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영적 체험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어떤 사람을 놓고 중보 기도를 드리다보면 그분이 어떤 어둠의 영의 역사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경우는 그 어둠의 영이 나타나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영으로 대화를 하곤 합니다.
물론 영적인 일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신중한 사실 확인과 분별은 언제나 필요하겠지만요.
그런 경우 그 악한 영에게 왜 그 사람에게서 들어왔고 나가지 않느냐고, 또 무엇을 하려고 들어왔는지를 물으면 때로는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부모의 죄를 타고 역사하는 영을 보게도 됩니다. 그런 경우는 참 마음이 아프지요.
하나님의 말씀도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요.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그런데 이처럼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손 3~4대에 걸쳐서까지 내려갈 수 있는 재앙과 저주를 부르는 죄를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심상히 여깁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성경의 지혜서가 말하고 있지요.
잠14:9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조금 더 쉽게 풀이한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미련한 사람은 죄를 대단치 않게 생각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죄를 두렵게 여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인간이 불순종하고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사망과 고통이 찾아왔고, 그 사망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다시 말씀드리면 죄 용서와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지만 저도 이전에 그러했거니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아주 심상히 여깁니다. 가볍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죄에 대하여 깊은 경각심을 깊이 각인시켜 주지 않지요. 하지만 죄는 저주와 사망과 재앙을 가져오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영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계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이 본문을 보면 원수 마귀는 그의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참소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참소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와 불의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원수 마귀는 하나님께 “이 사람이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재앙을 내려야 합니다”라는 식으로 참소를 합니다. 그러한 사단의 참소 앞에 하늘이 대제사장으로 계신 예수님은 중보의 간구를 드리지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영계의 공의의 법칙에 따라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에 따라 적정한 시험과 환란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히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그렇게 되면 원수 마귀는 합법적으로 우리의 삶에 저주와 재앙을 내릴 권리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양하게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가난으로, 때로는 재난으로, 때로는 귀신들림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곧 죄는 저주와 재앙의 씨앗이며, 사단의 역사를 영계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해 주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죄의 심각한 결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며, 또한 그 죄의 처리의 문제도 심상히 가볍게 여깁니다.
죄의 심각한 결과는 성경 곳곳에서 나타나지만, 아담과 하와가 범한 선악과 과실을 먹은 것은 단순히 먹어보고 싶은 마음과 선악을 알고 싶은 지적인 교만의 어쩌면 사소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온 인류 전체의 멸망 아니었습니까?
다윗이 밧세바로 인하여 범한 죄도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였습니까? 자녀들끼리의 죽음과 다른 누구도 아닌 자녀의 반란과 백성의 이만명 가령이 죽는 참상을 겪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죄는 짓는 그 순간에는 잠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달콤하게 유혹하지만 그 죄의 잔을 마시고 나면 쓰디쓴 독약이 되어 치명적인 고통과 시련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결코 심상히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지극히 죄를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곧 영생이라 말씀하시며 불순종과 죄의 결과의 심각성에 대하여 말씀하셨지요.
요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깊이 새롭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고 심상히 여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를 연단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섭리적 고난도 있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대부분의 환란과 어려움은 원죄이던지 조상의 죄이던지 자범죄이던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가슴에 깊이 각인해야 합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 다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죄의 처리’입니다. 어떻게 죄의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죄의 경중의 떠나 그냥 주일 예배 등이나 혹은 기도 시간 등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해 주십시오” 말의 고백만 드리면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죄의 처리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그 사전적 용어의 의미가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입술의 헛된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닌, 참되고 깊은 중심의 돌이킴을 통하여 죄와 악과 불의를 버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심상히 여기기에 회개도 심상히 여깁니다. 무슨 큰 죄를 지었던지 그냥 하나님 앞에서 잠시 잘못하였고 고백하면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의 결과의 두려움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구약시대의 제사를 드릴 때 제사의 예식은 제사장이 행하나 그 제물을 죽일 때는 죄를 범한 사람이 잡게 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죄 없는 송아지나 양을 칼로 죽이면서 마음에 깊이 반성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붉은 피를 쏟으며 고통 속에 죽어가는 제물의 희생에서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을 때리는 것이 바로 우리임을 각인하며, 중심으로 참되게 회개하여야 합니다. 가슴 절절한 통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며 마음 아파하며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하신 아들, 곧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심령이 부셔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그러한 상한 심령입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진정한 회개의 의미를 모르고 무슨 죄를 지었던지 그냥 하나님 앞에서 적당히 고백하고 적당히 눈물만 흘리면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죄가 용서되고 처리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영의 세계를 하나님 앞에서 배워가다 보니, 우리가 지식으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섭섭함 등의 다양한 감정을 느끼듯이, 하나님도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경미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 섭섭하고 진노하심도 작습니다. 하지만 중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크게 마음으로 상심하시고 진노하심도 큽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짓고 또 짓고 지으면 하나님의 마음에도 우리의 표현으로 말씀드리면 앙금이 생깁니다.
죄가 중하면 중할수록,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하나님의 마음에는 상심과 진노하심과 앙금이 쌓여가고, 우리와 하나님의 화목의 관계는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깨어지고 멀어질수록 다시금 용서를 통한 화목의 길도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릅니다. 하루하루의 시간과 매 순간의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어가기도 하고 깨며 멀어져가기도 합니다.
삶에서 기어이 죄를 짓고 쌓아 도를 넘으면 하나님이 격노하셔서 전능자의 두려운 손이 우리의 대적이 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죄로 인한 참담한 결과와 중심의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말씀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쌓아가고 화목의 관계를 잃어가며, 삶에 재난과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당신을 닮은 거룩과 존엄, 빛과 선과 사랑의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면서 화를 자초합니다. 원수 마귀에게 합법적으로 역사할 권리를 주어서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신앙상담을 하다보면 다양한 문제들로 상담을 해 오십니다. 하지만 그러한 저를 비롯한 우리의 다양한 문제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의와 진리의 삶, 곧 거룩함과 의의 참된 성령의 생수가 가슴 속을 흐르는 참된 삶을 살지 못하였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하나하나가 진리이며 참이고 우리가 순종하여야 합니다. 무릇 은혜롭지 못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입술과 말을 은혜롭게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일반생활 속에서 원망과 불평과 험담과 정죄와 때로는 욕설까지 별다른 생각없이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죄와 악과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그러한 사소한 것들이라도 말씀에 어긋나게 살아가면 죄요, 죄의 결과를 맛보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무릇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애쓰며 온전함과 거룩함을 이루며 살아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도, 교회의 시간을 벗어나면 온갖 마음과 행동으로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시간 시간이 죄의 시간이요, 하나님과의 화목의 멀어짐이요, 원수 사단 마귀에게 합법적으로 재난과 어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것임을 모릅니다.
때로는 사망에 이를 수 있는 큰 죄를 범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기도만 간단히 드리면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죄의 처리가 그렇게 입술의 말로만 간단히 처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처리가 진정으로 되려면 중심으로 아파하고 철저히 회개하고 그 삶에서 떠나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리고 우리가 다소 중한 죄에서 회개할 때는 마음 뿐만 아니라 행동도 근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회개할 때는 상복과도 같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으며 머리에 티끌을 쓰기도 하였지요. 그리고 시시로 금식하였지요.
구약의 율법의 조항은 폐하여졌으나, 그 율법을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과 속성은 여전히 살아있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제물이 짐승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으나 회개하는 중심의 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잠시 울먹이며 고백하다가 곧 나가서는 온갖 오락과 유흥을 즐긴다면 이는 참다운 중심의 회개가 아닙니다. 참다운 중심의 회개라면 한동안 근신을 자연스럽게 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실수로 어떤 사람에게 심각한 잘못을 하였다면, 미안한의 말을 전하고 중심으로 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받은 손해나 상처를 생각한다면 한 동안 행동이 진중해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에서는 거의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럭저럭 교회에서 회개한다고 잠시 눈물도 흘리곤 하지만, 그 시간만 지나면 온갖 오락과 유흥과 맛난 음식과 즐거운 것을 찾아 헤매이지요.
구약의 대표적인 회개의 날인 속죄일을 규정을 보면 “그 날에 자신을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않는 자는 그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라”고 말씀함니다. 다른 번역본을 보면 금식을 하지 아니하면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레23: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레23: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레23: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이처럼 회개는 대충 그렇게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요식적인 말과 행동으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마음과 행동이 따르는 진심과 중심의 참다운 회개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중심으로 회개하면 회개의 내적인 증거가 따라옵니다. 그것은 곧 마음의 “생명과 평안”입니다.
우리가 어린시절 부모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였을 때, 부모님이 잘못을 용서해주시면 그 순간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오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게 되면 그 증거가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증거가 임할 때까지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볍고 작은 죄는 쉽게 용서해 주실 터 다소 중하다고 생각되는 죄에 대해서는 이러한 내적 증거를 얻을 때까지 중심으로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아니고 행위로도 보여야 하며, 잘못된 행실에서 돌이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여도, 우리의 죄의 습성을 고치시기 위하여 시련과 연단의 시간을 대부분 걷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도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습니까? 그는 눈물로 침상과 요를 적실만큼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뉘우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극한 환란과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는 진정한 영과 의의 사람으로 바꾸시기 위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 안에서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하여 영적으로 용서를 받는다고 하여도, 삶에 시험과 환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세우시고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한 사랑임을 알고 하나님이 걷게 하시는 일곱 완전수의 시간을 일곱 완전수의 인내와 감사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과 또 다른 타락과 죄를 짓게 되면 더욱 큰 어려움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시험과 환란이 닥쳐오면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나 죄에서 떠나 돌이켜 말씀대로 살아가며,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면 기어이 축복의 시간은 다가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는 반드시 고백되어야 처리가 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죄는 자백되고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물론 우리의 기억력이 완전하지 못하여 다 일일이 고백하기는 어렵겠지만, 가능하면 사소한 것들까지라도 살펴 자백하고 고백함이 죄의 용서와 자신을 돌아봄에 유익합니다.
그리고 글과 말씀의 서두에서 다루었듯이 자신이 지은 죄의 값을 자신이 다 치루지 못하면 자녀의 다음 세대로 그 죄의 삯이 전가됩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사랑스럽고 죄 없는 우리의 자녀들이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할 수만 있다면 죄에서 떠난 삶을 살아야 하며, 또 우리의 연약함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경우는 철저한 중심의 회개로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그러한 죄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천대의 축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죄에서 중심으로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서 의와 진리의 순종의 삶을 살아가기를 인내하며 애쓰면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에 화목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 친밀함이 더해져 갑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벗도 되었지요. 그렇게 하나님과의 화목과 친밀함이 이루어져갈 때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의 광채를 함께 더욱 누리게 하셔서 영권과 기도 응답의 역사도 커져 가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한 저이나 하나님의 혹독한 다루심 안에서 이러한 영적 원리들을 알고 배워 실천하며 조금씩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가며 이전과는 다른 하나님의 사랑과 기도의 응답의 역사를 지금은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더욱 그렇게 나아가기를 소망하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를 향해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며,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 잠시의 유혹은 달콤하나 그 열매는 참담한 사망과 저주라는 것을요.
자녀에게도 중심으로 가르치십시요. 그 가지가 굵어져 삶의 방향 수정이 어렵기 전에, 늦게 전에 바로 지금부터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을 근실히 가르치십시요. 지금부터 하나님 앞에서 축복의 쌓아가는 삶을 살도록 근실히 가르치십시요.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빛을 보게 하는 눈과 참된 회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의와 거룩한 삶을 통하여 복되고 복된 생이 되게 해 주시길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려 봅니다. 샬롬 !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