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세계 영성은사/† 역사-믿음능력 역사

[믿음] 담대한 도전이 상을 받는 길입니다

초록 등불 2011. 8. 8. 20:54

시편 145:3에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광대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개역성경을 옮겨놓았는데, 개역 개정판을 비롯해서 다른 성경들은 ‘광대하다’라는 말 대신 ‘위대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廣大는 넓고 큰 것을 의미하고 偉大는 높고 큰 것을 의미합니다. 수평적 사고로 가느냐 수직적 사고로 가느냐에 따라서 단어 선택이 다를 뿐입니다. 여기서 사용한 히브리어는 ‘가달’(gadal)이라는 단어인데, 그 뜻이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분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라고 기록한 부분을 보면 그는 수평적 수직적인 관점 모두를 취했습니다. 이 넓이와 깊이를 깨닫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광대하시다”라는 표현을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 광대하고 위대한 부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은혜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진보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배경에는 바로 하나님의 이런 부분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는 유한할 뿐만 아니라 매우 좁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적으로 아는 지식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한계는 고작 80년입니다. 그리고 지능지수 100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입니다. 잘 알고 기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알지 못하고 잘못 기억하는 것이 무척 많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면 학생시절에 어떤 주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막상 학생들 앞에 나가서 그것을 설명하게 되면 어설프거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동급생들에게 야유를 받기도 합니다. 똑 같은 사건을 목격했지만 진술이 다른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봅니다. 함께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체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영적 지식의 폭을 넓히고 하나님을 깊이 넓이 경험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협소한 지식의 한계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사람들이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가집니다. 두려움은 행동을 위축시키고 더욱 고립시킵니다. 지식이 부족하면 고집이 세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다양한 영적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쌓아가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경계심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거부하게 되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한계는 매우 좁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넓고 높다는 사실을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비좁은 우리가 넓은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의식체계를 넓게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 담대함이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소개합니다. 그가 전 인류가 본받아야 하는 믿음의 조상이 된 까닭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르 지방의 우상을 만드는 가문에서 성장했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해서 그를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불러낼 때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행동을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히 11: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했지만 떠났다는 사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독자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에 순종하였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히 11:17) 이 일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인신공양(人身供養)은 하나님에게는 용납이 될 수 없는 우상숭배자들이 행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그는 믿음으로 감행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부분이 바로 우리의 지식 한계를 넘어서는 모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조 용기 목사가 방언을 받아들일 때 그는 이단이라는 정죄를 무릅써야 했습니다. 당시 다른 목사들은 이런 정죄가 두려워서 감히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움이 없이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롬 8:1)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 계명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믿는다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으며 심지어는 다윗처럼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 23:4)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이 관여하실 것이며, 어리석어서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확신과 믿음이 있기 위해서는 주를 위해서라면 아골 골짜기라도 가고 소돔 같은 거리에도 가는 행동이 평소에 있어야 합니다. 이런 행위가 없이 말로만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귀찮은 일이나 손해나는 일은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빠진다면 절대로 보호하심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도전하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머리로 인식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능적 인식에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바리세인들과 제자들의 차이는 바로 주님과 동행하였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었던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아는 지식은 지식일 뿐이며 결코 능력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능력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성경을 아는 지식이 본질이라고 항상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본질을 추구하던 바리세인들이 실제로 본질이 왔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20)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과감하게 행동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는 신묘막측한 것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편 139:1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끄시는 방법은 신묘막측합니다(fearful and wonderful).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베푸시는 은혜가 경이롭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우리가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광대하고 위대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려운 마음을 그런 방향으로 승화시키기 보다는 타인의 비판을 인식하고 혹시 이단으로 정죄되면 어쩌나, 마귀의 올무에 걸리는 일은 아닌가 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두려움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요한사도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격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담대함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요일 5:14) 히브리서는 우리가 마땅히 담대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 10:35) 그렇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 즉 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20여 년 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이 길을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도전했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소리도 들었고, 이단이라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겪었던 과정이었고, 사도들이 당했던 일이며,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이 겪었던 수난의 과정과 같은 것이었기에 꺾이지 않고 담대함으로 도전했으며, 더 깊이 더 높이 바라보면서 하나라도 더 알고 경험하기 위해서 매진했습니다. 여러분들 앞에도 역시 믿음의 선배들이 있고, 공개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더 나은 것을 향해서 여러분의 몫을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우리들에게 충만해지기를 위해서 담대한 도전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학자가 새로운 발명을 하기 위해서 수없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단념하지 않고 실험을 계속합니다. 그 실험이 불가능하고 무모한 것이라면 그 실패를 통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페니실린이 그와 같은 우연을 통해서 발견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무지해서 막힌 담에 계속 도전하는 경우에 하나님은 다른 방향으로 우리들을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미쁘시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딤후 2:13).

출처: 영성이야기 (갓피플카페:healinghouse), 장봉운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