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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중보, 그 아름다운 십자가

초록 등불 2011. 12. 23. 03:29

 

  [영성의 글] 중보, 그 아름다운 십자가

 

언제나 하나님 사랑이 우리 마음의 중심이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거룩하게 하소서. 겸손하게 하소서. 용서하게 하소서. 섬기게 하소서. 아멘!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이토록 마음이 아팠던 적은 기억에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프고 답답하며 갈급하여서 도무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주님 앞에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서 마냥 울었습니다.


돌아보면 짧지 않은 생, 신앙생활의 연륜만 대략 40여년이 되는 것 같습니다. 10대 초등학교 시절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니 성령을 받고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살아온 세월이 대략 40 여년 가까운 세월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세월 동안에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 가지 영적인 체험도 하고 나름 신앙과 인생에 대하여 깨달은 바도 적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지난 일 여년 남짓한 시간 동안에 더 많은 영적인 것들을 경험하고 신앙과 생에 대하여 깨달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수십 년을 육신적 질고와 정신적 어려움을 당하며 살아왔지만, 작년 한 해 동안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그 세월은 도리어 행복하게만 느껴집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저를 다니엘서에 나옴직한 칠 배나 뜨거운 고난의 풀무불에 던져 넣어셨습니다.


그 속에서 홀로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릅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모든 생의 의미를 상실한 채 동공 없는 사람마냥 멍하니 보낸 시간도 적지 않았고, 그리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마냥 얼마나 애타게 주님을 찾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터널을 조금씩 벗어나오면서, 그 무저갱 같았던 흑암의 시간이 도리어 강인한 생명력이 되고, 흐트러진 나를 추스르게 하는 시간이 되고, 더불어 주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덧입혀 주시는 것을 보면서,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지만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되었고, 고난의 생명 됨을 가슴으로 조금씩 더 깊이 알아갑니다.


그러한 고난의 시간과 주님께서 경험하게 하신 여러 가지 영적 현상 가운데서 제가 가장 깊이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중보”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리시고 “다 이루셨다”는 말씀대로, 모든 죄의 대가가 지불되었고 사단의 권세가 깨어졌고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새롭게 가슴으로 깨달은 것은 그것은 영적인 세계의 법칙 안에서 합법적으로 죄의 권세, 곧 죄를 빌미로 우리를 볼모로 잡고 있는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신 법적인 모든 근거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에게 남은 고난의 십자가가 있음을 정말 새롭게 가슴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슴으로 절실하게 깨달게 된 계기는 중보기도를 드리다가 주님께서 그 사람의 심령을 덧입혀 주시는, 일종의 영적 전이랄까 그러한 것을 경험하면서입니다. 이런 경험은 쉽지 않은 것이기에 아마 경험해 보신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임하면 진정한 중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기도요청을 받기도 하고 요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시간에 그 사람의 이름과 사연을 넣어서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가장 우리 스스로, 곧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문제만큼 애절하게 기도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극도의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신 연후에 각종 영적인 은사와 현상들을 덧입혀 주시고 경험하게 하시면서, 진정한 중보가 무엇인지 영적 전이를 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영적 전이로 그 사람의 심령이 그대로 입혀지면, 내가 아닌 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기도도 “주님 그 사람을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나게 역사하옵소서”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되어서 “주님, 나로 하여금 이 문제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표현을 하게 됩니다.


방언으로 중보를 하면서 통변을 해보면 영이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이로 그 사람의 심령이 덧입혀 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대부분 기도를 부탁하신 분들의 경우는 다 사정이 절박하고 아프기 때문에 이런 영적 전이로 중보의 영이 임하면 마음이 몹시 힘이 듭니다. 갑자기 평온하던 내 마음에 다른 사람, 곧 중보자의 심령이 입혀져 버리기 때문에 순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평온하던 마음에 바다의 밀물처럼, 때로는 홍수처럼 슬픔과 아픔이 몰려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절박한 사정과 아픔의 깊이에 따라 동일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이건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닌 그 사람이 되어서 마냥 주님 앞에서 도우심을 간구하며 울고 있습니다.


한번은 그 심령이 너무도 아파서 새벽 한 밤중인데도 그 사람을 전화로 깨우고 싶었습니다. 빨리 그 사람의 심령이 해소되어야 저도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너무도 마음이 아프고 힘이 들어서 아마도 방이 넓었다면 데굴데굴 굴렀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듯한 슬픔의 깊이로, 아픔과 답답함과 갈급함으로 제가 도무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차마 깨울 수는 없고 그냥 혼자 주님 앞에서 그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의 심령으로 마냥 울부짖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한 경험으로 진정한 중보가 무엇인지, 진정한 중보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히 놀라시기도 하시고 슬퍼도 하시며 제자들을 향하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까지 하셨으면서도, 또한 성부 하나님께 “아버지여, 하실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으면서도, 끝끝내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는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막14: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막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막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막14: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막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게 한 사람의 절박한 심정이 덧입혀 졌을 때도 데굴데굴 굴러야 할 정도로 저의 마음이 사랑의 성령 안에서 그토록 아팠을진대, 온 세상의 만민의 죽음을 무게를 안았을 주님의 중보의 심령은 어떠하였겠는지요?


아마도 물에 빠져 죽어가는 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애타는 심정에다 온 인류의 숫자를 곱한 것만큼 그 마음이 아프셨겠지요.


영적 대부흥을 한 때 주도하였던 찰스 피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만 기억하지 그가 그러한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생명을 건 중보의 전쟁을 치룬 다니엘 내쉬라는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요.


찰스 피니가 집회를 하는 곳이면 다니엘 내쉬라는 사람은 보통 일주일가량 앞서 그곳에 가곤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지역의 구원받아야 할 사람을 안고 중보의 신음을 하였지요.


하루는 찰스 피니가 먼저 도착하여 중보하는 그곳을 방문하니, 그 집의 아주머니가 “저분이 방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어디가 아프신지 신음소리만 간간 들립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제가 이런 경험을 하기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다니엘 내쉬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지를 조금은 이해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영혼구원을 위한 중보의 영이 임한 것이지요.


이러한 중보의 차원을 넓혀 생각하니, 또한 경험하니, 진정한 기독교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 곧 고난받는 종이더군요.


곧 그것은 예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가 허물의 사함을 얻었고, 예수께서 상하심으로 우리가 죄악의 사함을 얻었고,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 같이, 이제는 우리가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이웃들과 구원받아야할 영혼들이 생명을 누리게 되는 동일한 원리였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물론 예수님의 찔리심과 상하심과 징계 받으심과 채찍에 맞으심은 전혀 죄 없으신 거룩하신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되신 몸과 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우주적인 고난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복음전파와 이웃사랑과 영적전쟁 등을 위한 그런 남겨진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부활하시고 영이 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께서, 당신의 사역의 지속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필요로 하시고, 아버지께서 주님께 맡기신 양무리의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위하여 우리 몸의 고난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새롭게 가슴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고난이던지, 징계이던지,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질병이던지 육체적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냥 무의미한 것이 아니더군요. 그렇게 아파보았기에 아픈 사람을 보면 기도하여 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기도하면 정녕 가슴으로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게 되더군요. 제가 아픔으로 인하여 그 사람에게 작게나마 생명이 흘러가는 것이지요.


영적 전이로 인한 중보의 아픔의 신음, 그리고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숱한 아픔의 세월과 시간이 타인에게는 도리어 작게나마 생명으로 흘러감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고난의 신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영성은 부와 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종, 곧 우리의 모범이시요,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은 고난과 십자가 뒤의 부활과 영광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이러저러한 은사와 능력과 조금은 신비스런 체험을 해 보지 못하신 분들은 가끔 제가 경험한 작은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부러워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그러한 영적인 능력과 체험을 하게 하심은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세상적으로 보면 한편 정말 고달픈 십자가의 삶입니다.


가령 신유의 은사의 기름부음을 받는다면 한동안은 신도 나고 병이 낫는 기적에 스스로도 흥분도 되고, 은사의 주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면 스스로 대단하게 느끼는 일시적인 영적 그릇된 교만한 마음도 깃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감정적 흥분과 기쁨은 잠시입니다.


수도 없이 이런 병, 저런 병을 가지고 몰려드는 환자들을,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라”는 심정으로 섬기고 섬기려다 보면, “머리 검은 짐승은 기르지 말아라”는 옛사람의 속담처럼, 사람처럼 간사하고 교활하며 때로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존재도 어쩌면 없는 터,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는 이런저런 모습도 보게 될 터,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이 없이는 힘이 들지요. 결코 할 수 없지요. 다른 모든 은사와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능력을 유지하면서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사시는지 대부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쉬 경험하듯이 성령은 우리의 작은 실수나 죄악에 순식간에 소멸되어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하심을 늘 견지하며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요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이제 영적 사역으로 조금씩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얕은 샘을 걸어가는 저도 그러한 사역의 무게를 조금씩 가슴으로 실감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저의 기도시간에 주님 앞에서 조금은 무거운 가슴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렇게 앉아 있으니, 영으로 붉은 홍포를 입고 십자가 형을 앞에 두신 채 죄인으로 서 계신 주님의 모습이 환상으로 보였습니다.


영화에서인지 성화에서인지 본 모습이더군요. 환상에서 우리가 본 모습을 성령이 이용하시는 것은 우리의 선지식을 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전혀 낯선 인물을 보여주면 우리가 누군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형상을 이용하여 일반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다른 사람은 환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저는 별스레 황홀경에 들어가지도 않고 의식도 또렷한데, 영으로 그냥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보입니다. 한없이 맑고 맑은 물 위에 사물이 비추이듯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깨끗하고 분명하게 보입니다.


십자가 형을 앞에 두시고 홍포를 입으신 주님께서 보이더군요. 두 눈가에는 눈물이 어려 계셨습니다. 그냥 온 인류의 사망을 아파하시는 듯한 어린 눈물로 가만히 한동안 바라보고만 계셨습니다. 저의 생도 고달픈데다가 주님의 눈물짓는 죄인된 모습을 보니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 때 주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생명의 구원에는 눈물과 피 흘림이 필요하다. 너도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다오..”


그래서 제가 주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의지도 약하고 본성도 부족하고 너무나 연약한 그릇입니다.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왜 제게 그런 짐을 지우시려고 하십니까?..”


영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주님의 눈물 진 모습, 한 동안 주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연약하기는 다 마찬가지이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위하여 살아다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려무나, 나도 너를 힘껏 도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영으로 생생히 보이긴 하지만 만질 수는 없는 주님의 얼굴, 그냥 허공으로 손을 내밀어 주님의 눈물을 닦아 드렸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면 그리고 내게 향유 옥합이 있다면 그것을 깨뜨려 당신의 발을 닦아 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날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사역을 하시는 분들은 언제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가끔은 성령이 소멸될 이유와 원인도 없는데, 아무런 기쁨도 평안도 느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아니 때로는 몸도 고달프고, 또 삶의 깊고 깊은 상처 등의 쓴뿌리로 마음이 울적한 때도 저의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단과 훈련을 통하여 저는 단 한 가지, 마음이 어떠하던지 형편이 어떠하던지,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 도무지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는 빼고는, 지금은 주님 앞에서의 경건의 시간을 놓치는 않습니다.


오늘도 고단한 여정, 왠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음이 조금 힘이 들더군요. 하지만 주님 앞에 정한 시간에 기도하려 앉았습니다. 다소 힘든 마음을 아뢰며 기도하며 영으로 들어가니 다시금 주님의 형상이 보였습니다. 한동안 바라보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무릇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 내가 사망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이르신 것은, 당신을 따르는 사명의 길이 당신께서 고난의 생을 사셨듯이 고단한 여정이지만, 고난과 십자가 뒤에 부활과 영광이 있음을 일깨워 제게 용기려 주려 하심이겠지요.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나라가 한 때 어려운 시절, 너무나도 가난하고 굶주렸던 시절, 너무나도 힘들었기에 복음의 중심에 한 때 축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축복 중심의 복음도 한편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축복의 여정 가운데 고난과 십자가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완전하고도 온전한 법적인 구속 뒤에,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 중보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에 채우는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하여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당신의 백성과 이웃들을 품고 섬기게 하시려고 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극한 고난의 길을 걷게도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사명의 길이기에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자기 부인의 내성을 위하여 또한 광야의 연단도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그 고난의 뒤에 영광의 삶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오직 하늘 영광의 영광과 상급을 위하여 땅의 순교적 삶을 요청하시기도 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은 축복만을 구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에 채우는 참된 중보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제사장이란 원래 중보자입니다. 성경은 신약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를 향하여 제사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중보자입니다. 그리고 중보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땀과 피를 흘리는 자리입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이러한 참된 중보의 원리를 혹독한 고난 뒤에 그러한 고난을 겪은 사람을 위로하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 안에서 배웠고, 그리고 영적 전이를 통한 심령의 덧입힘 속에서 참된 중보가 무엇인지를 또한 배웠습니다.


주님은 이천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저 높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지신 어린양으로써 죄 없이 달리셨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참혹한 모습이셨겠지만, 영으로는 온 인류의 죄악의 무게와 생명의 무게를 신음하는 가슴으로 안고 아름다운 중보의 꽃으로 피어나신 붉디 붉은 한 송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장미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육체를 잃으셨기에, 우리에게 남겨진 사명의 십자가를 당신의 몸이 되어 부활과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당신을 따라 걷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한 사람을 찾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제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버리신 주님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중보의 십자가를 지고, 이웃과 인류를 위하여 신음하는 중보, 그 아름다운 십자가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좇아 이제 함께 지지 않으시렵니까!


주님은 죄인 된 붉은 홍포를 입으시고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눈물어린 눈으로 당신을 좇아 그 아름다운 중보의 십자가를 질 사람들을 찾고 부르고 계십니다. 샬롬!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출처 및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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