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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담대해야 하는 이유

초록 등불 2011. 8. 8. 21:03

기독교의 본질은 믿음에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 믿음의 시험 앞에 놓이게 되면 과연 믿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하고 행동하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과는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 사실을 알고 믿는 것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런 믿음에 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의 핵심인물인 아브라함과 그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질에 관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신약에서 작자를 알 수 없는 책인 히브리서가 다시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본받고 따라야 할 기준을 제공합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갔던 본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약속을 보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약속처럼 믿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은 바로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부처를 믿고, 알라를 믿는 믿음은 종교적입니다. 존재를 믿는 믿음은 귀신을 믿는 무속인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약속이 있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이란 어떻게 되어 질 것이라는 장래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고 이끄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면 반드시 말씀하신대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 즉 “땅에 충만할 것”이라는 내용과 그리스도께서 약속한 약속 즉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릴 것”이라는 내용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번성과 다스림 사이에 놓여있는 우리들은 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약속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믿어야 할 본질적인 내용이지만 세부적이고 개인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우리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지시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이 땅에서 번성과 다스림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해야 할 직무에 관련한 말씀을 주시며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지시하시는 말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여기에는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길로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취한 행동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노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홍수에 관한 관념조차 없었던 시대에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서 말씀을 따라 방주를 예배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히 11:7) 노아는 이 일을 믿음으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선례가 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그것을 따라 행동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을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관례를 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이미 검증되어진 행동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리를 만들고 어떤 일정한 행동 양식을 만들어 서로 장려하게 됩니다.

그런 행동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은 이런 관례를 벗어난 행동을 요구받게 될 때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례에 벗어나는 행위를 요구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낯선 행동보다는 익숙한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낯선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하도록 촉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제합니다. 관습에서 벗어나는 생소한 일을 하게 하는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교리에 어긋나는 것과 같은 요구를 할 때 우리는 적지 않게 당황하게 됩니다.

노아는 집중호우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홍수는 더 더욱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방주를 예비하라는 명령을 하였으며,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삶을 터전인 우르를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생소한 영역으로 진입하였을 때 겪게 되는 어려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도 단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닐 때 우리는 선택했던 것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들을 당시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사람의 마음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상황은 항상 동일하지 않습니다. 처음 결정했을 때와 시간이 지난 후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집트로 내려가게 되는 실수를 합니다. 상황이 처음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에는 다른 생각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는 어떤 기대도 생기고 나름대로의 판단도 섭니다. 그렇게 해서 순종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했던 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대했던 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에 대해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닌가?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귀에게 속은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때문에 더욱 더 힘들어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의 강도는 높아지고 다른 변명거리를 찾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곳에 기근이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곳으로 자신을 불러냈다면 기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잘 살고 있는 우르에서 불러낼 때는 그보다 더 나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질 때 아브라함의 선택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이집트에서 그는 창피를 당하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갈등에 깊이 휘말려 있었던 그에게 하나님은 믿음을 다시 세울 사건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천사의 방문과 아들을 얻게 될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는 이 약속을 2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증이 없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영적입니다. 천사를 통해서 주신 약속은 한 여름 밤의 백일몽 같습니다. 깨고 나면 허무한 것처럼 세월이 지나면 그렇게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내시고 약속을 주실 때 그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 약속을 생명처럼 생각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라고 강조함으로써 우리들의 그와 같은 단점을 극복하도록 했습니다. 처음 결정한 것에 대해서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거하는 삶은 초지일관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며 말씀의 전개과정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상황은 약속한 말씀과 정 반대로 진행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약속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분을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히 12:25)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많은 시간이 걸리도록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고치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관념에 따라서 판단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그렇지 못한 쪽으로 전개되면 우리는 갈등이 생기고 이런 저런 생각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것이 깊이 묵상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상황 저런 상황을 그려보면서 말씀을 되씹게 됩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도 생기고 마귀에게 속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갈등에 휘말리는 까닭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과 마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게 되고 그것이 지식이 되며, 이후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 자신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깊은 영적 진리들을 깨닫게 되었고, 복음을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받은 약속 안에 머문 세월이 14년입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고립된 기간 동안 그는 아라비아에서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신약성경을 쓰는 배경이 되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가 전도여행에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리로 철저하게 무장된 유대 기독교 교사들의 도전을 받았을 때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가르침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사단의 무리 또는 거짓 교사, 뜨내기 장사꾼 등으로 부르면서 강하게 대처했습니다.

그가 복음의 확신 안에 거하면서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동안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 과정에서 얻어진 진리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그는 제자인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것 안에 거하라”(딤후 3:14)고 주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것입니다.(히 4:12) 그 뿐이겠습니까? 혼과 영까지 쪼개는 것입니다. 쪼갠다는 것은 대수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따릅니다. 간단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과 골수를 쪼개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세상에서 자신 홀로 내버려진 것 같은 삭막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이해해줄 사람이 없는 것 같은 절대 고독에 휘말립니다. 그 많던 성경교사들이나 목사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고 절규한 바울과 같은 절망적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고독에 휘말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결과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걷는 길은 “새롭고 산 길”(히 10:20)입니다. 이 ‘새롭다’는 말씀 한 마디가 여러분을 죽음까지 몰아가는 것인 줄을 그 때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길, 설마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 길입니다. 그래서 후회가 되고 돌이킬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고 잘못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수도 없이 후회하는 그 길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또한 “산 길”입니다.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을 받은 사람에게는 낯설고 생소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전혀 생소한 예수를 밧모섬에서 만났습니다. 바울은 생소한 예수를 다메섹에서 만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전혀 알 수 없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예수를 만나는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안전한 틀 속에 머물고 싶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낯설고 생소한 예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갈등에 휘말리고 하나님을 더욱 알 수 없는 존재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부르심이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출처: 영성이야기 (갓피플카페:healinghouse), 장봉운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