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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과 빛의 은사들 (너무 중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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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자전거를 수리할 곳이 있어서 아시는 장로님께서 운영하시는 자전거포에 들렀습니다. 마침 제가 아는 다른 장로님 한 분도 그곳에 계시더군요. 그런데 다른 한 장로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제 영의 직관 가운데 일상적이지 않은 가정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장로님,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지만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으시네요”라고 말씀 드렸더니, 노환의 어머님의 병고 때문에 가족들이 힘겨움을 겪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자전거를 수리하고 와서 집에 돌아와서 저녁 기도 시간에 그 장로님을 잠시 생각하며 스치듯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그 가정엔 가난의 영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씀 아니 일상적인 말씀이라기보다도 불현듯 스치듯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가난의 영이라..” 영적전쟁이나 사단의 역사에 대해서 다룬 글들에서 언뜻 어디서 읽어본 듯한 기억은 나지만 제게도 다소 생소한 말이었습니다. 다른 기회가 있어서 친구 장로님에게 그 장로님의 가정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니 이상하게 그 가정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서 지독한 가난함을 겪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만나서 성경 속에서 우리가 가진 권세와 권능에 대해서 말씀해 드리고, 어떻게 사단의 역사를 끊어내고 쫓아내는지 간단하니 가르쳐 드리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 만나지는 못하였습니다. 은사에 관한 글을 쓰고 있지만 실상 예언의 은사 그 이상의 것들은 구체적으로 논하기도 참 어렵고 조심스럽기도 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한 성령이시지만 각 개인에 따라서 역사하시는 것들이 다릅니다. 경험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음성을 통하여, 어떤 분들은 꿈과 환상을 통하여, 어떤 분들은 내적증거나 직관을 통하여 등 다양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나 여타의 은사들이 일반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상 예언의 은사나 지식의 말씀의 은사나 혹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 더불어 어쩌면 영분별의 은사까지 포함하여 이들을 정확하게 구분 짓는 것도 어렵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보편적으로 성도님들로 하여금 영적 생활에 활력을 주도록 안위와 권면과 덕을 세워주도록 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지금의 영적상태나 상황을 알게 하시는 경우도 있으므로, 어떤 사실과 지식에 대하여 초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의 말씀과 일맥상통하고 또한 안위와 권면과 덕을 세워주는 말 속에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 나가라는 권면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도록 알게 하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구별이 어렵습니다. 또 어떤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게 한다면, 이 또한 영분별의 은사와 구별이 어렵지요. 그러므로 실상 성경에서는 편의상 은사를 9가지로 나누어 분류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이러한 은사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역사하고 나타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가령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어디에 무슨 병이 있고 어떤 연유에서 기인했는지는 예언의 은사나 지식의 말씀의 은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알려주려면 예언의 은사나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활용되어야 하며, 직접적으로 신유의 역사를 일으키려면 신유의 은사가 역사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은사는 실상 구분되어져 있지만 한 성령 안에서 필요에 따라 유기적으로 나타나고 역사합니다. 또한 물론 방언과 통변도 심도 있게 다루려면 책 한권도 모자라지만, 예언의 은사 등의 더욱 그러합니다. 특별히 예언의 은사는 잘못 사용되면 사람의 생을 망치게 되는 위험한 칼과 같은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 은사에 대해서 제대로 논하려면 정말 책 한권 분량의 글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예언에 대해서 이해하고 성숙한 예언자로 세워지는 데만도 10 여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다 할 것입니다. 나아가 신유의 은사나 축사를 포함한 능력행함 등에 대한 은사도 마찬가지이지요. 신유의 은사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특별한 질환에 그 은사가 잘 역사하는 등, 마치 의사가 내과, 외과, 소아가, 안과, 치과 등 다양하듯이 그 은사가 세분화 되는 경향도 있고, 축사의 경우에는 때론 정신병과 귀신들림의 구분, 축사의 방법 등 더욱 더 세밀한 지식과 분별력을 요하기 때문에 간단한 글로 논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함의 은사(방언, 방언통역, 예언), 계시의 은사(지혜말씀, 지식말씀, 영분별), 그리고 능력의 은사 (믿음은사, 능력행함, 병고침)등으로 분류하지만, 저는 성령의 세 가지 속성 곧 바람과 불과 빛으로 나누어서 색다르게 설명을 해보고 싶습니다. 바람은 통하는 것이니 언어의 영역에 해당하는 방언과 통변과 예언을 그 범주에 포함시키고, 빛은 계시나 지혜를 말하니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영분별을 포함시키고, 불은 권능을 의미하니 능력행함, 믿음의 은사, 병고침은 불의 은사로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들어가면 예언의 은사는 한편 어떤 사람에 대한 상황과 정황을 알고 권면하거나 예언하는 것이기에 빛의 은사의 범주에도 역시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빛의 은사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언의 은사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그 성향이 비슷하기에 함께 묶어서 논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영분별은 성령 안에서 내적증거 등으로도 분별이 가능하지만 진정한 영분별의 은사는 영안이 열려서 귀신의 실체를 보는 것임으로 다소 따로 구분하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예언을 포함한 빛의 은사에 관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오류도 많고 문제도 많이 일으키지만, 그래도 꼭 필요하고 건전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양날선 검이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꼭 드리고 싶은 말을 적고 넘어가려 합니다. 우리가 예언의 은사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예언이라는 말 때문에 장차 일어나 무슨 일이나 그러한 것들에 대한 계시가 주된 역할이라고 많이들 오해를 하십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예언은 그러한 것들이라기보다는 어떤 사람의 지금의 영적 혹은 자연적 상황을 성령의 도움으로 분별하고 그 사람이 영적 생활에 용기와 힘을 얻도록 안위하고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실상 예언은 이러한 역할이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사랑 안에서 섬기는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예언의 말씀으로 용기와 힘을 붇돋아 주며 서로 영적 임파테이션(전이)를 나눔으로써 함께 세워져가고 함께 성령 안에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미래적인 예언은 가령 “당신은 앞으로 이러저러한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소명적 예언을 예로 든다면, 대부분의 예언은 조건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을 하던지 아니하던지 간에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조건부 예언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수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사람들은 이 조건부를 무시하기에 많은 경우에 성령 안에서 참된 예언이 선포되어도 성취가 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어떤 상황에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일어날 계시록과 같은 예언도 있지만 이는 극히 이례적입니다. 대부분의 미래적 예언은 조건부입니다. 그 조건에서 실패하면 그 예언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이나 나아가 환상이나 꿈이나,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이나 성령의 역사 속에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틀리고 오류가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절대화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오류의 개연성을 마음에 두고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예언자도 다수 틀립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우리의 영적 상태가 늘 맑고 청결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때로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영적 정보가 들어올 때 늘 하나님, 나, 그리고 사단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분별하여야 하는데, 사람인지라 때때로 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예언의 경우에는 반드시 분별이 필요합니다. 또 저는 이것을 사실적 예언과 소망적 예언이라고 차별지어 부르는데, 하나님이 때로는 사실과 다른 소망적 예언을 하게 하시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어떤 일에 대하여 강한 욕망이나 열정을 품고 있을 때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인하여 듣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모든 영적인 것들에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면 따라서 분별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고전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살전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살전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예언이 안위와 권면과 덕을 세우는 경우라면 성경에 반추해서 가려 분별하면, 또한 반드시 분별하여야 하므로 크게 문제될 것도 없지만, 미래적 소명이나 예언 등에서 어설프거나 그릇된 예언자를 만나고 또한 무지하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예언자나 예언의 말씀도 절대로 절대화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100%정확하게 분별하고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때로는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분별을 하였습니다. 렘32:6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렘32: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렘32:8 여호와의 말씀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듯한 어떤 말씀을 들었습니다.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말씀대로 사건이 진행됨 속에서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포함한 모든 은사에는 하나님, 나, 그리고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들이 있고 때로는 우리가 분별에 실패하기 때문에, 반드시 분별하여야 하고 신중하여야 하고 특별히 예언의 경우, 예언자나 예언을 듣는 사람이나 그것을 절대화하여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언자는 조심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예언을 절대시 하는 사람, 또 자꾸만 신령한 척 무당처럼 기묘한 방법과 동작, 그리고 즉흥적으로 예언하는 경우는 조심하여야 합니다. 물론 하니님께서 즉흥적으로 예언할 수도 있지만, 그 즉흥성 속에 자신의 생각이나 사단이 역사할 수도 있습니다. 성숙한 예언자는 그렇게 예언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게 분별되어지는 것들을 먼저 스스로 시간을 두고 삭이며 분별합니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시간에 걸쳐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평범한 말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듯이 그 사람과 어떤 처한 상황을 나누며, 간접적으로 스스로 자신이 분별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예언자이고 성숙한 예언의 태도입니다. 제가 신학을 결정하기 전 어떤 예언자의 도움을 받은 기억이 나는데, 정녕 진정한 예언인지 분별하기 위하여 저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왜 이리 아프고 일이 안 풀리는지 기도를 좀 부탁 드렸습니다. 세상적인 학문을 많이 배우시거나 하신 분은 아니고, 지금 제가 볼 땐 다소 문제의 여지가 있게 예언하신 분이신 듯한데, 저의 문제만큼은 정말 신중하고 감사하게 행해주심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삼일을 금식하며 밤낮으로 주님께 기도해 보셨다더군요. 우리의 영을 맑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분별하게 해 주는데 있어서 금식만큼 유익한 것이 없지요. 그분은 감사하게도 저를 위해서 그런 육체적인 심적인 고난을 감내하면서 기도하시고, 온전히 분별하신 후 마침내 제가 당시 교사였으니“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 앞에 목회자의 길을 서원하셨군요. 그 길을 하나님이 걷길 원하십니다” 아무런 말씀 알려 드리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분별하여 전해주시더군요. 성숙한 예언자는 이렇듯 조심스럽게 분별하여 말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돌아보면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그리고 예언은 일반적으로 전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으로, 부분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분별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고전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방법으로 퍼즐조각 맞추기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많이 설명합니다. 퍼즐조각 맞추기 아시죠?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음성이나 예언이나 꿈이나 환상이나 그 모든 것들에 오류의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에 의존하지 말고 여러 가지 조각을 가져다가 맞추어 보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조각들이 어떤 하나를 향하여 점점 지향하고 가리키는 것을 보게 되고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분별하여서 살펴 알아가야 하는 것인 것입니다. 위험의 요소가 많은 예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지요. 저는 목회자의 길을 선택할 때 성격이 다소 우유부단한 탓도 있지만, 조심스러웠기에 다양한 것들을 조합하여 뜻을 분별하였는데, 환경, 예언, 너무도 선명한 계시적인 꿈, 마음의 깊은 소원, 내적 증거 등 그 모든 것들이 꼭 한 길, 목회자의 길을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분별하는데 2-3년의 시간을 두고 분별하였습니다. 때로는 빨리 결정해야 할 예외적인 사안도 있지만 이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옳게 분별하는 방식입니다. 예언을 포함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가는 합리적인 방법은 퍼즐조각 맞추기 방식이 큰 오류와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임을 먼저 기억하시고, 둘째는 모든 것들 위에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확신을 가진 후에 행하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속에는 누구나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스스로의 인생 누구의 말 한마디에 맡기지 마시고, 퍼즐조각을 맞추어 가듯이 조심스럽게 헤아려 분별해 가시면서, 자신이 성령 안에서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행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나중에 누구 때문에 인생 망쳤다 하소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의 말씀처럼, 직장생활 잘하고 행복한 가정 꾸려나가는 가장한테 “당신은 사명자야, 감당안하면 죽어!”이런 위협식의 무식한 예언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 나고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겪습니까? 또 예언을 빙자하여 물질을 뜯어내고 그러한 것들에 속아서 하소연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특별히 예언에 관해서는 전문 서적 등을 통해서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어 제발 어려움들 당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러한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등빛에 관한 은사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하여 부족하나마 저의 작은 경험을 통해서 나누고 보고 싶습니다. 첫째는 이러한 역사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이나 통변은 내가 하고 싶을 때 언제나 할 수 있지만, 예언이나 여타의 다른 은사들은 내가 하고 싶을 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그 원하시고 나타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야에 특별히 강한 기름부음을 부으시고 그러한 방면으로 소명을 가지고 사역하시길 원하시면, 점점 그 방면의 은사의 성령의 나타남이 빈번하여지고 일상화되어가지만 분명한 것은 방언이나 통변처럼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기억하십시오. 성령께서 나타나 역사해 주시지도 않는데 억지로 하려다가 자신의 생각이나 사단의 생각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예언이나 여타의 은사들의 나타남은 개인에 따라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음성을, 어떤 사람은 환상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내적 증거를 통하여 등 다양합니다. 어떤 객관화된 방식을 통하여 역사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직접사역 가령 교회나 혹은 부흥집회 등을 인도하였다면 현장에서 더욱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겠지만, 귀신 들린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기에 축사는 아직 해 본적이 없고, 일상의 저의 삶 속에서 간간 일어났던 것들을 통하여 조금 나누어 봅니다. 예언 등의 빛의 은사, 어떤 정보나 계시가 오는 통로로는 첫째 직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장로님을 볼 때 성령께서 그냥 가르쳐 알게 하신 것처럼 그냥 알아집니다. 느껴집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큰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거나 사단의 역사가 강하하면, 그런 분을 위해서 기도하다보면 마치 거대한 무슨 세력이 대항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실제적으로 강한 어떤 세력의 부딪쳐 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대 축사 방언이 불을 토하듯 쩌렁쩌렁 성령 안에서 하게 나옵니다. 최근에 그런 분이 한 분 계셨는데 기도로 성령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치 거대한 해일이 덮쳐오듯이 거대한 저항세력이 있는 것이 영으로 감지됩니다. 이런 경우는 그 사람 홀로 그 환경을 헤쳐 나가기 어려운 다른 분들의 간절한 중보가 필요한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배 등에 사람들이 참석하면 그냥 직관으로 사단과 환경에 눌려있는지, 죄에 빠져 혼미한지, 또는 저나 예배에 대하여 일종의 거부감 등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슬픔과 우울의 영에 사로 잡혀 있는지 직관적으로 느껴집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러한 것들이 예배에 성령의 임재와 승리를 방해하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는 애를 먹지요.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 중보기도를 하면서 성령 안으로 들어가면 더 밝히 느껴지고 알아집니다. 둘째로 음성의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한 방법이지요. 음성의 종류도 참 종류가 많은데, 어쨌거나 기도 중 감동하시는 음성이나 아니면 라디에서 들려오듯 그냥 불현듯 일러주시는 말씀이나 등을 통하여 알려 주시기도 하십니다. 셋째로 환상이 있습니다. 환상에도 정확하게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그 종류가 무척 많아 7가지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냥 실제세상을 보는 가운데 함께 보는 열린 환상, 실신하거나 황홀경 속에 들어가 보는 환상, 비몽사몽간에 보는 환상, 영의 심령으로 보는 내적 환상 등 종류가 많습니다. 저는 이 중에 비몽사몽간에 보는 환상과 내적 환상을 경험해 보았는데, 열린 환상이나 황홀경의 환상이나 비몽사몽 간의 환상 등은 대 사도들도 일생에 몇 번 겨우 경험하는 특별한 환상이고,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듯이 영으로 보는 내적인 환상이 보편적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도 실제 귀로 들리는 현실적 음성, 그리고 영으로지만 외부에서 실제로 들려오는 음성 등 다양하지만 그것은 특별한 간간의 경험, 일반적으로 듣는 음성은 우리가 영으로 듣는 내적 음성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특별히 환상의 부분에 열린 기름부음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환상을 자주 보게 되기도 합니다. 환상의 세계를 경험해보면 나름 재미가 있습니다. 정말 어떤 상황에 참 맞는 히트있다고나 할까요? 그런 것들로 성령께서 보여 주십니다. 어제도 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니, 반쪽짜리 벽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의미는 그 교회는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말씀만 있지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없는 교회라는 것이지요. 반쪽짜리 벽돌로 지은 건물이 튼튼하겠습니까? 교회는 말씀과 능력의 두 기둥이 함께 버티고 서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기압도를 이용하여 고기압과 저기압이 마주하는 기압골에 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어려운 환경과 사단의 공격에 있는 환경임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때로는 호수의 물이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의 능력의 운행을 의미하는 게넷사렛 호수임을 알게 하십니다. 때로는 보여주시고 의미를 며칠 뒤에 알려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은 바람이 불어오는데 하얀 종이 한 장이 휘 날리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리 물어도 의미를 가르쳐 주지 않고 저도 모르겠더군요. 그냥 품고만 있었지요. 이틀 인가 뒤에 그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의 부족함을 알게 하시는 것인데, 바람은 성령을 의미고 종이는 저인데, 제가 말씀의 틀이 온전히 세워져서 종이비행기처럼 제대로된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바람을 타고 온전히 상승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환상의 세계도 경험해 보면 나름 신적 지혜가 담긴, 그리고 위트 있는 것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넷째로 감정이나 영적 전이가 있더군요. 한번은 어떤 아픈 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냥 그 사람이 어떻게 아픈지 몸이 아닌 머리로만 느끼게 해 주시더군요. 온 사지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몸으로는 아직 느껴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유의 특별한 기름부임이 있는 분들의 경우에는 몸으로 직접 같이 통증을 느끼기도 하지요. 다른 한 경우는 참 재밌고 다소 놀라웠는데, 그냥 그 사람의 감정이 영적 상태가 제게 덧씌워져서 갑자기 그 사람이 되어서 기도하게 되는 경우가 있더군요. 자다가 일어나서 아무런 느낌없이 중보기도를 성령 안에서 시작하니 갑자기 덧입혀 지는 그 사람의 심령과 영적인 상태, 마치 무속인이 신들리면 때로 애기 목소리나 이상한 영적 상태에 붙들려 말하는 것처럼, 제가 그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더군요. 자다 멍하니 일어나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갑자기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엉엉 울었었지요. 그분은 정말 주님을 생명처럼 갈급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제게 덧입혀져서 제가 대신해서 그 마음을 안고 기도하게 하시더군요. 그러한 영적 전이가 감정 전이로 어떤 사람의 마음과 상태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통로로는 꿈도 있을 것이고 천사의 현현이나 주님의 나타나심 등 다양한 것도 있겠지만, 한 가지 주된 통로는 역시 통변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통변이 임하면 예언의 은사가 더불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방언으로 기도하면 통변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정보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끝으로 다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러한 경험들 역시 그 속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내 생각이 끼어들 간 경우를 저도 경험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예언자들도 역시 같은 실수의 경험들을 많이 하였더군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음성, 예언, 꿈, 환상 등 모든 곳에는 오류의 개연성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을 위해서 기도하니 역시 영전 전이 현상이 일어나서 제가 막 짜증이 나는데, 그래서 전화해서 실제로 물어보았습니다. 요즘 짜증을 많이 내었느냐구요? 그런데 아니라더군요. 혼자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류의 현상이었을 개연성도 있고, 제가 알고 있는 얼마 전에 그 분이 어떤 일로 마음에 다소 그러한 감정을 품었던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요즘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일상생활에서 간간히 하게 되는 짜증, 그러한 부분을 지적해 주심으로서 더 성숙한 단계로 이끄시려는 역사였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어떤 한 은사의 분야에서 성숙한 단계에 이르려면 십수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지요. 저도 그냥 그런저런 경험을 통해서 때로는 실수와 오류도 해가면서 배워가는 것이지요. 더불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글로 인하여 저를 무슨 신령하거나 대단한 사람으로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요.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성령께서 나타나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것도 저는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역과 현장에서 사람들을 많이 다루어보지 않아서 경험도 적도 미약하며 많이 부족한 사람일 뿐입니다. 적게라도 성령의 나타나심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주님께 엎드려 모든 영광 돌릴 뿐이며 떨리는 마음으로 더욱 주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아직 숙련되었다 생각하지 않기에 가령 어떤 사람을 향한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이나 권면을 성령 안에서 받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을 권면해 드리기도 하지만, 많은 것들은 그냥 혼자 품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다보면 그 사람의 문제가 성령 안에서 분별되기도 하지만 그냥 품고 기도만 합니다. 그리고 전달의 문제도 잘못 전하면 사람들이 상처를 받거나 적대감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아직은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 숙련되지 않은 사람, 그냥 중보기도해 주며 가슴에 묻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냥 성령 받으면 모든 것이 다 쉽고 완전무결하고 그런 줄로 알았는데, 영적인 세계도 너무도 복잡하고 알아야 할 것들이 많으며 혼미하고 분별이 필요한 세계, 왜 수년 전에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고치는 의사도 6년 이상을 공부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다루는 네가 아니냐? 깊이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라”는 말씀을 불현듯 예배말미에 말씀하셨는지 이제야 가슴으로 이해를 합니다. 정말 목회자는 물론 성도님들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검증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 등을 통하여 많이 배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제대로 된 멘토를 만나기도 어렵고 결국은 스스로 경험으로 체득하고 분별해 가야 하는 정말 배우기 어렵고 힘든 고독한 공과가 영적인 것들에 관한 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어제 밤에 기도하면서 이 글을 위해서 주님께 더불어 주실 말씀을 간구하는 가운데 주신 말씀을 나누면서 글을 마름합니다. 하나님은 예언과 빛들에 관한 은사의 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다시 한번 알기 원하셨습니다. 성경이 있는데 왜 하나님의 이런 예언이나 계시가 필요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모든 것들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한편은 성경이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 대하여 해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구약 성경 곳곳에 예언이 되어 있지만, 정작 그분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요. 실상 예언은 다소 모호성을 가지고 선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눈으로 보니 그 예언이 예수님이 대한 예언으로 알게 되지만, 아직도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예언의 모호성과 우리의 아둔함 때문이지요. 성경에 누구보다도 해박했던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지 못했지요. 그는 비로소 다메섹 사건의 계시적 사건 앞에서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진리를 보게 되었지요.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이 살아 생전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것이고, 또 승천하시면서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선민사상, 곧 유대인만이 구속받을 민족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하나님은 환상의 계시로 바른 깨달음을 주셨지요.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보아도 때로 제대로 계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예언, 환상, 계시 등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편은 성경이 모든 구체적인 개개인의 현실적인 상황에 대하여 해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요.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마지막으로 주님은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인생은 복되다”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름같이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아무쪼록 늘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해 봅니다. 아멘! 샬롬 ! | |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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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혹 말씀을 가져가신다면 불편하시면 아래링크는 삭제하시더라도 글쓴이는 남겨주셔서 저작권은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늘 평안하시고 행복하십시요 / 네이버 카페원을 위해서 배경음악을 위로 올렸습니다. 네이버 카페원님들은 플레이 버튼을 누르시고 읽으시면 더욱 은혜가 되실 것입니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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