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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열린 하늘 문 안의 삶

초록 등불 2014. 11. 25. 12:10

 

   

  [영성의 글] 열린 하늘 문 안의 삶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며 하늘 능력과 평안 가운데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하고 나아가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이 우리의 육의 성정 상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기를 지라는 말씀에 언제나 신실함이 타락한 육의 본성과 성정을 지닌 우리에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씨앗이 열매를 맺어 혹 삼십 배, 육십 배, 혹 백배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비유 중의 하나로 가시덤불을 말씀하신 것처럼 ,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수고와 염려와 힘겨운 일들의 무게도 적지 않아 그 가시덤불에 우리의 영성 생활의 잎이 시들고 꺾이기도 합니다.


마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그래도 육체의 생각을 좇는 삶은 사망과 곤고요, 영의 생각을 따르는 삶은 생명과 평안임을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경험하는 실상인 바, 우리는 언제나 일어서고 또 일어서야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우리의 영적으로 다시 일어남과 관련된 본성적인 것보다 다소 경건생활의 실천적인 것들을 기록해 봅니다.


영성 생활의 실제적인 뿌리는 무엇보다도 기도와 말씀과 찬양입니다. 그 외에 많은 것들로 결국은 이 뿌리와 더불어 가지를 낸 것들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이유들로 경건생활을 늘 성실하고 신실하게 행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삶의 수고로움이나 어려움 앞에서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붙잡을 힘을 잃곤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이던지 심적이던지 어떤 한계를 지닌 존재인지라 우리 스스로의 자신 안에서는 어떤 한계를 만나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였던 엘리야도 그랬던 바 로뎀 나무 아래 주저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겨워도 늘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늘의 능력을 덧입지 않으면 안됩니다.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가 경험하여 보니 이러한 경우 우리의 영이 새 힘을 얻도록 하늘의 문을 여는 데는 두어 가지가 효과적이며 참 중요합니다.


첫째는 찬양입니다. 삶의 무게로 마음이 무거울 땐 마음도 굳고 눌리어서 기도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먼저 찬양을 드립니다.


아프면 아픔을 아뢰는 찬양을 드리고 괴로우면 괴로움을 안고 찬양을 드립니다. 도우심이 간절히 필요하면 소리 없는 입술의 한나의 마음이 되어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그렇게 찬양을 드리면 처음에는 허공과 마음에 의미 없이 울려 퍼지는 소리 같지만 인내하고 찬양을 부르고 부르며 하늘을 찾다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답답하고 어둡던 심령에 하늘의 문이 열려가며 하늘의 신령한 빛이 조금씩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환하게 열려갑니다.


그리고 찬양의 시간 속에서 어느새 삶의 힘겨움과 시름의 물 위로 하늘 능력으로 딛고 거닐며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 도리어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자신을 보게 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경건 생활이 쉽지 않고 하늘 문을 여는 것이 쉽지 않을 땐 찬양을 먼저 드려보십시오. 찬송 가운데 거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찬송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시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두 번째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는 ‘방언 기도’입니다. 우리는 방언의 은사가 흔하다보니 그 중요성을 잘 모르는데 은사 중 그 어떤 은사보다 요긴하고 중요한 은사입니다. 이는 자신의 영을 함양하고 하나님과의 교통과 모든 은사와 능력의 근간이 되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말보다 ‘방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왠지 모를 신령스러운 기운과 영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방언이라는 말만 들어도 왠지 영의 가슴이 설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방언 기도는 우리의 혼의 기도가 아니라 영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적 곧 혼적으로 힘겨워도 조금만 의지를 발휘하면 할 수 있습니다. 혼적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주체이므로 힘겨우면 쉽지 않으나 방언 기도는 영이 그 주체이라 우리의 혼이 기도하려는 의지만 조금만 내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찬양처럼 우리의 마음이 힘겨우면 처음에는 다소 무의미함의 소리로만 들려지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는 어떠한 감흥이나 느낌이 없을지라도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고 또 하다보면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성령의 임재가 있습니다.


찬송처럼 아프면 아픔을 안고 힘겨우면 힘겨움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방언으로 편안하게 그냥 기도해 보십시오. 그렇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다보면 곧 성령의 임재가 있고 우리의 기도를 돕는 영, 곧 천사들이 역사하며 세상과 나를 초월하여 기도에 몰입해 가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늘의 문이 열려가고 마음에도 빛이 임하고 밝아져 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별스런 의미 없이 시작하였던 방언의 기도가 어느덧 시간 속에서 영광의 기도, 불의 기도를 드리는 자신을 보게 되곤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실제로 이러한 하늘 문의 열림이나 하늘 빛의 임함을 실제로 볼 수도 있는데, 영의 세계는 마음의 세계, 보이지 않아도 우리들의 마음이 환하여져 감은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신령한 빛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하늘의 열린 문 아래와 안에서 사는 것과 닫힌 문 아래와 안에서의 사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심령의 하늘빛의 유무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의 빛이 비추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므로 우리의 심령에는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가운데 연약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짓는 죄들과 타락한 본성 가운데 자꾸만 땅으로만 향하는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삶의 수고로움과 힘겨움과 염려들로 우리 마음의 영의 하늘을 자꾸만 가리워져 가고 어두워져 갑니다.


그럴 때마다 때로 힘겨울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찬송과 성령 안에서의 방언 기도 등을 통하여 모든 죄를 말갛게 씻기시는 주의 보혈로 우리의 마음을 씻으면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 속에서 성령의 불로 죄성과 육성을 날마다 시시로 태워가다보면, 우리는 언제나 하늘의 열릴 문 아래서 마음에 하늘의 신령한 빛을 받으며 세상과 땅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주의 사랑과 평강 함께 나눕니다. 샬롬!



행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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