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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정한 산 새 두 마리

초록 등불 2011. 12. 27. 21:50

 

  [영성의 글] 정한 산 새 두 마리

 

맑은 시냇물이 새르르 흐르는 곳에서 한 마리 정한 산 새가 가엾게도 피를 뚝뚝 질그릇에 흘리며 가엽게도 죽어갑니다. 그리고 또 한 마리 산 새는 백향목과 함께 홍색실로 묶어진 우슬초 묶음으로 앞서 죽은 산 새의 피를 몸에 뿌림을 받고는 포르르 생명을 얻어서 날아갑니다.


레위기 14장을 보면 문둥병자가 병이 나았을 경우 정결하게 되는 규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곧 문둥병자가 병이 나았으면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그 환처를 살펴보고 병이 나았으면, 정한 산 새 두 마리를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한 다음,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위에서 잡고, 그리고 잡은 그 새의 피를 찍어서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은 사람에게 입곱번을 뿌려서 정하다 하고 살아있는 산 새는 들에 놓아 살려줍니다.


그 후에는 그는 정한 기간 동안 정혜진 규례를 행하고 진 밖에 있다가 8일이 되는 날,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속건제를 비롯한 예물을 드리고,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와 우편 귓부리에 피와 기름을 바르고, 여호와 앞에도 기름을 뿌리고, 머리에도 기름을 발리우는 과정 등을 통하여 완전하게 정결하게 되는 의식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비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문둥병이 든 상태는 우리 인간의 타락한 영적 상태를 비유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은 모형과 외식이요, 신약은 내용과 내면임을 생각해본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타락한 인간의 본성의 내면은 마치 문둥병이 들어서 보기 흉한 모습으로 인간의 영적인 상태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로마서 1장 후반부에서 잘 나오지요.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둘째 정한 산 새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그 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산 새는 죄와 허물에서 사함을 얻은 우리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우슬초는 이스라엘 제사의 정결 의식 때 사용되었는데, 참회와 겸손의 상징이며 세례의 상징입니다.


출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드렸을 때 신 포도주를 적신 해융(솜 같은 해면동물이에요)을 매달았던 식물입니다. 우슬초는 향기가 나는 박하과의 식물로 이스라엘의 돌벽에서 흔히 자라던 풀입니다. 우슬초의 잎사귀에는 털이 나 있는데, 그 털에 액체가 잘 들러붙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문둥병이 나은 사람에게 깨끗해졌다는 표시로 물과 피를 뿌릴 때(레 14:49, 51)나 출애굽 당시 유월절의 양의 피를 문에 바를 때(요 19:29) 우슬초를 이용했습니다. 이처럼 우슬초는 몸과 마음이 찢기고 상처받은 자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 중에 쓰였습니다.


반면에 백향목은 줄기가 곧도 높아 대략 40여 미터에 이르는 나무인데, 재질이 뛰어나고 내구성이 강하여 궁정 등을 짓는데 건축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귀한 건축재료로 사용이 되었고 신전등의 건축에도 이 나무가 사용되었습니다. 존귀함의 상징이지요.


그러므로 홍색실로 묶인 백향목과 우슬초의 피 뿌리는 도구는 장차 참 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심과 낮아지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곧 신성과 인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구약의 모든 것들과 특별히 제사 예식을 철저하게 참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되어 있고,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맥이 통하는 흐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정한 산 새 되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모퉁이돌처럼 초라하게 죽임을 당하신 그 피로 말미암아, 그 피뿌림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포르르 생기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흐르는 물 위에서 행하여졌던 이 과정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거듭남과 정함에 유비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물세례의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마리 산 새의 유비는 신약성경에서 십자가 형을 앞에 두고서 법정에 섰던 예수님과 바나바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정한 산 새로 죽임을 당한 새는 예수 그리스시요,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한 마리 새는 바나바요, 곧 우리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인 것입니다.


셋째 예식의 절차 가운데 속죄제와 번제의 과정을 살펴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일차적으로 정결하게 된 문둥병자는 제 7일, 곧 온전한 날짜의 수를 진 밖에서 지내다가 8일 째 되는 날에 속건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 소제 등을 통하여 온전하게 정결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와 우편 귓부리에 피와 기름을 바르고, 여호와 앞에도 기름을 뿌리고, 머리에도 기름을 발리우는 과정 등을 통하여 완전하게 정결하게 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다른 곳에서 두 마리 새가 죽임을 당하고 제물로 드려지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이 있는데, 레위기 5장을 보면 사람이 어떤 허물을 범하였을 때 그것에서 사함을 얻고 정결케 되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경우는 산비둘기 둘이나 집 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가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고, 하나는 번제물로 삼아 드립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정함을 얻게 됩니다.


레5:7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문둥병자가 정결케 되는 제 2의식에서도 속건죄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 소제 등을 통하여 정결하게 되는데, 레위기 7장에서도 두 마리의 새 중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드리고 한 마리는 번제물로 드리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되어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무 제사인 반면에,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은 하나님께 충성과 감사를 표하는 자원제사인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정결케 되는 과정을 신약의 영적인 의미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문둥병자가 정결케 되는 과정은 1차적으로 정한 산 새의 한 마리가 흐르는 물 위에서 피를 흘려서 그 피 뿌림을 받은 다른 한 마리 새는 생명을 얻습니다.


이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약성경의 영적인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물세례를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2차 규례에서 그는 다시 한번 속건죄를 드리며 그 피를 오른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와 발 엄지에 피를 바르고, 기름을 바르고, 여호와 앞에 기름을 뿌리고, 다시 머리에 기름을 발리우는 과정을 통하여 온전하게 정결케 됩니다.


이 과정은 영적인 유비로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서 둘째 세례 곧 진정한 참 세례인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피를 오른편 귓부리와 손과 발의 엄지에 바르는 것의 의미는 그 피로 말미암아 정하게 되었고 생명을 얻었으니 온전히 그 피를 흘린 자를 위하여 정결하게 살겠다는 헌신의 의미입니다.


신약적인 의미로 살펴보면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깨닫고 철저하게 그 피를 몸에 바르며 온전히 회개하고 남은 생 주님을 위하여 살겠는 헌신의 표현이지요.


그 온전한 헌신의 결단 위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임합니다. 그 피 위에 다시금 기름을 오른쪽 귓불과 엄지와 손과 발에 발라줌이 이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상징하는 이 과정이 끝나면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번제와 소제 등의 충성과 헌신을 의미하는 제사를 드립니다.


다른 본문에서도 허물을 사함을 얻었을 경우 한 마리 새는 의무제인 속죄제물로 드리는 대신 한 마리는 자원제인 번제로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신약적인 성경적 영적 의미로 해석하면, 그리스도인이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1차 예식인 물세례를 거치고 나서, 2차적으로 참 세례인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유비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런데 문둥병자의 의식의 과정을 보면 먼저 기름발리움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번제와 소제 등의 자원제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는 그냥 의지적인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과정을 통하여 구원을 받지만, 어떤 계기를 통하여 자신이 정말 얼마나 죄인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깊이 자각하게 되고, 처절하게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자신의 전 생을 온전히 헌신하고 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될 때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과정 이후에 번제와 소제의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의 순서가 들어 있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차 규례에서나, 또 다른 곳에서 두 마리의 비둘기 남은 한 마리에 행하는 번제, 소제 등을 드릴 때 쓰인 불은, 신약적 의미로 보면 성령의 불인 것입니다.


1차 규례에서 정한 산 새로 가엽게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2차 규례에서 흠없는 어린 양으로 나를 위해서 죄없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자각하고 정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의 의지를 가질 때에, 한 마리 남은 비둘기 곧 우리에게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이제는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한 산 새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정말 그 사실을 가슴으로 깨닫고 죽임 당하신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처절하게 회개하며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과정 중에서 우리는 성령의 세례, 곧 우리 자신을 완전히 태워 주님께 드리는 성령의 불로 말미암은 번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성령의 불로 말미암은 번제, 곧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주님 앞에서 낱낱이 다 태워버리고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만이 남게 될 때에, 우리의 전 생을 산제사로, 그리고 향기로운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물과 피로 씻기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성령과 불로 다시금 태워지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결의식이 완성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 것입니다.


넷째 이러한 한 생명이 죽임을 당하므로 한 생명이 구원을 얻는 중보의 원리는 이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중보의 원리는 이상치상(以傷治傷)의 원리입니다.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므로 다른 사람이 살고, 한 사람이 상처를 입으므로 다른 사람의 상처가 치료 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상하고 징계를 받고 찔리고 채찍에 맞고 죽임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은 다른 한 마리 산 새가 되었습니다. 문둥병에서 온전하게 정결하게 된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덧입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푸신 까닭은, 이제는 우리가 당신이 되어서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상처로써 상처를 치유하는 십자가 중보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이어받아, 상처와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상처와 생명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중보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영성의 삶인 것입니다.


다섯 째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이 먼저 정결한 새가 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참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인류의 온 죄를 담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한 산 새로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정한 산 새가 되지 못하면 이런 중보자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정한 산 새, 곧 물과 피와 성령으로 참 거듭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정한 산 새로 빚으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일이 영적으로는 성령의 불세례와 기름부으심이요, 육신적으로보면 시련과 고난의 혹독한 연단입니다.

중보의 원리는 이상치상(以傷治傷)의 원리,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러한 세상을 품을 수 없기에 혹독한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하여 도무지 스스로는 정결케 되기 어렵기 때문에 혹독한 고난의 풀부물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정금같이 빚어시는 것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시고 고난의 불로 태우시고 우리의 인격과 성품을 성숙하게 빚으십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던 사람이 세상과 이웃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나이다. 용서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성령의 성품, 사랑의 당신의 성품으로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요.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모든 일은 모든 고난은 한편 생명이요, 도리어 모든 부요함은 한편 사망입니다. 솔로몬이 여실히 그것을 증명하지요.

구원에는 두 가지 차원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물세례가 표현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초보적으로 거듭나서 영적 구원을 이룩함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처절하도록 무서운 사랑을 깨닫고 그 십자가 앞에서 산산히 자신은 부서져서 온전히 삶의 헌신을 결단하고 그 과정에서 하늘의 진정한 불로 태움을 받아서 자신을 온전히 번제물로 드릴 때의 누리는 구원인 영광 차원의 구원입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 목사님의 오직 한 가지 갈망은 언제나 이것 이였지요. 그분은 휼륭한 사역을 치루어온 노년에도 친구의 집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주님, 제게서 주님 이외에 모든 것은 모두 불태워 주십시요. 오직 하늘을 향한, 당신을 향한 거룩한 불꽃만 남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애소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영광차원의 구원이 임합니다. 마음에 하늘에 영광의 빛이 임하고 심령의 지성소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자욱합니다. 하늘에 살고 있는 것인지 땅에 사는 것인지, 땅에 살던지 하늘로 부르심을 받던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심령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고후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고후6: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고후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고후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그 옛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그 산에 친히 올라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모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는 산에서 하산 하였을 때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 얼굴에서 수건으로 가려야 할 만큼 광채가 났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서 그토록 얼굴에서 광채가 났는데, 우리가 누리는 성령 안에서 영광의 직분의 광채가 더욱 영광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합니다.


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시내산에 오늘날에도 오르기만 한다면, 우리는 모세가 누렸던 이면적 영광의 광채보다 더 찬란한 내면적 영적인 광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가 그 영광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거룩한 자입니다. 그것은 오직 정결한 자입니다. 그것은 오직 공의와 정로를 걷는 사람입니다.


시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여호와의 참된 영광의 광채를 누리는 영광 차원의 삶도, 그리고 정한 산 새로써 세상을 살리는 참 중보자로서의 삶도 결국은 우리의 거룩함과 정결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높은 영광 차원의 더 높은 구원의 시온산을 향하여 더욱 올라가야 합니다. 구원 수준의 회개가 아니라 정결 수준의 철저한 회개와 돌이킴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하늘의 신령한 빛이 언제나 가득하고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의와 진리의 성령의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를 여러 가지 관계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남편과 아내요, 신랑과 신부입니다. 신부와 신랑은 서로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서로를 향한 온전한 사랑입니다. 곧 정결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영적 신부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결한 신부는 하이얀 세마포를 입습니다. 기도하면 가끔 이 세마포를 영으로 보게 하시는데 눈이 부시도록 하얗습니다.


우리가 눈이 부시도록 하이얀 세마포를 입고서 길을 나선다면 때가 묻을까봐 얼마나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쓰이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정결한 신부나, 그 신부가 입는 하얀 세마포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가려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여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계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계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영적으로 깊이 나아가면 갈수록 아래로 떨어지기는 쉬우나, 오르기는 힘이 듭니다. 학교 성적도 초상위권에 머물면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데 떨어지는 것이야 얼마나 쉽겠습니까? 유지하고 오르려면 밤을 새워 공부하고 온 맘과 정성이 공부를 향하여야 하지요.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광 차원의 높은 삶을 살고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려면 하이얀 세마포를 입은 신부처럼, 생각 하나, 말 하나, 행동 하나,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가까이 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장소까지도 영 안에서 가려 행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수정빛 생명수가 가득 흐르게 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닌 신적인 권세와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을 살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여야 하겠습니까? 궁극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성령의 불로 태워없애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남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 순간에 죽임을 당하여 드리는 제사가 아닌, 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새들을 살리는 육신의 피를 흘리는 중보자의 삶,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자신에게 채우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삶은 한편 영광의 삶이요, 한편 고난의 삶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영은 한 없는 영광과 빛을 누리지만, 육체 안에서는 한없는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져야하는 피흘림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이러한 정한 삶, 영광의 삶, 거룩한 삶, 정결한 삶만이, 정한 산 새로써 세상과 이웃을 구원할 수 있는 중보자의 삶인 것입니다. 자신이 정결하지 못한데 어떻게 세상을 맑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이 중보자의 요건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생수가 강같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1차 시내산 영성집회 시간에 나눈 것인데, 예배 말미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두 가지를 요청하셨습니다. 그것은 거룩함과 담대함이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맑고 그윽하고 창일한 강이 흘러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주변으로 포릇한 연둣빛 새싹들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이 환상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성령의 생수가 강처럼 창일하게 흘러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가 본 성소에서 나온 물이 창일하게 흘러가듯이, 우리가 바로 그 성령의 생수의 강이 되어서 죽은 사해와 같은 세상에 새싹이 움트게 하고 생명을 전해주는 중보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정한 산 새로써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죄 없으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남은 십자가 참된 중보자의 삶을 가려면, 우리도 정한 산 새가 되어야 합니다.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서 언제나 의와 거룩함과 정결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수정빛 성령의 맑은 생수가 창일한 강처럼 흘러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샬롬!


레1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14:2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레14:3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레14:4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레14:5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레14:6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레14:7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레14: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 일을 거할 것이요

레14:9 칠 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레14:10 제 팔 일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둘과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또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삼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레14:11 정결케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레14:12 어린 숫양 하나를 취하여 기름 한 록과 아울러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레14:13 그 어린 숫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 희생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일례로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레14:14 제사장은 그 속건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바를 것이요

레14:15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좌편 손바닥에 따르고

레14:16 우편 손가락으로 좌편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레14:17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는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 희생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레14:18 오히려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여호와 앞에서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레14:19 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을 인하여 정결함을 받으려는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

레14:20 제사장은 그 번제와 소제를 단에 드려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정결하리라

 <출처 및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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