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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치유

초록 등불 2011. 5. 16. 14:07

말씀과 치유

  
이연길 목사(미국 빛내리교회)

오늘 제가 받은 주제가 말씀과 치유 사역인데 주로 설교와 치유 사역, 즉 어떻게 설교를 통해서 치유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설교라고 할 때는 일반적인 설교라기보다는 제가 강조하는 이야기식 설교! 'Narrative preaching'이라고 하는 특수한 분야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이야기 설교가 전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분야와 치유 사역을 연결시켜 보려고 하는데 한 가지 걱정은 이야기 설교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교역자들에게 이야기 설교에 대해 아는 것을 전제하고 치유 사역과 연결을 시켜야 되기 때문에 어려움이 따르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이해를 하시면서 들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30년 넘도록 목회를 하는 가운데 저는 3년 전에, 목사가 된 이후로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하루아침에 끝난 게 아니고 약 2년 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이 목회를 하면서 고통을 당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지금은 조금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교회를 아름답게 지어 놓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라고들 합니다. 한국 교회의 수준을 넘어서는 설계를 해서 본당과 교육관과 체육관을 지은 교회로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지었습니다. 짓고 나서 저는 '아 이제는 우리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상하게 교인들이 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해도 교인들이 설교를 잘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제가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야 저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분석해 낼 수 있지만, 아주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첫째, 저는 장로교 소속 목사인데 우리 한국 교회와는 조금 다른 미국 상황에서 목회를 했기 때문에 장로교회가 갖는 그런 교회의 구조적 모순을 다 제거했습니다. 여러분이 저희 교회에 와 보신다면 장로교지만 장로교회의 모습이 없는 교회라고 느끼실 것입니다. 미국에서 12년 동안 개혁의 과정을 겪으면서 상처를 입은 교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둘째, 교회를 너무 아름답게 짓고 나니까 교인들의 마음속에 '아 이제 교회를 아름답게 지었기 때문에 이젠 목사가 독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뼈빠지게 일만 하고 영광은 목사가 다 받을 것이다.'하는 생각이 들어 전부 변한 것입니다. 그때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형태만 변할 뿐, 그 줄기가 끊기지 않고 계속 교회 문제로 남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2년 반 동안 제가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교회를 박차고 나오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2년 반 동안 고통 당하면서 저는 주로 세 가지 문제에 전념했습니다.


첫째, 나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가, 내 목회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한국에서는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에서는 근대적 교회, 근대적 목회 방법을 완전히 뛰어넘은 새로운 목회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교인들과 대화를 하면서 정말 교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정말 교인들을 섬긴다는 게 무엇인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과 저 사이에 갈등이 생기니까 제가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해도 교인들의 반응은 "목사님, 왜 우리를 때립니까? 왜 우리를 칩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황당했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성경공부로 다져진 교인들이기 때문에 목사에게 직접 공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회의 문제에 전화하는 사람도 없고, 만나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목사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2년 반 동안의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목사가 상처를 받으면 교인들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워하느냐 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때 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건강한 영혼이 되어야 교인들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면서 저 자신을 깎는,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고통을 견디어 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제가 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교인들도 달라지기 시작하더라는 사실입니다. 교인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교인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고 교인들에게 희망을 설교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교인들에게 희망을, 또는 복음을, 사랑을 설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인들의 마음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저를 살린 것이었습니다.


작년 봄에 유럽의 선교사 대회에서 저를 강사로 초청해 주어서 강의를 하게 되어 프랑스 파리에 갔는데, 그 곳의 목사님들이 바빠서 저를 안내해 주지 못해서 저 혼자 파리 지하철을 타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프랑스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서 영어를 하면 그 사람들이 대답을 안 하니까 무조건 한국말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답답해서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때 영어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가서 시도해 보았는데 한국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데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역시 유언비어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제가 느꼈습니다.


그렇게 헤매면서 한 일주일쯤 보내고 나니까 소화불량도 다 낫고, 또 머릿속의 교인들에 대한 불만, 또 원망스러운 것도 다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여튼 그 곳에서 영혼과 육체가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돌아갈 때에는 아주 건강해져서 돌아간 것입니다. 몸도 건강하고 영혼도 건강해졌습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무조건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너무 좋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하고 설교를 하고 또 만나고 그랬더니, 교인들의 마음이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목사를 목사로 존경하기 시작하고 또 우리가 힘을 합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 나가는 놀라운 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저희 교회가 금년에 저에게 1년 안식년을 주었는데, 제가 1년을 다 쓰지 못하고 두 달만 쓰겠다고 해서 그 두 달을 쉬고 있는 중에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은「Wounded Healer」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상처받은 치료자」라고 하는 책인데, 이 책에서 나우웬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인 목회자들이 먼저 건강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상처받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우리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예언자처럼 날카롭게 비판도 해야 되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고 특별히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 살아가야 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성령의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만이 남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제 정신과 의사로 친구도 되고 교인인 분과 같이 지내면서 healing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힐링이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차라리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상당히 날카롭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recover이지, 이게 healing이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목사님은 항상 고치는 사람이고 교인은 항상 치료를 받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healer' 치료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은 그 길을 목사님도 교인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회복을 해서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이지, 누구는 치료자이고 누구는 치료받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맞다, 사실 교회를 치료한다는 것은 우리 목회자가 치료를 받으면서 또 우리 교인들을 치료하고 교회를 치교해 나가면서 함께 치료받는 것이고, 우리 목회자가 치료를 이루어 나갈 때에 우리 교회들은 건강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뉴욕에 있는 목사님들이 모여서 설교에 대해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얻어진 결론은 딱 두가지인데, 첫째는 설교를 잘하지 못할 바에야 짧게 해라, 둘째는 은혜를 주지 못할 바에야 교인들을 화나게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목회를 하다 보면 굉장히 어려운 교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매번 목사에 대해서 트집 잡는 분,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 또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분, 이해하지 못하는 분 등 많은 상처받은 교인들을 대하게 되는데 저도 옛날에는 이분들이 신앙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니 그분들이 신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분들이 다 상처 받은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상처가 있기 때문에 목사를 괴롭히는 것이고, 교회를 괴롭히는 것이고, 또 교인들을 괴롭히는 것이지 건강한데 믿음이 없어서 괴롭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말한 대로, 목회자도 상처를 받았지만 교인을 치료하는 의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을 대할 때에 간단히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들을 괴롭히는 교인을 만나면 '좀 믿음이 없고 성질이 고약해서 그렇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저분에게 뭔가 깊은 상처가 있구나.'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저분은 상처가 있는 병자이기 때문에 영적인 병원에 찾아왔구나. 그러면 내가 의사로서 저분을 치료해 주어야 될 책임이 있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아프다고 하면 신경질 내는 의사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와서 그들이 짜증내고 불평하고 비판하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그들 속에 아픔이 있기 때문에, 고통과 상처가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남을 괴롭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 이렇게 보면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상처가 있고, 우리 교인들에게도 상처가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 교인들은 상처가 너무 많습니다. 어려서 가정에서 받은 상처, 가난 때문에 받은 상처,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 학교에서 받은 상처, 또 자라면서 받은 상처들, 특별히 요즘에는 교회에서 받은 상처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도 이민 교회 목회를 해보니까 한국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던 교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무심히 살펴보면 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상처받은 것이 그대로 다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민 교회가 참 어렵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처받은 영혼들을 안고 치료해 나가면서 건강한 영혼과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번에 한국에 와서 보니까 TV 프로그램이 거의 다 희극화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TV에서 근엄하고 엄숙하고 진지한 이야기들은 밤 시간대로 다 넘어가고 낮에는 젊은 아이들이 나와서 말장난이나 하는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녁 늦게 하는 허준 이야기만 빼놓고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저는 정신과 의사에게 왜 한국의 모든 매스컴이 희극화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근엄하게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질려서 이제 차라리 웃으면서 거짓말하는 게 더 좋아서 그렇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그것은 오늘의 고통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현실을 희극화해서 잊어버리려고 하는 우리 국민성의 한 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희극화해서는 절대로 해결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 그러면 목회자에게도 상처가 있고 교인에게도 상처가 있고 오늘날의 교회에도 많은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이 상처들을 치료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의 아픔을 치료해 나간다고 하면 여러분의 교회는 절대로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건강하고,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다시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저는 이야기 설교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Narrative preaching'이라고 하는 방법을 여러분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책이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요즈음에 이런 설교의 분야가 조금씩 조금씩 개발되고 있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이야기 설교라고 하는 것은 이야기의 위대한 힘과 성서의 이야기를 접목시켜서 어떻게 하면 성서를 이야기로, 사건으로 풀어서 재미있게 전달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야기 설교의 핵심 부분입니다. 그런데 성서를 이야기로 전달할 때, 성서에는 표면 구조가 있고 하층 구조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목사님들이 다들 알고 계신 줄로 압니다만, 겉으로 보이는 성경 해석과 그 하층 구조에 흐르는 성서의 해석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서 옛날의 그 사건을 재구성해서 그 재구성한 사건을 교인들에게 들려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세미나를 하면서 우리 목사님들에게 많은 강조를 했습니다만,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들 중 가장 큰 문제를 들라면 복음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야기(God's story)를 듣고 싶은데 우리 목사님들은 목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바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성서로 돌아가서 정말 성서가 가지고 있는 그 말씀을 캐내고 그 말씀의 힘을 전달하므로 그 말씀을 받으면서 우리가 영적인 질병, 육신의 질병, 정신적인 문제를 치료받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 8장 1~11절 말씀을 읽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잡아 와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시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너는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것이 표면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 내면적인 이야기가 깊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에는 '이 여자를 죽여야 하느냐, 살려야 하느냐'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이 문제에 연루시켜서 넘어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만일 예수님이 "이 여자를 돌로 치지 말아라."고 한다면 그 돌은 대신 예수님이 맞아야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이 여자 대신에 예수님이 돌무덤 속에서 죽을 수 있는 그런 위기의 순간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위기의 순간을 만났다고 하면 우리는 아마 그 여자를 죽이도록 두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 여자 편에 서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 티끌만도 못한 여인! 이 여인 때문에 자기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는 그 어려움 속에도 이 여자 편에 서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마음에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용기이고 대단한 사랑입니까? 예수님은 그런 여자를 당신 자신의 몸처럼, 어떤 면에서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가 있으셔서 그냥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버신 것입니다. 그래서 엎드려서 글을 쓰셨습니다. "뭐라고 썼을까?" 우리는 뭐라고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걸 볼 때에 예수님은 아마 자기의 심경을 거기에 썼을 거라고도 생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또 흥분한 사람들의 열기를 식히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 글을 썼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일어나셨습니다. 일어나서 하는 말씀이 "이 여인을 돌로 쳐라."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대담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을 돌로 쳐라. 단 죄 없는 사람만……." 그러니까 예수님이 치지 말라고 그러시면 예수님이 죽어야 되는데 "돌로 쳐라."하셨기 때문에 일단은 죽음을 면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이 여인을 살려야 되기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여자도 살리고 예수님도 사시고 그 사람들이 돌을 놓고 떠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론적으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 한 마디를 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던지시고 희생을 던지시고 여자를 감싸시고 자기 생명을 거기에 투여하는, 그런 피나는 노력을 다하신 후에 맨 마지막으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설교는 대부분 "죄 짓지 말라."는 말씀만 강조합니다. 앞에서 주님이 그 여자에게 보여 주신 그 굉장한 사랑은 생략하고 지나갑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게 복음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이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고 이 여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생사를 같이하여 결단하고, 그리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이 짧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느끼고, 또 하나님은 어려움 중에 있는 우리를 돕는 분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정말 하나님의 그 사랑에 우리가 감동을 느끼도록 해주어야 비로소 성도들의 마음속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우리들의 문제는 교인들에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지 않고, 하라고만 강조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살아갈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보다는 이제는 정말 예수님이 여자를 통해서 보여준 그 사랑을 더 많이 설교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여자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강조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전인 치료를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여자를 문제에서 살려내고 죽음에서 살려낸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을 전인적으로 완전히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로 하여금 건강한 영혼으로 바르게 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간단한 치유 방법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이 이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그 현장에서 그것을 다 느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느냐 하면, 우리를 사랑하사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꼭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 사건마다 주님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우리를 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는 임마누엘 신앙만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의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가 저술한 책을 많이 읽으셨을 줄 압니다. 현대는 치유목회를 하여야 되는데, 치유목회를 하려면 상담치료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 중에 권하고 싶은 것이 폴 투르니에의「정신치료」라는 책입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의 암시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암시를 주면 내가 타락할 수도 있고, 내가 교회에 대해서 반대할 수도 있고, 목사에 대해서 반대할 수도 있고, 심지어 계속적인 음란의 암시를 주면 내가 간음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투르니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암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한번 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을 암시해 줄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 교인들은 용서를 수용하고 건강한 영혼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선언하면서 동시에 우리 교인들끼리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란 말씀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얼마나 이 여인을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면서 그 속에서 교인들이 여러 가지 사랑을 체험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이야기 설교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본문이 나오면 반드시 용서에 대한 것을 다시 언급합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여러분! 용서받았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또 "여러분은 옆에 있는 사람, 모든 사람을 용서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용서했다고 합니다. 또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 이 시간 이전에 일어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거라면 우리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언급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자꾸만 용서를 회복하게 하고, 용서를 서로 누리게 하고, 그리고 용서를 함으로써 교회가 하나되게 만드는 작업을 계속 말씀을 통해서 해나가면 설교가 하나의 암시가 되어 교인들 심령 속에 화평의 마음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용서받았습니까? 교인들을 정말 용서하고 사십니까?


이야기 설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 용서, 우리를 사랑하심, 도우심 등을 구체적인 사건으로 보여 주면서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그리고 체험한 것을 가지고 성도들과 함께 나누게 하여 교인들을 매시간 치료해 나가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아마 미국에서는 제일 행복한 교회일 것입니다. 물론 약 2년 동안 저희 교회가 저를 좀 괴롭게 하긴 했어도 지금은 아마 저희교회 만큼 화목한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에 갈라진 틈이 없고 이렇게 목회자와 온 교인이 한마음 되어서 교회를 섬겨 나가는 교회는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잘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실패도 많이 했습니다. 또 저희 교회를 떠난 사람도 많습니다. 교인 중에 지독히도 안 고쳐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못 할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얻은 결론은 나라는 목사는 '나 만큼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남고, 또 치료받을 수 없는 사람은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교회를 떠나도록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가라고 하지는 않지만 간다고만 하면 그냥 보냅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잘하게 하고 그래서 함께 치료받으면서 교회를 섬겨 나가도록 합니다. 교회가 서로 치료를 하면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서는 건강한 에너지가 나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목회자가 건강하면 말씀을 통해서 건강한 에너지가 나가고, 우리 교인들이 건강해지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이 건강해지고…….그래서 건강의 에너지가 그 교회를 휩싸면 모든 교인들이 다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한 곳이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한 에너지가 나가면서 온 교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 치료를 받게 됩니까?


사람이 치료받는 과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사랑을 통해서 변화됩니다. 이것이 이야기식 설교입니다. 헨리 나우엔도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 분도 영성 문제를 이야기하고 윤리문제를 이야기하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 '오늘날 설교가 그렇게 많이 선포되고 또 말씀이 그렇게 많은데 교인들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헨리 나우웬이 거기서 얻은 해답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에「The Beloved Son」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즉 그 핵심 내용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 둘째 아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아이는 개성이 참 강합니다. 그런데다가 어려서 미국에 가서 겉모습은 한국인인데 속은 미국 사람입니다. 이 애가 너무나 개방적이고 활달하니까 부모가 자꾸 간섭을 하였습니다. 좀 앉아서 공부해라, 돌아다니지 말아라 등등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저나 아내가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 아이가 대화를 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제가 전화를 걸면 "아빠 나 지금 도서관에 가려고 하는 길이야."라고 합니다. 꼭 도서관만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또 마음 약하니까 "그래, 그러면 가거라."라고 합니다. "아 지금 막 수업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도저히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둘이 의논을 했습니다. 이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뭔가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뭘 하라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 말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전화만 하면 사랑한다는 말부터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화만 들면 "아빠, 나 지금 도서관 가야 돼." 그러면 저는 "아들아! 난 널 사랑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서관에 간다는 놈이 30분도 더 넘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 이 아이가 침착해지기 시작했고, 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금년에 이 아이가 law school에 들어갔습니다. 이 아이가 무려 미국의 전체 law school 시험 응시자 중에 10퍼센트에 들어가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는데 그 기적의 원동력은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치료하는 데 굉장히 복잡한 게 필요한 것 같아도 결론은 매우 간단합니다. 사랑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목사님들을 괴롭히는 교인이 있거나, 교회에서 짜증내는 분이 있다면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저분이 사랑받고 싶어서 그런다.'라고 생각하고 손 한번 더 잡아 주십시오.


또 요즈음에는 이런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무조건 사람을 만나면 세 가지 칭찬할 것을 찾아라." 여러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목사님들이 이것을 실천하면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무조건 누구든지 만나면, 아무리 보기 싫은 교인을 만나도, 아무리 보기 싫은 장로를 만나도 칭찬할 것 세 가지를 찾으십시오. "오늘 넥타이가 참 멋있네요." 그러나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칭찬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관심을 보여 주고 사랑해 주기만 하면 사람은 변합니다. 얼마든지 변합니다.


둘째, 고통을 줌으로써 변화됩니다. 우리가 교인을 너무 편안하게 해도 교인들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때에는 교인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해야 합니다.


폴 투르니에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진정한 죄책감과 거짓 죄책감입니다. 목사님들이 설교 시간에 "여러분! 회개하세요. 죄를 짓지 마세요."하는 것은 공포심만 조장하는 거짓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죄책감은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또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애타하시며 인내하시고 기다리셨는가를 자꾸만 보여 주면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이 자기를 인정해 주시는 그 사랑이 가슴에 깊이 맺힘으로써 비로소 '내가 정말 죄인이로구나! 내가 그 사랑을 배반한 자구나!'하면서 진정한 죄책감을 느끼고, 그럴 때에 비로소 사람은 변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죄책감을 일으키라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이야기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설교 시간에 강조만 크게 한다고 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그들이 진정한 죄책감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변화되고 신앙이 성숙해진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2, 3년 동안 저희 교회를 통해서 가장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저는 굉장한 성숙을 경험했습니다. 그만큼 제가 노력을 했고, 그만큼 기도했고 또 그만큼 제가 성경을 가지고 씨름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고통이라는 것은 정말 값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들에게 "고통을 받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고통이 오면 피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멋지게 이기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에게도 너무 편안하게 해주면 어떤 면에서 정말 크리스천의 삶이 없는 교인을 만들어 낼 염려가 많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눈부신 성장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 서울에 와서 차를 잡으려고 하니까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30분도 기다리고 한 시간도 기다렸는데 아주 멋진 자가용 한 대가 오더니 "손님, 어디로 가십니까?"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말했더니 "타십시오."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참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는 서울에서 유명한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그는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이 차는 우리 사장님 차인데, 우리 사장님이 다섯시만 되면 퇴근하고 그 다음부터 열두시까지 제가 이 차를 가지고 영업을 하는데 제 봉급보다 몇 배나 많습니다. 차도 사장님의 것이고, 기름도 사장님의 돈으로 넣고, 나는 운전만 하면 돈이 생기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만, 기쁜 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우리에게 전달되어서 그 사랑 속에서 내가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그리고 내가 새로워지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삶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셋째, 동일시를 통해서 변화됩니다. identify, identification, 이것은 결국 사람들은 누구를 흠모하면서 닮으려고 노력할 때 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고 예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은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말씀을 받는 사람이 무엇인가 동일시가 이루어져서 '내가 목사님을 존경하고 내가 닮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자기들이 배운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할 때 변화됩니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 목회자들 모두가 심리치료사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심리치료사가 교인들을 치료할 때 몇 가지 꼭 사용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논문 제목이 'fun theology', 즉, '재미신학'이라는 말입니다. 재미가 있는 신학! 여러분 들어 보셨습니까? 재미신학! 누가 좀더 발전시켜서 이 재미신학을 구체화시켰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재미신학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교인들이 재미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재미가 없다는 말은 '재미있음이 없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재미가 없다는 말은 설교에 뭐가 있어야 하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고, 예배가 재미가 없다는 말은 예배에 뭐가 있어야 될 것이 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어쨌든 재미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재미있어야 되고 설교도 재미있어야 되고 모든 게 재미있어야 됩니다. 이전에는 예배를 '보느냐', '드리느냐'를 가지고 우리가 논쟁을 많이 했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지, 예배를 왜 보는 거냐고 했는데 요즘에는 달라졌습니다. 예배는 드리기도 하고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즐기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설교를 통하여 전함으로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속에 영적 카타르시스를 맛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재미'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재미도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즉 세상적인 재미, 요즘말로 하면 육감적인 재미, 그리고 지적 재미, 또 영적 재미가 있는데 여기서 최고의 재미는 영적 재미입니다. 교인들이 한 번 영적 재미에 미치면 물불을 가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영적 재미를 느끼게 하고, 영적 재미를 느끼며 살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설교의 하나의 기술인데, 종래에 우리가 하던 설교 방법으로는 교인들에게 영적 재미를 느끼게 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야기 설교는 쉽게 말해서 목회자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시켜 줌으로써 교인들이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교인들은 영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로 잘 드는 말씀이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못가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니까 이 병자가 말하기를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일어나 걸어라."하고 말씀하심으로 그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전인치료를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이 환자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결론적으로 "나에게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인간의 깊은 심연의 고독을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까? 38년 동안 병을 시달리다 보니까 부모도, 친구도, 아내도, 이웃도 없는, 그저 혼자 외로이 누워 있는 그 고독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손을 잡아서 이끄시는 순간 그는 '아, 나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진정한 내 이웃이 있구나!'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오래된 환자에게는 누가 터치 한 번 해주는 것이 굉장한 위로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가 그것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목사님들이 똑같이 30분 동안 심방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환자의 손을 잡고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목사님은 그냥 의자에 앉아서 떨어진 상태로 30분 동안 이야기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누가 더 오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가 오래 있었다고 느꼈겠습니까? "손을 잡고 있던 목사님이 오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몇 분이나 같이 있은 것 같았는지 물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이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손을 잡지 않고 터치를 하지 않고 30분 이야기를 나눈 사람보다 거의 배나 오래 있어 주었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님들은 이 터치 이론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잘못 사용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무조건 터치를 할 때 친근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보통 교회마다 11시에 예배를 시작합니다. 제가 전에는 사무실에 있다가 11시에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했는데, 지금은 한 20분 전에 반드시 현관에 가서 오는 성도들과 악수를 합니다. 무조건 악수를 해주고 무조건 안아 줍니다. 그리고 단 위에 올라가 보면 온 교인들이 목사와 한 마음이 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음주부터 기도한다고 엎드려 있지 마시고 교인들을 만나서 손을 잡아 주십시오. 기도는 다른 날 하시고 나가셔서 계속 터치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주시는 것 자체가 "내가 네 이웃이다."하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거기에 무한한 희망을 가지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나 걷고 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 짧은 이야기를 합니다만 이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성경공부 시간이나 설교 시간에 하면 우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 줄 아십니까? 나는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위대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보여만 주면,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내 영혼으로 접촉만 하면, 터치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영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신앙의 용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치료를 할 때 보통 직접화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하라', '하지 마라' 등의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오늘의 설교에서 정말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비지시적인 방법, 암시적인 방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라,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던져줌으로써 암시를 합니다. 여러분! 비유(parable)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먹여 직접 소화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놓아줌으로 자기 스스로 이해하고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비지시적이고 암시적인 설교, 이런 것들을 우리가 이야기 설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오해를 할까봐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지나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식 설교라고 해서 무조건 아무 이야기나 갖다 늘어놓음으로써 이야기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야기에는 '시적 이야기'도 있고, '소설적 이야기'도 있고, '대화적 이야기'도 있고, 또 '수필식 이야기'도 있고, '사랑방식 이야기'등 기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자기에게 맞는 대화법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어떤 이야기식 방법이 맞는가를 찾아내어서 성경의 본문을 여러분에게 맞는 이야기로 만들어서 그것을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목회자나 교인들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상담학에서는 그 문제 나름대로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 사람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가난의 문제라든지, 또는 어려서 학대를 받았다든지, 또는 친구간에 오해를 품었다든지, 교회에서 어떤 문제를 받았든지 간에 그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과 만나기만 하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체험하기만 하면, 그 모든 영혼의 아픔과 고통이 다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만 해주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는 순간 자기들의 상처를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치유는 육신적인 치유도 필요하지만 설교를 통한 영적인 치유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들에게 영적 치유를 위한 기도를 반드시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영적 치유 기도회를 매달 마지막 금요일에 하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요즈음 안수기도하고 영적으로 치료한다는 많은 분들이 사람을 보면 병을 안다고 합니다. 암인지 관절염인지 안다는데 저는 아무리 해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고민했습니다. 안수기도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을 읽어보니 예수님도 환자를 똑같이 치료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환자마다 다르게 치료를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치료 방법을 도저히 가질 수 없다는, 그래서 우리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맺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렇게 자상하게 치료해 주시고 결론적으로 "너희들은 그것 다 몰라도 괜찮다, 오직 내 이름을 너희에게 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만 하면 된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사람들을 무엇으로 치료해 주었습니까? 베드로도 저 사람이 무슨 병이고,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으라고만 하면 병이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걱정할 게 없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육신의 질병도 치료해 주고, 정신도 치료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사님들이 건강한 영혼으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영혼으로 목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청골산 봉서방 (다음카페: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