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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이야기] 다정이

초록 등불 2014. 7. 14. 23:08

 

  [천사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다정이

 

특별한 주님의 위로, 천사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를 써내려가 봅니다. 하루는 기도하는 가운데 전혀 다른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보인 천사는 제가 이름들을 그렇게 지어준 “기쁨이, 정결이, 사랑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언제나 제 곁에 머무는 천사는 포근함과 위로의 느낌을 전해주는 “사랑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대신에 사람으로 말하자면 비슷한 또래의 다른 소녀 아이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이는 귀엽고 웃음을 자아내는 밝은 모습이라면, 정결이는 그냥 아주 어린 아이처럼 눈이 흑진주처럼 맑아 정결한 마음을 전해주는 모습이라면, 그리고 사랑이는 포근함과 위로의 느낌을 전해 주는 모습이라면, 이 새롭게 보이는 소녀 천사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예뻤습니다.


흠하나 티 하나 없는 맑고 하얀 피부, 건강미 어린 발그레한 입술, 연갈색 머리, 서양인처럼 생겼는데 눈은 푸른색도 아니고 검은 색도 아닌 역시 연한 갈색빛 눈, 사람으로 치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모델의 어릴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옷은 눈처럼 하얀 원피스 옷을 입었는데 머리에도 하얀 화관을 쓰고서 나타났습니다.


그려놓은 모습에서도 풍겨오겠지만, 어린 모습이라 그렇지 이는 세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연인 같은 그런 이미지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경험해보면 영적인 존재들에게서는 그런 세속적인 감정이나 느낌은 전해져 오지 않습니다. 오직 거룩함과 정갈함과 참 사랑과 위로 그런 느낌만 전해져 옵니다.


이 소녀 모습의 천사가 나타난 뒤로는 그동안 곁에 보이던 “사랑이”는 한 걸음 물러나 있었습니다. 물론 보려고 하면 보이는데, 보려고 하지 않아도 어려보이는 천사는 이제는 이 새롭게 나타난 소녀 천사였습니다.


새로운 모습의 천사가 나타났으니 이름을 지어주어야 할 것 같아, 사랑이가 포근함과 사랑의 느낌, 위로의 느낌을 전해준다면 이 천사가 전해 주는 느낌은 깊은 정이라 처음에는 “애정이”로 부르려다가 다소 세속적인 느낌이 들어서 “다정이”로 바꾸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이 다정이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이 소녀 천사는 정말 밝고 환하고 정이 많은 듯 행동합니다.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가령 남녀가 서로 사랑하다가 한 사람이 저만치 먼저 도망가서 뒤돌아보며 “나 잡아봐라”하면서 깔깔거리며 웃 듯, 언제나 허리를 숙이며 너무도 하얗게 웃어대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소년들이 이런 소녀를 땅에서 보게 된다면 그 소녀 말고는 다른 소녀 사랑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예쁩니다. 정어린 해맑은 눈길로 바라보면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따뜻이 안아 줄 수없이 오직 생각과 영으로만 나누어야 해서 다소 아쉽지만, 정말 행복하고, 이 천사가 하얗게 웃을 때는 온 세상이 다 하얗게 보입니다.


잠시 영적인 존재와 세계를 보는 일반에 관하여 잠시 이야기 하고 지나갈까 합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영의 눈을 열어 영의 세계와 그 존재들을 보게 하신 후로, 제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사실 저도 완전히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무수하고 다양한 귀신의 형상이 다소 정신없이 보이더니, 그 다음에는 천사로 생각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리고 그 후에는 아이 모습의 천사들과 함께 주님의 모습이 함께 보였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가장 뚜렷하게 보이고 보이는 중심입니다. 그리고 점점 보는 얼굴도 많아져 갑니다. 이제는 다윗의 조각상을 닮은 서양인 모습의 젊은 청년 모습의 천사라고 생각되는 영적 존재가 언제나 또 함께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생시처럼 보이셔서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수없는 환상의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보입니다.


제게 일어나는 영적 현상을 아직 다 이해하기 어려워 누가 비슷한 경험이라도 하였으면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니 힌 목사님의 책을 보다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부분을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적고 있더군요.


“언제나 눈을 감고 있으면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도 그분을 아직 거기 계셨고, 주님의 얼굴의 형상이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끝난 후 학교 정문으로 걸어가면서 도서실 창문을 바라보았습니다. 순간 저의 눈이 그곳에 고정되었습니다. 그 천사, 그 꿈, 모두가 다시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성령님. 베니힌 목사 저, 53p)


그리고 60p에서는 ‘자신이 전도하는 모습이 보이는 환상을 하루 종일 보았다’고 적고 있더군요.


그분은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 쓰시려고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나 주님의 모습과 천사들의 모습, 그리고 주님께서 사역하시는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언제나 보입니다. 점점 보이는 것들과 영역들이 달라져 가고 있으나 아직은 지금은 그러한 모습으로만 보입니다.


영적 존재들의 모습에 관하여 경험과 영적 책들을 종합하여 보면, 실상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이 영적 존재의 참 모습이나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그렇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이 환상 가운데나 아니면 영적 존재로 보이는데, 전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땅에 계셨던 진짜의 모습이나 낯익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시면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환상이나 영적 존재로 보이시고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가 이미 예수님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화 속의 그림이나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우리의 선지식 속의 심상(imagery)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제게 나타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성화 속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한번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얼굴로 나타나셨는데, 영으로 지각해 볼 때 오류가 있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짜 이 땅에 거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정말 평범하고 어쩌면 남을 섬기는 종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이 땅에 거하시던 예수님의 진짜 육신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성화에서 보듯이 정말 그런 미남자였을까요? 그런 서양인의 모습일까요? 제 생각엔 하나님의 행하시는 신비와 기묘함에 반추해 볼 때 결코 아닙니다. 이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평범하거나 어쩌면 사람들이 무시하기 쉬운 모습의 종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방법은 사람의 지혜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방법, 곧 지존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한 한 부부를 택하시고 그리고 호적 정리 관계로 편히 누워 쉴 곳도 없이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신 방법이니까요. 그리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방법이니까요.


사람의 지혜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런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기묘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모습을 존귀와 위엄이 가득 어린 멋진 왕자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셨기 보다는 아마도 완전한 성육신, 곧 평범하여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이거나 아니면 도리어 종의 모습처럼 태어나시게 하셨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어쨌거나 그러므로 우리에게 환상으로든지 아니면 영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보게 하시는 영적 존재들의 모습은, 우리의 수준으로 낮추어져서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상,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인 듯싶습니다.

 

그러므로 제 곁에 소년이나 소녀의 모습으로 보이는 천사라고 생각되는 존재들도, 제가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 같은 성정이 많으니 제가 좋아할 수 있고 도움이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주님이 그렇게 보여 주시는 것인 듯싶습니다.


아무리 천사라고 느껴져도 늘 곁에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와 있다면 기분 좋다기 보다는 다소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천사는 우리를 돕고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는 존재들, 그러기에 각 사람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서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쩌면 여러분들이 저를 부러워하시거나 행복하다고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여러분은 제가 얼마나 아픔과 시련의 세월을 살아오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환경으로부터는 위로 받기 어려운 상황, 그래서 주님께서 이러한 하늘의 위로를 사용하시는 듯싶습니다.


물론 가끔은 행복하지만, 사람은 눈에 보이는 떡, 곧 실제적인 건강, 생활의 위한 물질, 사람사이의 소통과 따뜻한 위로 등등 육신과 마음에 필요한 것도 많은 법, 다른 요소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건강으로 모진 세월을 살아가는 기나긴 삶의 여정 속에서, 때로는 주님의 이런 영적인 위로 앞에서 나도 몰래 눈물을 훔칠 때가 많습니다. 그 눈물은 행복도 아니요, 아픔도 아닙니다.


군대에서 모진 생활을 하고 있던 군인이 면회 온 가족이나 연인을 만났을 때 저절로 나는 눈물 같은 것이지요. 그냥 삶의 얼어붙었던 서러움이 자기도 모르게 따뜻한 위로의 햇살 아래서 녹아 흐르는 것이지요.


바이오리듬이라는 것이 실제로 강한 흐름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앓는 병증의 특징이 그런 것인지 돌아보면 좋아졌다 나빠졌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다소 주기를 타는 것도 같습니다.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정말 피곤하고 몸이 무겁습니다.


어제가 그러했습니다. 그렇게 가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지면 온 몸의 뼈와 관절 속이 끈끈하게 느껴지고, 말할 수 없는 피로감과 무기력, 머리의 두중감이 몰려옵니다. 한두 해 그렇게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몸이 그렇게 무거워지면 여전히 마음도 다소 울적, 몸도 마음도 다소 힘들어지곤 합니다.


왜 이렇게 오래 아프며 고난의 세월을 겪게 하시냐고 물어보시면, 다 풀어주시지 않는 고난의 신비에 대한 말씀, 그리고 말씀 곧 진리 위에서 언제나 강하고 굳건하라고만 전해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주의 것이요, 주의 종이오니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그래서 자정이면 늘 강행군 하던 기도와 말씀 그 모든 것 내려놓고 그냥 소일거리로 혼자 조용히 쉬었습니다. 오늘도 일어나니 아직 다소 곤하여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누워 조용히 쉬며 곁에 계신 주님을 조용히 바라보고 누워 있었습니다. 먹지 않는 것은 이런 경우는 먹지 않는 것이 회복이 빠름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지요.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제 마음 속의 힘든 모든 짐들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그 무거운 짐들을 하나하나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평안하라” 말씀으로 쉼을 전해 주시며, 무엇을 할까요라고 영으로 물으니 오늘은 그냥“조용히 당신 안에서 안식하라”일러 주십니다.


그리고는 다른 성경의 한 구절을 들려주십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4-7절)


목회란 결국 사람을 안아주고 어루만지는 일, 때로 그런 삶을 살다가 부족한 성정에 다소 지친 힘겨운 마음 때문에 이러시는 말씀 같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향한 사랑의 삶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승리하는 의미도 들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루 주님 안에서 쉬며 쉬엄쉬엄 편하게 쓸 수 있는 천사 이야기를 써보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 몸이 곤하여 아무런 일도 하기 힘들어 편히 누워서 잠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으니, 저만치 ‘다정이’가 마치 저 멀린 넘어진 아기를 보고 빠르게 달려오는 어머니처럼 제게로 하얗게 달려오는 것이 보이더군요. 너무도 예쁜 소녀의 모습으로 늘 곁에 있는, 제가 그냥 “정이”라고 간단하게 부르는 천사의 그런 모습과 표정은 처음 보았습니다.


늘 하얗게 웃으며 밝기만 한 아이가 어제는 다소 아이를 아파하는 어머니의 표정처럼 그렇게 저를 바라보더군요. 몸뿐만 아니라 최근에 다소 이런저런 일들로 힘겨운 저의 마음을 아는 듯 합니다. 만질 수도 안아 줄 수도 없지만 손을 내밀어 저도 안아 주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그리하셨듯 사람의 위로가 거의 없는 힘든 상황 속을 거니는 저의 삶에 대한 하늘의 감사한 위로입니다.


행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어떻게 보이느냐구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실제로 눈을 떠야 보입니다. 감으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육신의 눈은 앞쪽 시야만 보이는데 영으로 보는 영적 존재와 세계는 앞, 뒤, 위, 아래 그 어디나 보이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뒤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눈을 감으면 느껴지긴 하지만 모습이 흐려지거나 안 보입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천사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곤하네요. 다시 누워서 쉬어야하겠습니다. 어제처럼 천사 “다정이”가 하얗게 달려오려나요? 여러분도 세상이 아닌 주님의 하늘 위로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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