찾아가 취직했다.열심히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사장님도 특별히 아껴주셨다.스무살이 넘자 승승장구해 명동에서도 알아주는 기술자가 됐다.24세 때는 고향에 내려와 읍내에 ‘미조사’양복점을 차렸다.교회도 열심히 나갔다.사장이 된 뒤 지역에서 유지대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을 사귀게 됐다.

 

“고사장,사업을 크게 일으키려면 술도 마실 줄 알고 담배도 피울 줄 알아야지.그렇게 맹꽁이같이 생활해서 언제 큰돈 만지겠나” 원래 세상 마귀의 유혹은 달콤하게 마련이다.술도 입에 대고 담배도 피웠다.세상 마귀는 손님도 더 많이 보내주는 것 같았다.그렇게 세상의 달콤함에 빠져 있을 무렵 목사님이 갑작스레 심방오셨다.나는 담배를 피우다 그만 목사님께 들켜버렸다.

 

“고선생,교회에 빠지지 말고 나오십시오.술과 담배를 먹는다고 영 교회에 발을 끊을 생각이십니까.교회에 나와 기도하시면서 차츰 끊도록 하십시오”

 

“예,알겠습니다 목사님.하지만 술 담배부터 먼저 끊고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그후 곧바로 40일 새벽기도에 들어갔다.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③] 물질적 풍요속 ‘교만’…부도 이어 심신쇠약

 

술과 담배를 끊기 위해 새벽기도를 시작한 지 27일째가 되자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었다.하지만 꾹 참고 계속 기도를 드렸다.40일 기도를 마치자 담배냄새가 역겨울 정도로 싫어졌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물질의 복을 주시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사용하겠다고 서원했다.

 

하나님께서는 서원기도를 들어주셨고 그후 3년만에 부자가 됐다.사람이란 모름지기 성공하면 교만하게 마련이다.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또 다시 친구들과 어울려 사냥하러 다니면서 술을 마셨다.하나님께서 그냥 두실 리 없다.양복점에 도둑이 들어 돈과 옷감을 몽땅 털렸다.그 뒤로 이상하게 손님이 계속 줄기 시작했다.거래처의 수금도 잘 되지 않았다.유동자금이 달려 결국 양복점은 부도가 나고 말았다.채권자들이 몰려와 멱살을 잡고 돈을 달라며 난리법석을 부렸다.이웃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몸이 급격히 쇠약해져 갔다.목이 점점 붓더니 계란만한 덩어리가 잡히고 귀에서는 고름이 쏟아졌다.뿐만 아니라 시력이 갑자기 떨어지고 두통도 심했다.몸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온몸이 아프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니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끼게 됐으며 심지어 아무 생각없이 길을 가다 전주에 머리를 꽝 부딪친 뒤 정신을 차리곤 했다.지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서울대병원을 찾아가 정밀 진단을 받았다.병원에서는 종양이 온몸에 퍼져 있다면서 뇌로 번지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했다.공주로 돌아온 나는 얼마남지 않은 재산을 처분해 한달 하숙비와 병원비를 준비해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본격적인 통원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 공덕동에서 하숙을 하게 됐다.시골에서 가져온 짐을 푸는데 성경책이 땅바닥에 떨어졌다.그것을 본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예수 믿으세요?”라고 물었다.

 

“예,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알고보니 아주머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권사였으며 남편은 장로였다.그 아주머니를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갔다.

 

조용기 목사님이 ‘토기장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시는데 꼭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었다.예배시간이 1시간40분이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너무나 은혜가 돼 1부에서 3부까지 똑같은 설교를 계속 들었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심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겸해서 받았다.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픈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세요.사업에 실패하셨다고 하셨죠.그것도 죄다 잊어버리세요.그리고 지금의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해보세요.아,여행도 많은 도움이 되겠군요”

 

하지만 여행은 잠시 마음을 편하게 할 뿐이었다.여행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은 또다시 우울하고 죽고싶은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소개해준 최자실 금식기도원을 찾았으며 첫날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최목사님은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마음의 정함이 없어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해주시지 않습니다.약 먹고 치료할 사람은 내려가시고 금식해 병을 물리칠 사람만 여기 남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말에 거부감이 생겼다.‘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기도해야 효험이 있지 금식기도로 어떻게 병을 고칠 수 있나’

 

집으로 돌아온 뒤 병원에 다시 다녔다.하지만 며칠 다니고 나니 치료비가 바닥났다.이런 저런 궁리를 했지만 이제 해볼 것은 금식기도밖에 없었다.다시 최자실 금식기도원을 찾았다.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④] 참회하며 성령의 권능에 ‘生死’의탁

 

최자실 금식기도원에 들어서자 지난번과는 달리 입구에 쓰여있는 성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여기서 기도의 끈을 놓으면 난 죽는다.여기서 병을 고쳐 돌아가든지 토굴에서 죽든지 해야 한다.그래 두 마음을 품으면 죽게 된다.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병을 고침받아야 한다’

 

금식기도 사흘째,하나님께서는 환상을 보여주셨다.일곱마디로 된 밧줄에 꽁꽁묶인 나를 보여주셨다.옴짝달싹 못해 주님이 부르셔도 갈 수가 없었다.그때 나의 죄패가 눈앞을 지나가는데 온갖 죄가 다 쓰여 있었다.하나님보다 돈을 좋아한 죄,쾌락을 좇아 산 죄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죄가 보였다.

 

그 죄패를 보면서 얼마나 울며 회개했는지 모른다.그렇게 하루 낮밤을 꼬박 지나고 나자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모습이 보였다.채찍질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비오듯 땀을 흘리며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이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하나님을 인간의 잣대로 섬기며 오만불손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그래 내가 안다.그러기에 너의 질병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간다.너에게 건강을 다시 주었느니라”

 

그 순간 그 무서운 질병에서 풀려났다.그때 나는 그토록 생사를 같이할 친구를 원했는데 바로 그 친구가 예수님인 것을 깨닫게 됐다.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이었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예수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 신유의 은총을 입고 난 후 계속해서 성령의 깊은 은혜를 체험했다.예수님은 마귀와 귀신을 쫓아내신 후 폭포수로 씻기시고 기름을 부어주시면서 은사도 주셨다.지혜와 지식,믿음,신유,방언 등이 그것이다.또한 평소에는 40분 이상을 기도하지 못하는데 이같은 일이 있은 후에는 보통 하루에 7∼8시간 기도할 수 있게 됐다.너무나 은혜에 감사해 촤자실 금식기도원에서 7개월간 봉사생활을 한 뒤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배운 것이라곤 양복기술밖에 없어 양복점을 찾아갔지만 양복업계가 불황이어서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친구 한 사람이 이화여대 입구에서 의상실을 운영했는데 그래도 그쪽 분야는 사업이 잘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의상실에 취직을 했다.

 

나이가 어린 여자 밑에서 새로이 기술을 배웠다.월급은 고작 8만원밖에 되지 않았다.그 돈으로는 한달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다.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쉬는 시간엔 기도하며 열심히 일했다.

드디어 기술을 마스터해 대전에서 예전 상호 그대로 ‘미조사’ 의상실을 차렸다.신앙생활을 착실히 하면서 돈도 제법 벌었다.그런데 79년 10?^26사태가 일어나 불황이 닥쳤다.그만 또다시 부도가 나고 말았다.지난번처럼 가게로 몰려든 채권자들로부터 많은 모욕을 받았다.그때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했다.

 

“주여,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저의 눈을 뜨게 해 주시옵소서”라며 통성으로 기도했다.그때서야 나는 사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님을 발견하고 목회에 꿈을 두게 됐다.81년 39세 때 대전 한성신학대에 입학하게 됐다.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⑤] 신학교에 입학한 뒤 ‘기적같은’ 일들이…


신학교에 들어가니 너무나 기뻤다.책가방을 여러 개 사서 이것저것 들어보았다.개학날에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특히 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어려운 재정문제도 하나하나 풀려갔다.

 

어떻게 수업료를 낼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주셨다.참으로 이상한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졌다.그렇게 돈을 달라고 졸라대던 채권자가 하루는 찾아와서는 “요즘,어떻게 지내요.신학공부까지 한다지요.참으로 딱하네요.이거 얼마 안되지만 생활비로 쓰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다른 사람이 찾아오더니 “아니,고사장,당신이 잘 돼야 돈을 받을 것 아니오.내가 밑천을 대 줄테니 장사한번 해보시오”라고 말했다.거짓말 같은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주님,정말 감사합니다.죄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저를 주님의 종으로 삼으시려고 이렇게 도와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주님께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채권자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평생 갚지 못할 것 같았던 빚을 신학교에 다니면서 장사를 해 모두 청산했다.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믿는 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성경말씀을 실감한 순간이었다.또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대로 살며 순종하면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갈마동에서 교회를 개척했다.지하성전이어서 철야기도를 하고 나면 몸이 개운치 않았다.여기에다 신학교에서 배운대로 신비주의를 완전히 배격하고 목회를 하니 성과가 없었다.건물세도 못낼 지경에 이르렀다.그만 심한 좌절에 빠졌다.

 

이러다간 안되겠다 싶어 목회의 힘을 얻기 위해 오산리 최자실 금식기도원으로 떠났다.40일 금식기도를 작정했다.하나님께서 나를 종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금식한지 23일째 되던 날 우리 주님은 나를 만나 주셨다.

 

주님은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다.“내가 일할 수 있는 목회를 해라.인간의 생각대로 하지 마라.네 계획대로 하면 성령의 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너는 꼭두각시가 돼라”

 

그같은 음성을 듣고 지금까지의 목회에 대해 반성을 했다.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목회를 하니 교회가 부흥될 리 없었다.성도들이 몰려와도 금세 떠나고 마는 것이었다.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주님의 말씀대로 기도하면서 목회를 하자 교회는 부흥돼 갔다.특히 주님께서 교회를 찾은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고쳐주셔서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결신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열 문둥병자를 고치자 한 문둥병자가 와서 인사를 한 것과 같이 10명의 환자 가운데 한 명의 환자가 결신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배드리는 시간과 심방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했다.그즈음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둘째딸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학교 건널목에서 택시에 치여 숨졌다.딸의 시신이 안치된 대전 을지병원 영안실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주님,너무 하십니다.왜 이토록 저를 고통 속에 두려 하십니까.차라리 저를 데리고 가시지 저 어린 딸을 주님 곁으로 데리고 가십니까”

 

당시 그 아이의 보상금으로 1250만원을 받았다.그 ‘피값’을 들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나를 위해 그돈을 사용할 수 없었다.나중에 천국에서 딸을 만났을 때 “역시 우리 아버지 최고예요”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⑥] 딸 잃고 ’기도원’에 뜻…계룡산 찾아


피값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정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기도원 부지를 물색했다.전라도와 경상도,섬지역까지 가 보았다.부동산 업자가 좋은 땅이라고 소개해도 기도해보면 대부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다 충남 공주까지 땅을 보러가게 됐다.계룡산 주변의 땅값이 싸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의 공주국제금식기도원 자리를 보게 됐다.

 

기도원 주변을 돌아보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주로 영검한 계룡산에 대한 것이었다.당시 그곳에는 23평 남짓되는 성전과 방 3개를 갖춘 기도원이 있었다.몹쓸병에 걸려 고생하다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친 서울 영락교회 권사 한 분이 그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북출신인 권사님은 기도원을 이곳저곳 구경시켜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힘에 겨워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됐어요.당신같이 사명감에 불타는 젊은 사람이 이제 이 기도원을 운영해야지요.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환자들이 찾아와 천막을 치고 순서를 기다릴 정도였어요.내가 몸이 쇠약해진 뒤로는 기도원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폐쇄 직전에 놓인 기도원이 위치한 골짜기를 둘러보았다.계룡산은 정말 악령의 본부 같았다.충남지역의 귀신들을 추방하려면 성령의 기지인 기도원이 존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그곳 기도원을 물려받아 영혼구원 사역에 나서기로 결심했다.“권사님,노병은 이제 후방에 가 계십시오.신병인 제가 일선에서 마귀와 싸우겠습니다”

 

교회와 숙소를 새로 짓기로 했다.건축을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이 기도원 건축을 반대하고 나섰다.“다시는 여기서 기도원 못합니다.병자들이 몰려드니 나쁜 병균이 동네에 득실거려요.절대 기도원 못합니다”

 

방해공작이 너무나 심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계룡산 마귀들이 총회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해.기도원이 다시 문을 열어 활동할 수 없도록 말이야.기도만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산골짜기에서 능력의 주 하나님께 외쳤다.‘주여! 이곳의 나쁜 마귀를 물리쳐 주시옵소서.성령님께서 이곳을 친히 간섭해 주시옵소서.저 우매한 동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 앞으로 나와 자복하고 회개해 인생의 참 기쁨과 행복을 알게 해 주십시오”

 

아들이 아버지께 간구하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모른체 하시겠는가.‘노하지 말고 참으며 주민들을 더욱 더 사랑으로 대하라’는 응답을 주셨다.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항의하고 삿대질을 해도 그저 참고 너그럽게 대했다.사랑은 얼음같이 차가웠던 주민들의 마음을 녹였다.

 

본성이 착하고 순수한 동네 주민들은 기도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버리고 나중에는 오히려 기도원 건축에 협조해주었다.기도원을 개설한 뒤 이를 기념해 대부흥회를 열었다.그런데 부흥회 강사님이 밤에 잠을 자면서 가위에 눌려 잠시 정신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악령의 기세가 그만큼 드셌던 것이다.나도 처음에는 하루에 7∼8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어두운 영에 눌리는 것 같았다.

 

한편 나는 주의 종이 된 뒤에도 딸을 잃는 등 계속 저주 아래 놓여 있었다.공주에는 옛날에 골짜기마다 신당을 만들어 놓고 우상에게 제를 올렸는데 우리 고조할아버지가 제주가 돼 관장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시편 16편4절에 보면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 할 것이라”라고 기록돼 있다.기도원을 운영하면서 가계에 흐르는 이 저주를 끊으려는 노력이 계속됐다.


[나의인생 나의신앙-고바울⑦(끝)] 영육고통 치유 헌신…‘주의 종’ 은혜 감사

 

시편 16편4절과 106편28∼30절,115편1∼14절 등에 보면 가계의 저주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사는 길이 나와 있다.나에게 내려진 저주를 스스로 끊기 위해 노력하면서 받은 은혜로 나와 똑같이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기도원에서 열심히 치료하고 있다.

 

보통 하루에 서너시간만 자면서 그들의 고민을 상담하고 아픈 마음을 위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깨끗함을 입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기도원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는 영육간의 문제를 가진 이들이 많다.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거나 사업이 잘 안되는 등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갖고 있다.

 

치유에는 기본적인 게 있다.먼저 죄를 회개해야 한다.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복을 받고 속상하게 하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고린도전서 2장10∼11절에 보면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한다.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기록돼 있다.

 

나는 최자실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소천하시기 바로 전에 우리 기도원으로 오셔서 부흥집회를 두번 인도해주셨는데 얼마나 은혜로웠는지 모른다.

 

편안히 집회를 마칠 수 있도록 대전에 최고시설의 호텔방을 예약했으나 최목사님은 거절하시고 식사도 기도원에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고목사님,이렇게 좋은 기도원 방을 두고 호텔에서 자라니요.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식사는 된장국과 김치만 있으면 됩니다”

 

최목사님은 또 “제자의 금식기도원을 축복해주러 왔다”고 하시면서 여러 사람이 40분 이상 강단에 서지 말 것을 권유했지만 3시간30분 동안 찬양하고 춤추시면서 800여명이나 되는 사람을 일일이 만나 상담하시고 안수하셨다.

 

그래서 집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신 최목사님이 그곳에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얼마나 슬픔에 잠겼는지 모른다.공주국제금식기도원이 이렇게 부흥된 것도 그분의 기도 힘이 컸기 때문임을 확신한다.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에서 모여든 성도들이 기도원 골짜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며 영육간의 건강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오산리 최자실기념국제금식기도원에서 생사를 걸고 기도하던 옛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병과 가난,외로움으로 죽어가는 나를 살려주시고 아들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하나님께서는 또한 특별히 주의 종으로 기도원까지 운영하게 해주시니 그 은혜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곤 한다.‘세상에서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장관과 대통령이 나보다 행복할까? 아니다.그럼 대기업 회장이 나보다 행복할까? 아니다’

 

로마서 8장14∼18절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4절에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내가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가졌으니 어찌 행복하고 날마다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참고로 우리 기도원은 매일 낮 11시와 오후 4시,저녁 8시,밤 12시∼새벽 4시에 집회를 갖는다.성도들은 철야집회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

 

장기금식자를 위해서 목사관과 사모관,성도관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며 집안에서 모시기 힘든 치매?^간질?^알코올중독자도 치유받을 수 있도록 기도원에서 도와주고 있다.(끝)

출처 : 수정빛 생명수와 불 비둘기
글쓴이 : 초록 등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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