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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원리] 영광과 능력의 베일 (1)

초록 등불 2015. 4. 19. 18:06

 

   

  [영의 원리] 영광과 능력의 베일 (1)

 

영성집회를 시작하면서 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기도인데, 건강할 때나 아픈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편안의 때나 역경의 때나 언제나 기도를 잊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방언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충분한 분량의 기도를 하려면 반드시 방언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가르치면서 실천을 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몸살로 몸이 다소 곤한 것은 곤한 것이고 제가 정해둔 시간 새벽녘까지 주님 앞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쩌면 몸 상태에 무리다 싶을 정도로 기도하였는데도 몸살기운은 다소 회복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눈을 뜨고 일어나서 다소 곤하니 편안히 누워 기독 방송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주님께서 양무리를 치시는 환상이 열렸습니다. 지인 중 한분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면 이런 환상이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곧잘 주님께서 양떼를 거느리시고 초장과 물가에서 양을 먹이시는 환상이 열립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소 특이한 양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양 한 마리가 오른 쪽 앞다리가 무릎부근에서 잘려서 앞의 한 다리가 장애인 양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의 경우는 환상이 열리면 3차원 입체영상처럼 열리기 때문에 마치 실제 같습니다.


양 한 마리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제게 다가와 얼굴을 비벼대며, 손을 핥으며 사랑에 목마른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깊이 그 의미를 읽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터, 주님께서 마음이 상하고 병든 자들을 잘 목양하라고 보여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제 삶의 스스로의 무게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데, 주님께서 더욱 상처입고 병든 영혼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보살피라 말씀하시는 듯 하여 다소 마음에 무겁게 다가왔지만, 주님의 일은 주님이 이루실터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저는 “가라” 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며 나름 애쓰며 순종하며 나아갈 뿐입니다.


아프다고 마냥 누워만 있다면 몸의 기능은 점점 떨어져서 더욱 좋지 않아지지요. 적절한 운동과 나들이가 필요하지요. 마침 봄이라 공기도 햇살도 따스할 것 같아 마스크 하나로 가볍게 가리고 식사 후 산책을 나섰습니다. 외출하는 시간이 적으니 다소 답답하기도 하구요.


한없이 날씨는 맑고 햇살은 따스하더군요. 몸살 기운만 아니면 정말 좋으련만 그래도 오히려 실내보다도 더욱 건강에도 좋을 듯 느껴지는 바깥날씨와 기온이더군요.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가니, 근래 들어 자전거만 타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곁을 함께 달리는 어린 소녀 모습의 알록한 꽃무늬 흰옷을 입은 영적존재가 나타나 함께 달리는데, 오늘도 문득 나타나 함께 달리더군요.


문득 환상이 열리듯,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문득 나타나고 보여지는 영적 존재들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성령의 뜻에 따라 다른 듯 합니다.

어제 밤에는 다소 곤하니 정을 담뿍 느끼게 하는 다정이라고 이름 지은 아이가 곁에 있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다정이보다 어린 남자 아이의 꼬마가 주로 곁에 늘 있습니다. 똑똑하고 귀엽게 생겼습니다. 지금도 그러네요.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시는 분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의문을 풀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혹시 환청이나 환시와 같은 마음의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제가 면밀히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니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가령 장님이었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의 풍경이 보이듯이, 하나님께서 어떤 계기로 영의 눈, 곧 영안을 육신을 떠나기 전에 간헐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열어 버리시면 곁에 다가오는 영적 존재가 보이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영의 눈이 열리면 시간과 장소 등에 따라서 다양한 영적 존재들이 곁에 다가오고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과 능력의 세계를 접해보지 못하신 분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없다하여, 분명히 성경에서도 온갖 성령 안에서의 표적과 기사와 천사 등의 존재 등에 대해서도 기록되고 있는데도, 터부시 하고 이상한 눈길로 바라봅니다.


그러한 분들이 평신도 분들일 경우에는 그래도 괜찮지만, 목회자일 경우에는 문제가 큽니다. 성도는 기도의 충만한 생활을 통하여 다양한 영적 현상을 경험하는데, 정작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는 터부시하고 잘못된 것이라 하니, 성도는 영적 멘토를 찾지 못하면 혼자 고민하고 방황하게 되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면서 그 속에서 힘겨워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경험해보면 상상외로 목회자분들이 영적인 세계와 현상에 대해서 무지한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영의 세계, 곧 성령임재의 가장 기초인 방언조차도 자신이 받지 못하였다 하여, 자신의 영적 위치를 지키려는 마음 등과 아울러 터부시하는 분들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시대적으로 제한되지 않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요.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어떤 교단에서는 신학교에서 목회자로 내어보낼 때 성령세례, 곧 성령의 충만한 임재 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면 목회자 자격증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세례와 방언을 완전 동일시하는 문제와 그리고 다양한 목회 영역 상 한편
조금은 극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목회자이건 성도이건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의 목표 중 하나가 참된 사람의 양육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도덕적으로 휼륭한 사람을 양육하고 길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교나 불교나 도교나 어느 종교, 나아가 정신수양이나 도덕을 가르치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훈련받고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궁극은 죽을 영혼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생명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참 생명은 본래 가지고 있던 육적 생명이 훈련되고 교육되어져서 무슨 도덕적으로 휼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공급하시는 능력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거듭난 새 생명, 곧 속사람인 영의 새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인 것입니다.


교회는 옛사람을 좋은 도덕율로 잘 교육시켜서 좋은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와 성령 안에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영의 새 사람, 곧 진정한 생명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은 영의 사람을 길러내는 곳인 것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교회가 목회자의 영적세계의 이해와 경험의 부족으로 그냥 말씀을 마치 도덕경을 논하듯 그렇게 관념적으로 풀고 이해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풀어 가르치며, 중생과 성령과 경건의 모든 것들은 도덕율 수준으로 가르치고 이해시키는 곳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영의 세계는 그러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관념과 상식의 세계는 이 세상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영의 세계는 성령의 권능과 능력이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는 세계요, 표적과 이사가 가득한 세계입니다.


병든 자가 치유 받고, 귀신들린 자가 자유케 되고,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며,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천사의 방문을 경험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목회자나 성도님들이 이러한 영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땅의 썩고 죽을 영광과 가히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맛보거나 누리지 못할까요?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두루 살펴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다르며,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교훈과 같지 않다고 놀란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에는 어떤 신비스러움과 신성이 어려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결국은 영이신 하나님, 그 영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리고 그 속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까요? 하나님은 그 영광의 세계를 두 가지 베일 뒤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첫 번째 베일은 하늘의 영광의 귀한 것을 알아 땅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베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어려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세상과 겸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누가 영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혜의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고 그것을 사기 위하여 땅의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에게만 그 보화를 얻게 하는 가림의 베일을 하나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려진 베일을 지혜의 눈으로 벗겨내고 온전히 하늘 영광을 위하여 땅의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음으로 영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단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마음에서 완전히 잘라내기 전에는 깊은 하나님의 영의 세계와 그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라는 베일을 완전히 걷어내기 전에는 그 세계와 영광을 누리고 보지 못하도록 지혜로운 자만이 걷어내는 베일을 하나 쳐 두신 것입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저와 우리가 아둔하여 착각을 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영광을 찾고 두드리면 그것이 얻어지고 누려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당신을 찾는 자에게 영의 귀한 것뿐만 아니라 땅의 귀한 것들도 더불어 누리게 하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거치지 않고 찾는 세상의 영광은 일반적으로 죄악과 쾌락과 탐욕입니다. 육적 만족을 주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오직 구하며 그 속에서 풍성하게 오는 땅의 기름진 것들은 삶의 아름다운 것들이며 아름다운 풍요로움입니다.

그러나 우리 타락한 본성은 향기로운 풍요로움보다 썩은 냄새가 육신에 속한 것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은 당신이 계신 깊은 영의 세계와 그 영광을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는 베일 뒤에 숨겨 두셨습니다. 그것을 걷어내고 잘라내는 자에게만 허락하신 것입니다.

글이 길이 2편으로 이어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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