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끝까지 읽어보세요 / 얼마 전에 제 방에 새 친구가 생겼습니다. 이름은 ‘녹보수’이며, 별명은 ‘행복나무’입니다. 화분에 담긴 나무라 몸은 작지만 모양은 큰 느티나무처럼 의젓합니다.
이 화분은 아무래도 방 안에 자연식물인 꽃이 하나 정도 있으면 건강에도 좋을 것 같고, 그리고 마음의 벗도 될 것 같아서 하나 구매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며칠이 지났을까요?
녹보수 나무 아래 화분을 예쁘게 꾸미기 위하여 작은 식물들이 그 아래에 몇 자라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리고 여린 상태라 작은 상처에도 쉬 죽을 것 같은 작은 식물인데, 무슨 이유인지 입사귀가 마르고 말리고 땅에 거의 넘어져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힘없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제 맘에도 거의 죽어서 그냥 보기도 다소 그러하고 가위로 잘라내어 화분을 깨끗한 모습으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한편 들더군요. 하지만 왠지 막내처럼 여린 그 식물이 가여워 보이고 꼭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화분에 물도 주고 또 안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얘 좀 살려주세요. 아가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살아나. 응?”
기도를 하고 다음 날 보니 그래도 “목사님, 저 그냥 편히 눈 감게 해 주시면 안될까요?”라고 하고며 그대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또 기도했습니다. 조금 유머러스하게 적어볼까요?
“하나님 아버지, 얘 좀 살려주세요. 아직 철이 없어서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나 봐요. 살려도 주시고 철도 들게 해 주세요”
기도를 하고 다음 날 보니 그래도 힘없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이 식물이 며칠 사이에 죽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생각을 떠올려보니 제 건강관리를 위해서 가끔씩 방에 뿌려주는 피톤치드 생각이 나더군요. 자연적인 것이고 우리 몸에 좋은 것이지만 혹시 그 액이 아직 여린 몸과 잎사귀에 달라붙어서 광합성 작용에 어려움을 겪나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서 물을 가져와 조심스레 잎사귀를 하나하나 펴서 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봄 햇살이 좋을 것도 같아서 한 이틀 창가에서 햇살도 쬐여주었습니다. 그리고서 기도도 계속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샌가 다시 살아나 지금은 식물들 중 가장 생기롭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눈으로 얼핏 보아도 제일 싱싱하고 생기롭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가끔은 제일 일등으로 굳세게 자라나라고 축복하며 기도도 해 줍니다.
제가 이 경험을 통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진리이니 가슴으로 정독해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작은 식물은 가져온 지 며칠 되지 않았고 크게 무슨 상처를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작은 어떤 요인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요인으로요.
그런데 그 작은 요인으로 죽어가는 식물 하나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며칠의 기도와 며칠의 애틋한 보살핌이 있어야 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사역을 하고 집회를 하고 상담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가령 어떤 사람이 뿌리 깊은 오랜 문제로 그 영혼과 마음과 때로는 몸까지 병들고 상처를 받았는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표적의 기사와 기록처럼 그냥 어떤 능력 사역자의 치유기도 한 번이나 아니면 잠시 부르짖고 회개하고 기도하면 쉽게 해결이 될 줄로 생각하시더군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리고 대부분 결코 아닙니다.
이런 혁신적인 변화는 처음 성령세례를 받을 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믿지 않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물과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세례를 받아 중생의 강력한 체험을 한 경우에는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때는 성령께서 우리 영의 성장을 위하여 주도적으로 강력하게 역사하는 시간이니까요.
이런 거듭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첫 성령세례의 강렬한 역사 속에서는 한 순간에 도적이 변하여 구제하는 자가 되고, 세리와 창기가 변하여 거룩하고 정결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2~3여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런 사람들도 다시금 옛 생활의 뿌리가 남아 있다면 그 습성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생에서 한 번 있는 시간의 경우가 아닌 다른 경우에서는 이런 혁신적인 변화는 일반적으로 거의 없습니다. 나머지의 경우에는 제가 작고 사소한 어떤 요인으로 죽어가는 식물을 살려내는 노력처럼 점진적인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주 작은 요인으로 죽어가는 식물을 살려내려 며칠의 수고가 필요했듯이, 우리 사람의 경우는 보통 그런 작고 단순한 요인이 아닌 긴긴 세월을 아우르는 때로는 조상의 죄얼까지 유전되어서 그러한 경우도 많은바, 결코 그리고 정말로 쉽지 않은 죄의 처리와 악습의 처리와 경건에의 부단한 애씀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조금 적극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령 알코올 중독에 걸려서 오랜 세월 동안 술을 많이 먹으며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그렇게 술을 먹게 하는 악한 영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나 기도원이나 가서 능력 사역자에게 그런 술을 먹게 하는 악한 영만 제압한다고 삶의 모습이 곧 쉽게 바뀌겠습니까?
설령 악한 영이 떠나 일시적으로 술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살아오면서 형성되어지고 만들어진 습관과 인격과 생각과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의 외적, 내적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에 조차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의 처리는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한 동안 술을 먹지 않고 견디다가 곧 다시 쓰러지고 말지요. 다시금 술을 먹게 되고 또다시 그러한 영적 세계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악한 영은 또 다시 들어오지요. 성경은 더 많은 수의 악한 영이 들어올 수 있다고 전하지요.
이처럼 알코올 중독 뿐만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유전이나 삶의 상처나 시련이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형성된 마음의 질병, 영의 질병, 육체의 질병, 환경의 질병 등 모든 것들은 어떤 기도 한번이나 집회 한번 참석이나 몇 번의 간절한 회개와 건져주심의 기도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그 상처와 어둠의 세월이 길면 길수록 회복의 세월도 길게 걸립니다. 극단적으로 어떤 분들은 10년의 상처이면 10년의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하지요.
그렇게 극단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노력 여부에 따라 다소 시간이 단축될 수는 있겠지만, 제가 사역하면서 살펴본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면 참으로 긴긴 인내와 자기 절제와 자기 부인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회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살펴보면 대부분 다 집니다. 앞에서 예로서 살펴본 알코올 중독자의 회복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일시적으로 악한 영을 쫓아내고 자신도 이제는 술을 끊어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은 알코올이라는 물질에 젖어서 금단현상처럼 술을 목마르게 부르고, 또 마음과 기억 속에는 술에 취했을 때의 기분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그 술을 마시게 되면 그 폐단도 알기에 다소 참아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수고롭고 아픈 일이 많습니까. 잘 참고 있다가 그냥 무너지기도 하지만 혹여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나면 대부분 인내하지 못하고 다시 술을 먹어 버립니다. 이처럼 악순환의 연속이 일어나고 그 뿌리가 깊은 만큼 치유와 회복이 쉽지 않지요.
제가 사역하면서 살펴본바 마음과 영혼의 죄와 상처의 얼룩의 오래고 깊으면 대부분 승리하시지를 못하십니다. 그만큼 죄의 처리와 악습의 처리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빛의 삶, 축복의 삶,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아닌 인자하심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끝끝내 인내하여야 합니다. 이기면 살고 지면 영적으로 죽는 것이며, 이기면 빛과 축복의 문이 열리지만, 지면 어둠과 고통의 삶만이 남는 것입니다.
가령 나무 키우는 것을 비유로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나무가 어릴 적에 그 방향성을 잘못 설정해 주어서 왼쪽으로 가지가 10여년 자랐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 가지를 오른편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조금씩 가지에 물리적인 힘을 가하여 그 방향이 오른쪽으로 조금씩 수정되어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겠지요. 아주 어린 나무라면 금방 오른쪽으로 돌아오겠지만, 시간이 많이 된 나무일수록 어렵겠지요. 그리고 아주 크게 자란 나무라면 거의 불가능 할 수도 있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죄와 상처로 말미암아 형성되고 뿌리 내려진 마음의 병, 영의 병, 육체의 병, 환경의 병 등도 그 죄와 상처의 시간이 길수록, 그 깊이가 깊을수록 정말로 긴긴 인내와 성실의 싸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원리에서 귀신축사, 질병의 치유, 재정의 회복, 각종 중독에서의 자유, 부부의 회복, 자녀의 회복, 가정의 회복 등 모든 것들이 그동안 뿌리 내려온 어둠들과의 싸움과 또한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경건의 노력이, 인내와 성실로 참으로 쉽지 않은 긴 시간동안 지속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평생을 힘쓰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지면 사망이요, 이기면 승리와 축복인 영의 축복과 저주의 세계, 병증으로 비유하면 가령 3~4기와 같은 중증이라도 일 년 이년 그렇게 애쓰다보면 2~3기로 다소 나아지고, 또 참고 인내하다보면 1~2기처럼 회복이 되고, 끝내 인내한다면 마침내는 결국 회복을 하고 건강과 빛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 되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여호와의 신, 곧 성령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슥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지만 우리의 열정적인 참여와 의지와 노력이 없으면 아니 됩니다. 결코 아니 됩니다. 성령님은 도우시는 자이시지 우리의 의지를 거슬러 역사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아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지 그것조차도 잘 모릅니다. 그냥 한두 번 기도를 받거나 혹은 매달려 기도하면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부모의 불화로 수십 년 상처를 받은 아이가 어디 가서 한 순간 기도 받고 기도하면 그 마음과 성정과 영과 삶이 온전히 회복 될 것으로 크게 오해들을 하십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상식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되겠습니까?
제 방의 작은 식물 하나가 지극히 작은 사소한 문제로 죽어가는 데도 살려내는데 이런저런 며칠의 노력과 사랑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렇게 쉽게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영적 큰 깨달음을 새롭게 주기 위하여 작은 경험을 하게 하시지 않으셨나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자녀이나 매 순간의 삶에서, 더 늦지 않도록 바로 지금부터 오늘부터 죄와 상처의 어둠의 세계가 아닌 빛 속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죄와 상처의 어둠을 걸어가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치유와 회복을 어렵습니다.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우리 사람들이 참으로 인내가 부족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어둠의 삶에서 돌이키려고 우리는 살아가다가 가끔 애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사역을 하면서 살펴보니 우리의 인내와 노력이라는 것이 짧으면 며칠이요, 길면 몇 주요, 그래도 길면 몇 개월에서 대부분 멈추어 버립니다.
그리고 대부분 다시금 이전의 어둠의 삶,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삶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명과 평안을 잃고 사망의 어둠 속에서 곤고해 하며 힘겨워합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생활 속에서 점점 마음과 영과 육과 환경의 모든 영역들에 더 깊은 흑암이 드리우게 합니다. 그리고 결코 쉽지 않은 치유로부터도 점점 요원히 멀어져만 갑니다.
그러므로 둘째 우리는 정말로 전쟁을 하듯 참고 인내하며 경건한 싸움으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영적 세계의 실상과 본질 중의 하나는 우리는 영적 전쟁의 와중, 영적 전장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전장의 와중에 홀로 고독하게 서 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실상 그 누구도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듭니다. 전장이란 그런 곳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이길 수 없으며 승리를 누리지 못하는 곳이 전쟁터인 곳입니다.
또 기본적으로 자신의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함께 싸우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영적 파트너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본인의 의지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갈 여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우리 본인이 의지를 발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상처의 세월이 깊고 길다면 그만큼 앙다문 입술로 끝끝내 인내하며 하나님 안에서 경건한 싸움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우리의 삶의 여정 또한 중단 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병든 사람이 건강이 좋아졌다고 마음대로 생활하면 병이 다시 드는 것은 시간문제이겠지요. 이처럼 우리의 영적 경건한 삶도 그렇게 삶의 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단하고 멈춰서는 순간 다시금 어둠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힘써 싸워야 할 문제 앞에서, 짧게는 며칠이나 몇 주, 길게는 몇 달 가량 애써보시다가 다 주저앉고 다시금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십니다. 그런 인내와 성실로는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를 누리지 못하십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흑암 아래서 신음하게 될 뿐입니다. 나아가 더욱 어둠으로 떨어지면 구원도 위태로워 질 뿐입니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으며, 서면 살고 앉으면 죽습니다”
하지만 수없이 이런 말씀을 증거해도 잠시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불꽃처럼 돌아서면 무기력하여져서 여전히 육체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반짝하였다가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무기력해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생은 본질적으로 그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으며,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힘들지 않은 사람 아무도 없으며, 이기는 사람은 그만큼 대가를 지불하였고 노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으며, 서면 살고 앉으면 죽습니다”
하나님 말씀 그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려 애쓰며 부단히 그리고 성실히 노력하는 자에게는 언젠가는 어둠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빛과 축복의 세계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제가 집에다가 가져와 기르는 화분의 나무 이름은 ‘녹보수’요, 별칭은 ‘행복나무’라고 합니다. 그 행복나무 아래 이름도 모르는 어떤 사소한 요인으로 잠시 죽어가는 어린 식물하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고 가꾸고 보살피니 다시 생기롭게 살아나 활짝 웃으며 저를 바라봅니다. 행복이 찾아온 것이지요.
우리의 삶이나 영의 생명도 이와 같습니다. 그 문제의 요인을 철저히 분석하여 제거하고 또 시간이 걸린 만큼 더 긴긴 인내의 영육간의 종합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혼적으로, 육적으로, 환경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애쓰며 인내하다보면 다시금 행복나무는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보기 힘든 승리하시는 분들, 이 말씀을 읽고 과연 몇 분이나 어둠의 삶에서 빛으로, 눈물짓던 삶에서 웃음으로, 슬프던 삶에서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지 하는 마음에 그냥 제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전능하신 사랑의 아버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도와주세요. 아멘!
계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