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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원리] 투과의 원리

초록 등불 2012. 3. 19. 17:07

 

  [영의 원리] 투과의 원리

 

성령 안에서 영으로 늘 보여 주시는 영적존재 곧 주님과 천사들을 일반적으로 눈이 부시게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안에서 하늘의 빛이 비쳐 들어오면 이 빛은 세상의 빛이 아니요, 정말 황홀하도록 아름답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빛의 세계가 열립니다.


가끔은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정결과 거룩의 나라요, 정말로 어둠이 없는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빛의 나라인 것을 말씀만이 아닌 경험 속에서 배워갑니다.


한번은 기도하다가 눈으로 보이는 너무도 새하얀 세마포를 제게 상상으로 입혀 보았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본성을 지고서 살아가는 제게는 너무도 과분한 옷이더군요. 아무리 목욕을 하고 때를 씻어낸다 한 들 그 옷은 제게 과분해 보이고 너무도 정결한 옷은 제게 어울려 보이지 않더군요.


세상의 이치로 말한다면 그러한 옷은 정말 너무도 수려하고 아름다운 흠하나 없는 수려한 모습과 그리고 정말로 순결하고 아름답고 정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라야 어울려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긍휼에 풍성하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안에서 그 보혈, 곧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거룩함과 의로움을 덧입혀 주시고 흰 옷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을 값없이 주셨지요.


계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영의 눈을 열어서 영적인 존재들을 보게 한 후로 성경을 읽다보면 새롭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와 닿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만났던 천사에 대해서 말을 하면서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라고 고백하고 있지요.


행10:30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그리고 성경 곳곳에 나타났던 천사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두가 흰 옷을 입고 있었다고 대부분 증거하지요.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행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기도하다 때로 성령 안에서 수없는 하늘의 무리들을 보게 되는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정말 모두가 정결하고 빛나는 하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계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러한 경험과 성경의 말씀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정말로 거룩하시며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 정말로 우리에게 불의와 더러움을 버리고 의와 정결과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배워갑니다.


그리고 진정한 영성의 삶과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삶도 결국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부인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의와 정결과 거룩한 삶에 있음을 말씀과 경험을 통해서 배워갑니다.


어린시절 시냇가에서 가재를 잡던 기억이 납니다. 가재들은 곧잘 돌 밑에 숨어 있는데 그 돌을 들어내면 순간 물이 흐려져서 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기다리면 흘러내리는 물에 혼탁한 물은 흘러가고 맑고 깨끗한 물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흙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가재가 보이곤 하였지요.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정결하고 맑아지면 영의 기능인 양심과 직관과 주님과의 교통의 세계가 맑아집니다. 그렇게 영이 맑고 정결해지면 맑은 물에는 모든 것들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영 안에서 이러저러한 것들이 읽혀집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들은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은사라고 부르고 있지만, 은사는 결국 영이 성장하고 맑아져서,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시 주어졌던 잃어버린 본성적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의보혈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회복하면서 나타나는 초자연적 능력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성경도 말씀하기를 심령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하루는 기도하는데 “정결한 만큼 빛이 들어오고 그만큼 능력이 나타난다”라고 성령께서 영적 깨달음을 주시더군요.


빛은 두 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밝음이요, 하나는 열기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초자연적 성령의 능력인 은사는 크게 이 두 부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빛의 속성에 속하는 것들은 예언과 지식과 지혜의 말씀과 영분별 등, 나아가 방언 통변과 같은 것도 결국 분별과 앎이라는 빛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신유나 능력행함이나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등은 능력을 상징하는 열기와 불의 속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나타내는 낮은 차원의 능력이 아닌 참된 영광 차원의 영성과 능력은 오직 거룩함과 정결함에서 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경에도 이르기를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에게는 조금도 어두움이 없다 하십니다. 정말로 환상이나 이미지로 보여주시는 것이지만 영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발치에서나마 보면 그곳은 이 세상에 있는 빛의 세계가 아닙니다. 정말로 눈이 부시도록 밝고 아름다운 빛의 세계입니다.


그 빛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빛을 차단하는 것은 성경을 살펴보면 다름 아닌 “오직 죄”입니다.


사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죄는 빛을 가리는 어두운 구름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리우고 그 빛을 차단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하게 하여 심령을 어둡게 하며, 또한 그 하늘의 열기를 받지 못하게 하여 따듯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잃고 마음을 차갑고 냉랭하게 합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사망이 찾아왔으며, 이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시와 엉겅퀴의 수없는 저주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거룩하셔서 도무지 죄를 용납하시지 못하시며 가까이 하시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피흘림이 없은 즉 죄사함이 없기’에 수없는 가축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렸으며,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궁극적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단번에 열어 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매번 제사를 드릴 때마다 생축이 피를 흘려야 했으나 이제는 영원하신 대 제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셨으므로 그러한 제물은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그 피로 말미암아 죄를 씻는 몫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대위의 놋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라 하시고 믿고 바라보는 자에게 나음을 주셨듯이, 장대위의 저주받은 놋뱀으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피를 보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주시고, 거절하고 아니 믿는 자에게는 여전히 죄와 사망의 어둠이 그를 덮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나, 여전히 타락한 본성의 육체와 혼을 거슬러 싸워야 하고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에서 져서 어둠에 온전히 사로잡히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멸망으로 얼마든지 다시 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단순한 구원차원이 아닌 영광차원의 구원을 누리려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그분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도도 필요한 것의 의와 정결과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또한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할 수만 있다면 능력 있는 사역이나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영성훈련이나 배움의 기회도 곧잘 가지곤 합니다. 그러한 것들도 좋지만 결국은 자기 부인과 성령께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의와 정결함, 곧 자아의 죽음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무슨 방법이나 이론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쉬운 이 진리, 그리나 우리의 육과 혼이 자아와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또한 너무도 어려운 이 진리, 그래서 사도바울도 처절하게 날마다 그 육신을 쳐서 성령 안에서 복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애썼던 것입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러한 면을 살펴볼 때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은 다른 누구와의 싸움도 아니요, 자신과의 싸움이더군요. 타락한 육적 혼적 본성과 자아와의 매일 계속되어야 하는 치열한 싸움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그릇이기에 늘 이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때로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던 위대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혹여 때로 질지라도 다시금 일어나서 또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점점 이겨가야 합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큼 우리는 의와 거룩함과 정결한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리고 살아가는 수준만큼 하나님의 신령한 빛의 비추임을 받습니다. 그것은 곧 영의 밝은 지각과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물리학적 용어를 빌어 말하면 투과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 곧 성령으로 가능할진대 이는 오직 기도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영적인 삶, 곧 진정한 하늘의 영광을 맛보는 사는 삶에 두 가지의 장애물을 두셨습니다. 하나는 영과 육이 서로 싸우게 하신 것이요, 둘째는 기도생활의 쉽지 않음입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왜 그렇게 해 두셨을까요?”라고 속상해 할 수 있지만, “영과 육이 서로 싸우지 않는다면 곧 세상 즐거움도 누리고 영적인 영광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러하다면 누가 하늘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기도생활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면 누가 하늘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기도생활을 해보면 수시로 성령 안에서 하늘의 영광과 희락을 누리지만 때때로 얼마나 지루하고 힘겨운 시간도 겪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이 땅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천국을 사기 원하는 사람,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값비싼 대가라도 얼마든지 지불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의 영광과 능력의 기름부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하나님은 땅의 모든 소욕, 곧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온전히 하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에게 하늘의 영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나 지식적으로는 너무도 알기도 외우기도 쉬운 진리이지만, 우리는 타락한 육적 본능과 혼적 자아를 지닌 몸이기에 결코 실천이 쉽지 않은 우리 자신과의 내적 전쟁, 영적 전쟁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주셨고 길을 열어 두셨지만 가나안의 원주민을 완전히 몰아내야 하는 사투의 전쟁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워 이겨 몰아내는 만큼 우리는 가나안을 누리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열매는 의와 정결과 거룩함의 삶으로 나타나지요.


그 의와 거룩함과 정결함의 순도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으며 또한 열기를 받아서 신령하고도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리학에서나 영적인 세계에서나 동일하기에 그렇게 이름 불러도 좋을 제게 성령 안에서 영감으로 깨우쳐 주신 “영적 투과의 원리”인 것입니다. 아멘! 샬롬!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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