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영의 눈을 열어 영적인 존재들과 세계를 형상과 이미지로 보게 하신 후 점점 보여주시는 세계가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져 가지만, 잊혀지지 않는 하나가 있습니다.
한 집회를 앞두고 종일 혼자 이리저리 준비를 하면서 바빴습니다. 실상 집회 전날에는 이것저것 자료 정리 및 마지막 준비를 살펴보느라고 기도하는 시간은 많이 갖지 못합니다. 그냥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집회를 준비하느라고 바쁘지요.
그렇게 자료 및 여러 가지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잠시 누우니 새벽 1-2시경, 다소 곤한 몸 늘 보이시는 주님께서 저를 위로하시려고 하신 것인지, 늘 아이들의 모습으로 생각되는 천사들의 손을 잡고 자주 보이시는데, 그날은 한 어린 소녀 모습의 천사의 손을 잡고 걸어오시는 이미지가 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황홀하였던 것은 주님의 푸른 후광의 빛을 은은히 발하시고, 그 소녀 천사는 옷은 분홍색 계열의 옷을 입었는데 은은한 분홍빛의 후광이 배경으로 어리더군요. 푸른빛과 분홍빛이 서로 은은하게 어울리니 무지개 빛마냥 아름다운 색깔이 어리어 보이더군요. 그 은은한 푸른빛과 분홍빛 그리고 어울린 무지갯빛이 온통 방안에 어리고 너무 아름다워서 제법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집회 준비를 위해서 한 동안 기도하며 자료를 준비하고 또 하루 이것저것 힘쓰고 애쓴 것에 대한 주님의 위로, 곧 하늘의 위로 같았습니다.
또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몹시 개인적으로 마음이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하지만 또한 목회자이기에 말도하지 못하고 주님 앞에서만 속앓이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가끔은 참 맘 힘든 일도 혼자서만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런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하얗게 웃으며 재롱을 피우며 저를 웃고 기쁘게 하는 제가 기쁨이로 이름 지은 7-8살가량 꼬마 소년 모습으로 늘 보이는 천사 “기쁨이”가 꽃송이를 들고 와 저의 얼굴 앞에 내밀어 줍니다. 그런데 기쁨이의 그런 표정은 처음입니다. 토끼처럼 귀엽고 밝은 모습이라 바라만 보아도 웃음을 짓게 하는 기쁨이는 그 때는 거의 제 곁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그날은 의외로 기쁨이가 찾아왔더군요.
천사들은 성경을 보면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는다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경험해보면 반무의식 상태에서도 곁에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천사는 어떤 영적인 상황이나 심령의 상황에 따라서 성령 안에서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결함이 필요하면 그런 정결함의 느낌을 전해주는 모습의 천사가, 위로가 필요하면 위로를 전해주는 모습의 천사가, 그리고 각 상황에 따라서 곁에 반무의식 상태에서도 가깝게 있다고 느끼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영적 상황이나 마음의 상황에 따라 도움이 되는 듯한 느낌의 영적 존재들을 곁에 두심을 보게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보이는 모습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미지로 보여주시는 것이지 그 영적 존재의 본질은 아니지요. 저는 아이들을 좋아하기에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보여 주시는 것이구요.
히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보통의 시간 늘 따듯함을 전해주는 어린 소녀 모습의 천사가 늘 곁에 있는데, 그 날은 불쑥 기쁨이가 찾아왔더군요.
제가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운지 얼굴을 잘 마주치지 못합니다. 표정이 마치 어머니의 우는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안쓰러워 피하는 아이의 얼굴입니다. 그냥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꽃송이만 얼굴 앞에서 만지작거립니다.
늘 재롱만 피우던 꼬마 소년이 아니라 오늘은 꼬마 어른처럼 저를 위로해 주는 것 같습니다. 눈을 돌려보니 늘 곁에 서 계시며 늘 보이는 주님께서 저를 가만히 바라보시며 한없는 사랑의 전해주십니다. 영으로 전해오는 느낌이라 오가는 말은 없지만 봄 햇살처럼 그렇게 그분의 사랑이 한없이 따뜻하게 전해져 옵니다. 그러한 하늘의 위로 가운데 힘겨운 마음으로 얼음장 같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갑니다.
이러한 영적 경험들은 주님의 음성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힘겨움은 알고 살아가는 목회자이건 한 사람으로선 제게 하늘이 사랑을 보여주시고 위로하시는 감사한 하늘의 위로인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세상은 사단에게 속한 바 삶의 시련과 마음의 힘든 시간 속에서 세상에서 오는 위로는 받기는 힘든 법이지요.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위로와 힘과 소망과 기쁨의 근원과 본질은 하늘이요, 하늘의 위로이지요.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세상의 떡도 필요하듯이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는 사람은 땅의 위로도 필요한 법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땅의 위로도 필요한데 그러면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상호간의 위로이지요. 곧 성도들 간의 친교와 사랑이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섬기는 우리 성도들은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전쟁으로 비유하면 적진에 투하된 공수부대처럼 영적으로 보면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지요.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군사로써 영적 전쟁을 감당하는 군사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전쟁에 비유하면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전우애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하신 것처럼, 그런 성도들 간의 깊고도 깊은 사랑과 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땅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요, 땅의 위로인 것입니다.
서로 자신보다 남은 낫게 여기며 섬기는 종의 마음으로 서로의 발을 씻기고 우는 자들과는 함께 울며, 기뻐하는 자들과는 더불어 함께 기뻐하고, 어려운 문제나 상황을 겪고 있으면, 강력한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면 함께 중보하는 그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깊은 사랑의 교제와 하나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땅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땅의 위로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에는 물론 이런 아름다운 모습들도 우리가 많이 보게 되지만, 너무도 정죄와 비판과 시기와 질투 등이 난무하고, 각 교회마다 다툼의 분열의 모습들이 너무도 많음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거룩함과 의를 추구하는 것이 신앙의 한 특징이다 보니 정죄와 비판을 너무도 많이 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그런 죄인들이 기뻐하며 찾아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성도의 어떤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되면 정죄의 눈과 말들 때문에 그 사람이 다시는 교회에도 오기 어렵게 하는 경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세워진 교회가 정작 죄인들이 찾기에는 너무 어려운 모습,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하여 세워진 교회가 정작 그러한 사람들은 외면당하고 서러움을 주는 모습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정죄와 판단은 우리의 권한과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세리와 심지어 창기마저도 다 용납하고 품으셨으나 품지 못하신 것, 아니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하시기 까지 한 것은 두 가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의 “외식”과 “정죄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는 참된 선과 악, 의와 불의를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판 것은 명백히 비난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곳에는 훗날 큰 기근에서 근동지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음탕한 고멜을 아내로 맞은 호세아는 우리가 보면 목회자가 마치 창기를 아내로 맞이한 것과 같은 상황, 손가락질 하고 판단 받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말이 아닌 몸과 삶으로 하나님의 선포해야 하는 고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이름마저 저주스럽게 지어야 하는 고된 사명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 아무리 명분이 좋다 하여도 사람을 죽인 것은 율법에도 기록되었거니와 악한 죄, 하지만 그것은 동족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하고 그 배신의 상처를 삭이는 도피 생활의 시간 가운데서 동족을 용서하고 더 새롭게 누구보다도 온유한 마음으로 동족을 사랑하게 하셔서 힘에 겹도록 맘 힘들게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품게 하시려는 시련과 연단의 섭리가 있었으며, 애굽의 왕족이 아닌 하나님의 사명자로서의 부르심을 위한 사건이었다고 한편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예를 살펴볼 때 우리의 각 사람의 삶에는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수 있기에 이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곧 상처로써 상처를 치유하는 이상치상(以傷治傷)의 원리, 병을 심하게 앓게 하신 후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병든 자를 치유하게 하시고, 귀신 들림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게 하신 후 능력행함의 은사를 주셔서 그런 사람을 치유하게 하시고, 때로는 범죄자의 아픔을 주신 후 그러한 사람들을 교화하는 일을 시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길과 섭리를 우리는 다 알 수 없기에 함부로 남을 판단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가령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귀신들림의 고생을 당하고 있는데, “어머, 모 집사가 귀신들렸대! 무슨 죄가 많아서 그랬을까! 조상이 죄가 많은 가 봐”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모른 채 “네가 죄를 지어서 고난을 받는거야”라고 인간적인 관점으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입니다.
이런 섭리적 차원 외에 우리는 각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정죄하거나 판단하면 안됩니다. 제가 들은 한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교회를 다니시는 어떤 직분자가 어느 날 술에 취한 모습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것을 본 같은 교회의 교인이 정죄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분의 자녀가 당일 사고로 죽음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앙으로 감내하고 극복도 좋지만 아픈 마음과 상처를 가눌 길 없어 친한 친구가 마음을 가누지 못하니 진정제로 약간의 술로 이겨내고 감내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달래준 것이었습니다. 물론 믿음과 신앙으로 극복함이 더 옳지만 이런 상황을 두고 누가 약간의 술로 맘 달랜 것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뼈아픈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교사시절 제가 건강악화로 휴직을 하려고 하니 한 선생님이 저를 생각하셔서 귀한 인삼 한 상자를 전해 주시며 속히 건강을 회복하고 오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 복직하여 복도에서 그 선생님을 만나니 표정도 쌀쌀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를 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무척 변덕이 심하시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살갑게 대해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왜 저렇게 쌀쌀맞게 본척만척 하시고 말씀도 없으시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뒤 실상을 알고 나서는 죽을 만큼 미안하였습니다. 사연인즉 그 3개월 동안에 그분이 암의 병증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치료 중이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2개월 후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암의 사형선고를 받고 얼마나 마음이 힘겹고 무거우셨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사연을 알고 난 뒤 얼마나 죄송하고 미안하고 죄스럽던지. 이러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상황을 모르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숱한 범죄자들의 뒷 배경에는 실상 많은 경우 어린 시절 가난과 부모 등의 상처가 깊습니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범죄자가 되고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라도 죄는 미운 것이지만, 너무도 아픈 상황들로 많을 터 절대적 의미의 정죄나 판단은 아니되는 것입니다.
때로 물론 교회 등의 신앙공동체와 평안과 화평을 위하여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가 치리하여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도 어디까지나 문제의 사안만 다루고 합법적으로 처리하여야 할 뿐, 그 사람을 신적 자리에 올라 본질적으로 정죄하면 안됩니다. 아픈 마음으로 사람이 아닌 그 사안과 죄를 다루어야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정죄와 파단 대신에 늘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누가 보아도 명백한 죄의 현장,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도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요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글을 마무리하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이 세상은 사단에게 정해진 때까지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비유컨대 적진에 떨어진 군인들과 같이 적진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영적 전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적 순례자의 길에서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 곧 하늘의 위로와 성도 상호간의 전우애와 같은 땅의 위로뿐입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살아가지만 떡도 필요한 법, 하늘의 위로도 필요하지만 정작 따뜻하게 잡아주고 잡아볼 수 있는 육의 손도 필요한 법입니다. 초대교인들이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하늘의 위로와 땅의 위로였습니다.
스데반처럼 순교의 현장에서 하늘 문을 열고 위로하셨던 하늘의 위로, 그리고 그 죽음을 애통해 하며 주검을 가져다가 따뜻하게 묻어주었던 땅의 위로, 굶주린 사자들이 달려오는 가운데서도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몸으로 다시 만나자며 눈물어린 미소로 함께 굳게 잡은 손이 있었기에 그들은 결국 승리하였고 거대한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물론 아름다운 모습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많지만, 또 한편 죄인들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찾아오기엔 교회의 벽과 담이, 정죄와 판단의 눈과 입술들이 너무도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 서로 격려하며 중보하며 한 몸 된 사랑과 전우애를 나누는 전우처럼 지내야 하건만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반목하는 모습이 너무도 많은 것이 또한 지금의 교회의 한 모습입니다.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면, 자신이 부족한 길을 걸으면 이해해주기 바라고 사정을 알아주기 바라면서도, 남이 그러하면 서슴없이 정죄와 판단의 칼날로 상처를 주는 경우도 너무도 많습니다.
이 땅에 거하실 때 높은 고관대작이나 명문가를 찾아다니시기 보다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셨던 주님,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신 그 주님의 모습과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달아, 교회도 우리들도 이제는 진정 서로 겸손한 자리에서 판단과 정죄 대신에 서로의 허물과 죄의 발을 씻기고 안아주는 “서로 사랑하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면 싶습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어쩌면 실상 가족만큼 서로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듯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우리들, 정말 가족의 사랑으로 생각하고 중보하며 아픈 마음과 손을 잡아줄 사람은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 서로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하늘의 위로와 더불어 땅의 위로, 곧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뜨거운 사랑으로 세상과 사단과 우리 자신을 넉넉히 이기고, 초대교인들이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함락하였듯이 우리도 세상을 복음으로 점점 물들여 가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위로, 사람의 위로, 그 둘 중의 본질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타락한 본성, 궁극적으로 사람은 용서와 이해의 대상이지 신뢰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를 아셨기에 사람에게 당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지요.
요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피차 뜨겁게 사랑하려 애씀도 좋지만, 한편 타락한 사람의 본성, 때때로 사람들에게 도리어 상처를 우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와 능력과 소망과 평안과 기쁨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임을 알아, 땅의 위로보다는 하늘의 위로를 찾으십시요. 구하십시요. 사람의 영광보다는 하늘의 영광을 구하십시요.
하지만 그러한 하늘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위로 안에서 우리 서로가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서로 허물을 감싸주고 안아주고 상처를 싸매 주는 따뜻한 땅의 위로를 서로 나눈다면 공중의 권세잡은 사단이 활개치는 어쩌면 차가운 전장터와 같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한편 얼마나 맘 따뜻함과 위로가 되겠는지요? 샬롬!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