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숲길이 영의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 길로 주님이 걸어오시고 계십니다.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숲길로 주님이 걸어오시는데 아이들이 주님께로 달려갑니다. 주님은 아이들을 안고 기뻐하시며 웃으십니다.
늘 삼차원 입체 영상 홀로그래피처럼 눈으로 보는 듯 가슴으로 보는 듯 허공에 어려 보이는 영의 세계, 그 풍경이 펼쳐진 가운데 늦은 밤 몸을 씻고 있는 더운 물에서 수증기가 올라와 세면실은 수증기로 뿌옇습니다. 영으로 펼쳐지는 주님이 계신 아름다운 풍경과 수증기가 함께 어울리니, 주님이 걸어오시는 숲길은 마치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의 숲길처럼 보이고, 정말 환상 같은 아름다운 세계로 변해 보입니다.
저도 마치 주님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녹음이 짙은 아름다운 숲길에 함께 있는 듯 황홀한 착각이 듭니다. 정말 환상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인지 환상의 세계에 사는 것인지 가끔은 정말 황홀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가 늘 형상으로 어울려 보이니, 마치 두 세계 속에 함께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제 어디를 가도 늘 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환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씻고 물을 먹고 있으니 그 곁에도 계시고, 씻고 곤하여 자리에 누우니 정면에 서 계신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한 모습이 아니라 파노라마처럼 주님의 모습과 함께 환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주님께서 사람들과 다정스럽게 대화하시는 모습, 아이들과 기뻐하시는 모습, 말씀을 가르치시는 모습, 그리고 강에서 세례를 주시는 모습 등.
너무나도 유명하신 한국의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니, 성령의 세례를 받고 사역을 하는 도중에 자꾸만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일어나는 모습들이 환상처럼 너무도 자주 보여서, 처음에는 귀신들의 장난인 줄 알고 쫓아도 보고 하다가 주님께 물어보니, “그런 환상이 보일 때는 예수 이름으로 나았음을 선포하라. 네가 선포하여야 병이 낫는다”라는 글이 생각이 낫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제게는 왜 이런 것들이 너무도 자주 보입니까? 그 연유가 무엇입니까?” 영으로 종용히 물으니, 영 안에서 가슴으로 알려주시는 의미, “성경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행한다고 하였지 않았느냐? 한편 내가 네게 어떻게 사람들을 섬기며 사역하여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시 길래 가만히 누워서 주님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주님께서 가슴 가득 하늘빛 사랑을 전해 주시며 “사랑하라, 사랑하라” 이르십니다. 주님이 전해 주시는 사랑과 자비로움, 하지만 너무도 그 사랑에 비하여 보잘 것 없는 삶의 부족한 모습에, 잔잔히 눈가에 눈물이 어립니다.
한 동안 그렇게 그냥 말없이 주님과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마음을 잠시 시가로 읊어 보았습니다. 제목은 “사랑하라”고 전하셨으니 “새 계명”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참고로 제 문인 필명은 단심 정소월입니다)
새 계명
丹心 정소월)
만물은 고요히 잠드나
언제나 주님과 함께인
지밀한 시간
주님, 인자하신 모습으로
바라보시며
“사랑하라, 사랑하라”
말씀하시네
가슴 속 그윽
전해오는
주님의 하늘빛 사랑
아픔인 듯 행복인 듯
조용히 눈물이 흐르네
아무런 말없이
가만 마주 뵈오며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지밀한 사랑을 나누네
나, 오늘과 내일은
사랑하는 주 힘써 섬기다
제 삼일엔..
주 계신 그 나라 웃으며
하얗게 달려가리
춤추며 날아가리!
“주님께 내일은 무슨 말씀을 전할까요?” 잠시 물어보니 “깨어 경성함에 관한 말씀을 전하면 좋겠구나”
마침 종말과 재림에 관하여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며 어떠한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글을 언젠가 한번 쓰려고 생각하던 터, 주님께 “그 글을 쓰도 될까요?”라고 물어보니, 말없이 허락해 주시는 모습. 내일은 그 말씀을 써야지 하며 생각하다 잠시 일어나 기도와 찬양을 시작하니, 주님 곁에서 하시는 말, “성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감사를 드려라”
죄 많은 인생을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 눈물과 진정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리니 부어주시는 하늘의 기쁨. 잠시 기도를 멈추고 기도를 더 할까, 아님 말씀을 기록할까 생각해보니, 글은 마음의 표현, “지금의 마음과 영적 느낌을 제대로 담아내려면 지금이 좋겠네”라며 책상머리에 앉아 말씀을 기록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종말과 재림에 관한 아름다운 선에 관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마지막 종말과 재림에 관하여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만큼 공인되고 공증된 예언이 없으니 분명하고 확실한 예언이지요.
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확실하게 공인되고 공증된 성경책의 분명하고도 확실한 예언, 그 예언이 이르기를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우리가 알다시피 대략 2000여전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단어의 “속히”라는 의미는 우리의 시간으로는 결코 2000여년이 넘으면 안 됩니다. 2000년이란 세월은 “속히”라고 표현하기에는 우리의 시간으로는 너무도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그렇게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시고는 2000여년이 넘도록 아직 재림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속히”라는 의미는, 제가 지금 주석책 등을 통하여 원어 적으로 자세히 살펴볼 자료가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시간적인 개념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속히 오리니”라는 말씀만 한 것이 아니고, 먼저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 전파 되어야 하리라고도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 전에 일어나야 할 일들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들과 함께 살펴볼 때 “속히”라는 말의 의미는, 곧 단시간에 천하 만민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사도바울을 비롯한 처음 제자들도 그렇게 잘못 생각하였듯 것처럼 우리의 시간적 개념으로 짧은 단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속히”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리 긴 시간을 말하는 의미가 아닌데, 주님은 왜 이런 표현을 쓰셨으며, 지금도 기도하면 제게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주님은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환상과 때로는 예언과 계시를 통하여 대부분 “내가 곧 갈 것이라”라고 일반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의 의미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는 우리의 깨어 경성함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도 그 날과 그 시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십니다.
이를 비견해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면, 가령 아이들이 게임을 하거나 하면 정말 혼쭐을 내어주는 엄한 아버지를 둔 가정을 상정해 봅니다. 그 아버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일정미상의 출장을 떠났습니다. 오늘 올지 내일 올지 정말 모릅니다. 어머니도 아느냐 하면 정말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버지가 긴 출장을 가셨으니 “아마도 아주 오래 걸릴거야”라고 생각하며 마음대로 놀고먹고 게임을 하면서 난리법석을 피웁니다. 그러면 어머님이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불같은 성정에 이러다가 정말 아버지가 오시면 정말 아이들이 매를 맞고 혼이 나고 집안이 한바탕 법석이 날 것을 압니다. 그러니 자식들을 생각하면 큰 염려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이들에게 말을 할까요? “아버지가 곧 오실 것인데 정신차리고 아버지 맞을 준비해”라고 말을 하겠지요.
어쩌면 주님도 이러한 의도에서 우리에게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 가지를 살펴볼 때 옳지 않을까요? 곧 우리의 깨어 경성함을 촉구하는 말씀이지요. 성경은 예수님도 그 날과 시를 모른다고 전하고 있지 않는지요?
성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고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 때는 정하시지만 정작 보내시는 자는 예수님 당신이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또한 성경은 무엇이라고 전합니까?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전하고 있지요.
벧후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본문은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거나 지연된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지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시제가 다르니 화법을 다르게 해석을 하여야 하지요.
가령 주님이 “내일 오겠다”라고 말씀하시면,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으니 천년 뒤일 수도 있고, “천년 뒤에 오겠다”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또한 하루 뒤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마음으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므로,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시계와 시간으로는 그 때를 갸늠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이 실제로 "내가 속히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하셨지만, 우리의 시간적 관념과는 다르게 세상이 흘러감은,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른 가운데, 우리를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신 지 2000여년이 지난 지금, 만약 지금 하나님께서 또한 환상이나 예언이나 계시로, “내가 속히 올 것이라” 말씀하면, 그것은 우리의 시간표로 이전처럼 여전히 먼 미래일까요? 아니면 정말 내일일 수도 있을까요?
그것에 대한 답은 먼 미래 일수도 있고, 정말 속히 빠른 시간일 수도 있겠지요. 정답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도 진정한 그 시와 때는 아무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와 같은 상황, 초대교회도 그러했고, 짧지 않은 기독교의 역사도 늘 이와 같은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공증된 예언처럼 시대 시대마다 늘 “속히 오리라”는 예언과 계시는 있어 왔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도 언제나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곧잘 설교들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한계시록의 공증된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 “속히 주님이 올 것이라”는 그 예언을 우리의 시간표대로 해석하여 시한부 적이거나 긴박한 종말론은 초대교회에도 있었고, 그리고 시대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그러한 환상과 예언과 계시를 우리의 시간적 관념으로 해석함으로써 혼란과 소동, 그리고 사회적 물의와 삶의 피폐를 맞본 사람들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나 그리고 기독교의 결코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나 그리고 지금에서나,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시간적 관념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속히”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며 시간마저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월적 시간으로 보면 “속히”라는 표현은 우리의 시간으로 보면 당장 오늘 일 수도, 아니면 몇 백, 아니 수천 년의 시간의 뒤 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 때와 시간은 아무도 모르고, 내일 일수도 있고, 아니면 수천 년의 뒤의 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경륜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져 가니 하루하루 그 날이 가까워짐은 분명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경륜의 마지막은 여전히 우리가 풀 수 없는, 주님마저도 모르시는 숨겨진 성부 하나님만의 비밀, 예수님을 비롯하여 그 외의 천상 천사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풀 수도 알 수도 없는 비밀이요, 신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경성하며 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할까요?
그것은, 정답은 “늘 깨어 경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뿐입니다. 한 달 뒤, 몇 년도에 이런 우리 시간식의 산술은 의미가 없는 것이며, 역사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된 시한부 그리고 긴박한 종말론에 빠지다보면 그로 인하여 가지가지 교계적, 사회적 혼란은 되풀이 되고,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삶과 생을 망치게 되는 숱한 사람들이 생기는 역사의 악순환만 되풀이 될 뿐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세의 징조와 주님의 재림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영적으로 살펴가고 분별해 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계시나 예언을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받아들여 시한부 종말론이나 긴박한 종말론으로 빠지는 너무도 크고 반복되는 오류입니다.
어디가 깨어 경성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건전하고도 아름다운 신앙의 선일까요? 그 선은 바로 주님께서 내일 아니 오늘에도 오실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깨어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주님은 도적같이 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눅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17: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눅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눅17: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눅17: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시한부 종말론이나 긴박한 종말론에 빠져서, 현실의 삶은 등한시 하고 매양 말세의 징조 등에나 관심을 갖고, 그러한 예언과 현상만 수집하고, 듣고 빠져서 전쟁전야나 대재난을 앞둔 시점마냥 평정심을 잃은 심리나 공황심리로 빠져드는 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은 사모하고 기다리며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삶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고 맡겨주신 복음전파와 영혼구원, 이웃사랑, 섬김 등의 맡기신 바 소명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다하여 충성하며 사는 삶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 훗날 부부의 연을 맺게 될 청춘 남녀가 정녕 함께 할 그날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자신을 가꾸고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가 되려고 참고 인내하며 사랑과 행복의 그날을 기다리듯이, 그리스인도 주님의 재림과 종말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못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냥 오실 날만 기다리고, 말세의 징조와 종말의 예언 등에나 심취하여, 현실과 맡겨진 소명에 하루하루 충실하지 못하고 달뜬 삶을 사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할 그날만 생각하며 마음이 달떠 결혼의 날에만 집착하여 결혼의 날까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정작 신랑과 신부로 만나는 그 날엔 서로에에 부끄러운 모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라고 말씀하셨다구요? 그렇다면 더욱 현실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의 삶을 셈하시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으니, 그분이 셈할 때 부끄러움이 없도록 더욱 현실의 삶과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의 시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집팔고 직장도 다 버리고 그러한 시한부 종말론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등의 행위는 정말 신앙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의 모든 것을 망치게 될 수 있는 수없이 되풀이된 역사의 악순환인 것입니다.
주 안에서 영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경성의 삶의 선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마냥 주님이 더디 오시리라 생각하며 먹고 마시는 삶도 아니요, 그렇다고 우리의 시간적 관념으로 해석하여 시한부나 긴박한 종말론에 빠져서 현실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고 달뜬 마음으로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선은 오늘에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마음으로 깨어 경성하지만, 결코 그 시간을 우리의 시간적 관념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한편 먼먼 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깨어 경건하게 살아가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소명과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하루하루 우리의 삶에 충실하며 또한 영적인 소명에도 최선을 다하는 삶인 것입니다.
어떤 사랑하는 신랑과의 결혼을 기다리는 신부가, 언젠가는 다가올 그 행복하고 아름다운 날을 사모하고 기다리고 꿈꾸며, 인내로 하루하루 신랑을 정작 만나 부부가 될 그 날에 조금이라도 더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루하루 깨어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영적 경성의 삶이요, 선인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선을 지키며 부족하나 오늘도 주님이 맡겨주신 소명에 나름 최선을 다하려 밤을 새며 말씀을 기록하다 주님의 품 안에서 이제 잠을 청하렵니다.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밝은 영적 지각을 주사 종말과 재림에 대한 밝은 깨달음과 어떻게 살아가기를 주님이 정녕 원하시는지 밝은 지각을 언제나 주시길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려봅니다.
마라나타! 하늘구름을 타고 영광의 나팔소리와 함께 오실 사랑하는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만물이 탄식하며 구속의 날을 기다리나이다. 할레루야! 아멘!
마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마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24: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마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24: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24: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