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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능력] 방언, 그 모든 능력의 통로

초록 등불 2011. 12. 14. 17:17

 

  [은사 능력] 방언, 그 모든 능력의 통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거룩하게 하옵소서, 겸손하게 하옵소서”제가 기도 드릴 때 모든 것들에 앞서 구하는 것들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오늘 나누고 싶은 말씀과 달리 이 말씀을 앞서 나누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다고 은사와 능력을 추구하다보면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형상을 덧입는 영성을 잊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본질은 은사나 능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품을 덧입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에 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늘 잊지 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글은 검증된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저의 주관적인 경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적인 일들은 너무도 다양하고 각 사람마다 역사하시는 방법이 달라서 어떤 획일화된 방법이나 원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각 사람을 통하여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지금은 다소 주관적인 경험일 개연성을 배제하지 않고 말씀을 나눕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기억이 나지만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성령세례와 함께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다소의 강력함의 차이는 있겠지만 성령세례를 처음으로 받고 방언을 말하곤 하게 될 때는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신도 나지요. 저도 그런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방언에 대한 일반적인 저의 경험과 다른 분들의 경험을 살펴보면 처음 방언이 임하여 아주 단순한 말이라기 하기 어려운 단순한 음이나 음절 등을 반복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소 유창한 방언으로 바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 초기에는 변화가 무쌍하게 반복적으로 방언이 바뀌었습니다. 바뀌고 바뀌고 바뀌고 하더니 어느 순간에 이르니 안정이 되고 고정적인 방언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분들의 경험과 이론을 나누지 못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이러한 흐름은 조금은 일반적인 흐름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경우라면 조금은 더 주기적으로 바뀌어 가는 새 방언을 말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지만 저의 경우는 성령세례를 받고, 내가 아닌 성령께서 주체가 되어서 강권적으로 역사하는 대략의 시간인 3-4년을 아무런 영적 지식이나 멘토가 없이 보내는 중학교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에 대해서, 또 이끌어 주시는 분이 아무도 없어서 그냥 보낸 조금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기간이 참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익히는 중요한 시기인데 말입니다.


그 시기가 지나면 성령의 뜨겁던 열정이나 이끄심이 다소 식어가고, 이제는 성령께서 주체가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서 성령의 역사를 이끌어야 하는 주객이 바뀌는 시기가 도래하는데, 저는 이 시기가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시기여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도 다소 식고 그냥 그렇게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 방언이 다시 임할 정도의 뜨거운 기도생활을 지속적으로 한 시간이 다소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간간 기도에 애쓰는 시간도 있곤 하였지만,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꾸준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은 목회자로 헌신한 어떤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과 통변 등은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방언과 통변의 은사는 유지되고 있었고, 저는 더 깊은 방언의 세계나 또 영적 생활에서 방언의 진정한 능력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수준의 방언과 통변의 은사를 통해서도 영적인 수많은 말씀들을 성령의 감동 안에서 쏟아내곤 하였지요. 그리고 이것이 그냥 방언의 한계인 줄 알았습니다. 멘토가 없어서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진정한 방언의 능력을 알게 된 것은 다르고 깊은 새 방언이 임한 후였습니다.


영성의 글이나 방언의 현상에 대하여 다룬 글들을 읽어보니, 방언에도 차원이 있는데 초기에 주어지는 방언은 예수 그리스로를 믿고 성령세례를 받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세차원의 방언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고 하는군요.


쉽게 설명 드리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성령세례를 받으면 특별한 신유의 은사의 기름부음이 없어도, 때때로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낫지요. 이런 역사는 은사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의 권세차원에서 나오는 능력이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초기에 주어지는 방언은 진정한 의미에서 은사차원의 방언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에 주어지는 권세차원의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현상들은 정확히 판단하고 진단하기는 어려우나 기도원 등에 참여해서 방언하시는 분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방언이 이 권세차원의 방언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이 권세 차원이 아닌 진정한 은사로서의 기름부음은 받은 방언이 있습니다. 저는 이 방언을 받고서야 진정한 방언의 능력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기도에 몹시 열중하였고 나름 뜨겁게 주님을 섬겼었는데, 대략 하루에 두어 시간 정도씩 한 2 여년 가까운 시간을 뜨겁게 기도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그냥 자리에 누워서 쉬는데 새 방언이 임하더군요.


아주 오래 전 방언도 받아 보았고, 또 바뀌어 가는 많은 방언도 경험하였지만, 이 은사적인 기름 부으심의 방언이 임하니,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선 방언의 폭이 넓혀져 거의 완전한 어떤 나라의 말처럼 되었고, 그리고 기도하면서 느껴지는 영적 감흥이나 능력이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방언의 통역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폭이 놀랍게 넓혀졌습니다.


제게는 은사 능력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영적인 삶의 시간표에서 한 이정표가 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권세 차원의 방언에서 더 간절히 사모함으로써 은사차원의 더 깊은 방언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권세차원의 단순하고 지루한 방언을 하시는 분들은 별스런 의미나 능력을 느끼지 못하여 중도에 그만두거나 때로는 소멸하여 버리시기도 하시는데, 은사 능력적인 영적인 부분에서 더 깊은 기름 부으심을 받으려면 그 비결은, 주신 아주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며 작은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작은 것으로 충성할 때 주님은 더 큰 것으로 맡겨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그리고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축복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열성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다소 의지가 약합니다. 그리 강한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어떤 배려였는지는 모르지만, 영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욕심도 많았고 의지도 강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에도 집회를 마치고 기도하는데 눈을 살짝 떠 보고 아직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도 끝내 버티어서 많은 경우 가장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 저였습니다. 의지가 약한데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을 보면 아마도 주님의 은혜 같습니다.


어쨌거나 영적인 부분에서 축복을 받으려면 세상일도 그러하듯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여야 하고, 또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통변도 그 깊이의 차이가 있어서 권세 차원이 아닌 은사차원의 능력 통변이 임하여 다른 사람의 통변이 가능하게 되고, 그 기도소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기도 하지요. 대부분 자신의 수준에서 통변을 하지만 진정한 은사차원의 능력 통변을 하시는 분은 흔하지 않지요.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세 차원의 방언이 있고 은사 차원의 능력 방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방언의 영적인 맛이랄까, 능력이랄까 그러한 부분을 누리시려면 반드시 진정한 은사차원의 능력 방언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저의 경험이자, 영적인 경험들을 기록한 경건한 책들을 살펴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때까지 인내하시면서 진정한 은사 차원의 능력 방언이 임하도록 사모해 보십시요.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는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가 주어지는 것은 곧 소명이 있음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 일에 대한 소명이 있기에 그 은사를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구하고 사모하시기는 하되, 주님과 아니 주심의 주권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을 향한 직임과 소임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구해도 어떤 부분은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대신에 자신의 직임과 소임에 맞는 기름 부으심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 본말이 전도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소명과 부르심의 직임을 알아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각각의 지체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안에서 해야 하는 일을 발견하고 자신의 고유한 것을 사모하고 개발해 가야 하는데,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살펴보지 않고 은사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려해 보이는 은사 그 자체에만 집착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부분으로 부르심과 소명을 받은 분들은 그 부분에 은사와 능력 차원의 기름부음이 임하지 모든 부분에서 깊은 부르심이 임하지는 않겠지요.


손의 역할인 지체에게는 손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기름 부으심이 임하여 발의 지체에게는 발의 기능에 필요한 강한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입니다.


재정지기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경제적인 운영능력과 관리 능력에 기름 부으심이 임하여 장사나 사업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복음전파에 필요한 재정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경제활동을 하기도 바쁜데 하나님께서 신유나 축사 등의 강력한 기름부음을 부어서 그런 일까지 맡기시지는 않겠지요.


어떤 사람은 사랑과 섬김으로서의 기름 부으심을 받습니다. 이런 분들은 앉아서 오래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나가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섬기면 한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그것이 자신의 소임이요, 기름 부으심을 받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보다 말씀이 그렇게 읽으면 재미있고 성령 안에서 조명이 잘 됩니다. 이런 분은 말씀 연구에 관하여 기름 부으심이 깊이 임한 것입니다. 찬양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은 찬양할 때 너무도 기쁘고 기름 부으심이 강력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지체가 아울러 아름답고 조화로운 한 몸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각각의 소임과 부르심이 다르고 그래서 기름 부으심의 강한 영역이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따라 더 많은 주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기도는 하시되, 어떤 은사자체에 집착하셔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과 직임을 알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은사와 능력도 사모는 하시되 그 자체나 그것을 통하여 느끼는 즐거움이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맡겨주신 사명이 목적이 되고 주님의 뜻과 주님의 의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아가려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로의 길을 걷게 되면 어떤 은사자체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과 직임에 충성하게 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가게 되며 그 안에서 한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은사능력을 구하는 목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어떤 영적인 즐거움이나 자기 만족이나 때로는 과시욕이 그 밑바탕의 마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혼하면 한 삼년은 신혼처럼 달콤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 세월이 지나면 권태기가 찾아오고 시들해지고, 이제는 달아오르는 뜨거운 감정이 아닌 차분해진 마음으로 서로 한 몸이라는 말씀의 실천을 위하여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시기가 이르지요.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잘 감내하지 못하면 갈라서게 되는 경우도 흔지 않지요.


은사 능력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유의 은사가 임하여 기도하면 병이 나으면 처음에는 감격이 되고 감사도 되고 하늘을 날듯이 기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감격이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자꾸만 자신을 이런저런 극한의 병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힘들어지지 시작하지요. 극단적인 예로 가장 강력한 체험이 영적 들림의 체험을 입어서 하나님의 보좌를 실제로 보고 그룹과 천사들과 하늘의 영광을 본다고 하여도 그 감격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은사와 능력의 잠시의 감격 뒤에는 땀 흘리고 피 흘려야 하는 사명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은사는 우리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군인에게 총이 주어짐은 전쟁 수행을 위해서 주어지듯이 숱한 사명의 고난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기회가 오면 말씀을 드리겠지만, 우리가 대부분 능력과 영광만을 보고 나도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나 예언자의 삶, 신약의 사도들의 삶, 바울의 삶 이런 모든 삶들은 어쩌면 은사와 능력의 강력한 임재는 곧 고난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과 임함이라고 공식화하여도 좋을 만큼 대부분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교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와 능력은 자기만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잠시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됨으로 일시적인 만족과 기쁨은 있겠지만, 은사와 능력은 곧 사명인 것입니다.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깊은 부르심을 주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먼저 극렬한 풀무불의 고난과 고난의 숱한 가시밭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실 은사와 능력으로 감내해야 할 사명의 십자가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기에 그것을 감내할 인내력과 내적 능력을 길러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치유와 축사는 오랜 사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하여 잘못 사역하면 자신이 그 병을 안게 되거나 사단의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더군요. 이처럼 은사와 능력의 세계는 결코 자기만족이나 과시의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며 그러한 삶을 살라고 요청하며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모든 신앙의 영역의 섬김이 다 그러하겠지만요.


저도 요즘 덧입혀 주신 은사와 능력으로 예언적 중보상담을 해보면 정말 기막힌 사연들로 찾아오십니다. 하루 이틀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이 맞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잠시 그 문제와 상처 입은 영혼을 안고 함께 신음하여야 합니다. 때로는 사단이 공격해 옴을 수시로 영으로 지각합니다. 십자가입니다. 눈물입니다. 고난입니다.


궁극적으로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광을 안겨주시지만 성경을 살펴보건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 중보의 십자가, 제사장의 삶이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는 일사각오의 일념이 없으면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특별히 은사능력의 세계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더 중요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본래 나누고 싶던 것에서 한참 벗어났군요.


어쨌거나 방언의 은사를 경험해보니 권세차원의 방언이 있고, 그리고 진정한 은사차원의 기름부으심인 능력 차원의 방언이 있더군요. 그리고 이 은사차원의 방언이 임하였을 때 비로소 진정한 방언의 능력과 모든 은사 능력의 세계에서의 방언의 중요성을 알게 되더군요.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이것은 획일화된 어떤 공식이 아니고, 다양한 영적 경험자분들을 모아서 설문조사를 하기도 어려운 법, 저의 경험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성이 많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외적으로 그런 능력 차원의 방언이 임하지 않아도 권세차원의 수준에서도 다른 은사들이 깊게 열리신 분들도 있으시겠지요. 주님의 역사는 획일화하지 않고 다양하니까요.


그러나 여러 분들의 간증들과 역사를 살펴볼 때 권세차원이던지 능력 차원이던지 방언의 은사의 열림이 없이 신령한 계열의 더 깊은 기름 부으심을 받기는 힘이 듭니다. 모든 신령한 계열, 곧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9가지 계열의 신령한 은사들은 모두 방언을 그 통로로 하여 임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방언의 은사의 열림이 없이 깊은 은사 능력의 세계로 들어가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기본적으로는 모두 권세 차원의 방언의 은사는 받으시는 것이 영적인 능력을 누리는데 필수적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에게 방언의 은사가 열리시길 기원해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각 은사의 깊이와 기름 부으심에는 끝이 없는 가 봅니다. 이 차원을 넘어서니 저의 경우는 다양한 방언을 말하게 되는 단계의 또 기름 부으심이 있더군요.


평소의 기도를 드릴 때 하는 일반적인 방언 그 위에 중보나 다양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 기도의 내용이나 대상에 따라서 방언이 수시로 바뀌는 새로운 방언의 세계가 열리더군요.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위의 성경 본문을 보면 “각종 방언 말함을”이라는 본문이 나오는데, 이것이 여러 사람들이 다른 각각의 방언을 말씀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방언 곧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인지 원어 적으로 깊이 고찰하기 현재로선 어려워 살펴보지 못했지만, 표현적으로 각종 방언을 말하게 되는 단계가 또 있더군요. 일단 각종 방언을 말하는 단계로 표현을 해 보겠습니다.


이 단계의 방언은 유창한 평소의 방언이 아닌 다소 원초적인 초기 방언처럼 나옵니다. 그런데 그 방언 가운데 계시와 능력이 많이 나타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방언의 단계 즈음에 이르면 아마도 몇 가지 은사가 나름 깊이 있게 기름부음을 받고 나타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의 경험상 그러하더군요. 예외도 있겠지요.


곧 각종 방언을 말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방언과 통변의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은사와 능력 이외에 다소 차원이 높은 은사와 능력들이 열리고 덧입혀 진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언,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영분별의 은사, 신유와 축사 등 적어도 몇 가지 은사들이 열려진 것을 스스로 경험하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점 방언 한 가지만 두고 경험해보아도 기름 부으심의 깊이가 더 해 감을 경험해 가면서 저는 과연 방언의 깊이가 여기가 끝일까, “아닐거야, 언제나 새롭고 더 깊은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에서도 더 깊은 방언의 기름 부으심을 또 주실거야”라는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또 사모하며 천국을 침노해 갑니다.


실제 지구상에 실존하는 열방의 언어를 말씀하게 해 주실까? 원초적인 각종 방언의 말함이 아닌 유창한 하늘나라의 천사의 말들을 수도 없이 하게 해 주실까? 방언의 세계를 경험한지 어언 40여년, 하지만 너무도 깊고 넓고 헤아릴 수 없는 영적인 세계와 그 역사들 그냥 이제는 늘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사모하며 주신 사명 최선을 다하려 애쓰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앞에서도 거듭 말씀 드렸지만, 은사는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님을 기억하며, 그러나 한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다양한 은사 능력의 필요성도 있는터,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바탕 위에서 더욱 위엣 것을 사모하며 더 깊고 넓은 기름부으심 가운데 맡겨진 우리의 각 사명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면 좋겠습니다.


“주님, 사랑하게 하옵소서. 겸손하게 하옵소서.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옵소서. 섬기며 살게 하옵소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할렐루야!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출처 및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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