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하늘의 기쁨 (영적 기쁨을 누리는 길, 선한 싸움)

초록 등불 2011. 6. 10. 19:40

 

※ 하늘의 기쁨 ※

 

 

 

사람이 살아가면서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물을 좋아하고 남보다 높은 명예나 권력을 얻고 누리길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이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마음에 진정 원하는 것은 마음의 행복과 삶의 기쁨입니다. 마음의 행복과 삶의 기쁨을 얻기 원하여 재물을 더 모으려 하고 남보다 높은 명예나 권력을 누리려 하고, 혹은 사랑을 하고 취미나 즐거운 다양한 일들을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이 말을 역설적으로 거꾸로 생각해보면,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적절한 세상의 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행복과 마음의 기쁨을 누릴려면, 적절한 떡들이 필요합니다. 곧 생활에 너무 궁핍하지 않을 정도의 기본적인 물질의 누림과 원만한 인간관계, 가정이 행복의 요람이라 하였으니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을 통한 진정한 부부의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진 행복한 가정, 나아가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건강 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한편 원죄의 삯으로 말미암아 뿌리 깊이 스미고 깃든 근원 깊은 수고로움, 어느 누구나 세상적인 부분에서도 온전하고 만족한 행복의 요건은 다 갖추고 살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 라는 성경의 말씀대로 어떤 부분에서는 자족하는 마음도 필요하며, 어떤 부분에서 마음을 비우고 다스리는 법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해 하며, 비천과 풍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 안에서 마음의 다스리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데에까지 자라고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딤전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6: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원론적으로 돌아가서,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사람들이 진정 워하는 것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것들이 아닌 마음의 행복과 삶의 기쁨 일진대, 우리는 올바른 방향성을 견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이 한편 삶의 만족과 기쁨을 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에 속한 것이요, 혼에 속한 것이요, 다시금 목마르게 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을 원하는 발걸음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사람들이 그러한 곳에서 참된 행복이 있는 줄로 생각하며 찾는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쾌락들은 채워지지 못할 터진 웅덩이에 불과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의 참된 행복의 근원, 곧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예수님께서 수가성 야곱의 우물에 있을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 사연이야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으니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또 다른 남편을 두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 찾는 즐거움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남녀간의 사랑이요,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신적 행복과 육체적 즐거움이지요. 자세한 사정을 기록하고 있지 않으니 남편이 다섯을 넘어 여섯을 향하게 된 사연도 모르고, 그것들이 모두 건전하고 참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남녀간의 사랑이 사람의 마음에 진정한 행복을 안겨다 준다면 그 여인은 더 이상 목말라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그 여인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더 거슬려 올라가면 세상의 금은보화 권력과 명예와 지식과 지혜와 온갖 학문과 아름다운 포도원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던 솔로몬도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은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곤고와 허무로 다가올 뿐이라고 고백하였지요.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얼마나 삶의 행복과 마음의 기쁨에 목마른지요? 그러한 때이면 우리의 혼은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좇아 일탈의 삶으로 향하려 하고, 마귀는 선악과를 두고 아담과 하와를 두고 유혹하듯,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탕자의 삶을 살아보라 속삭입니다. 선악과를 바라볼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듯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마음에는 언제나 세상의 것들을 좇아 살면 행복해 질 것 같은 생각이 스며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적인 일탈의 삶이나 세속적인 삶에 결코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빠지면 빠져갈수록 공허와 허무만 깃들 뿐입니다. 가치관과 빛만 잃어가고 혼돈과 혼란의 세계로 더욱 빠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 따라지어서 거룩함을 좇아 살게 지으심을 받은 존재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네가 죽으리라!!”선악과를 두고 이르신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수고로움이 우리의 삶에 적지 않으나, 때때로 우리의 마음에 행복과 기쁨을 잃어버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삶의 의미와 행복을 눈물로 갈구하고 방황할 때도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다시금 마음을 올곧게 하고 오직 하나님 사랑, 오직 주님 사랑의 외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마음에 기쁨이 임하던지 아니하던지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 앞에서 치고 울어도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 성령세례를 받고 때로는 세상의 길도 걸어도 보고 목회자로 살아 온지도 어언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 저의 삶을 돌아 보건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항상 그 마음에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성령의 세례를 받았을 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성령의 새 술에 만취하여 충만 위의 충만한 기쁨의 한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그러한 첫 세례의 성령 안에서 강력한 강권적인 기쁨과 흥분과 고조된 감정은 시간 속에서 다소 차분해 지고 안으로 갈무리되어져 갑니다.


때때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면, 내면에 은은한 불길로 조용히 흐르던 성령의 불길이 다시금 새롭게 온 몸과 마음을 휘감아 성령 안에서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와 같은 기쁨과 능력으로 “성령의 나타남”의 역사를 하시곤 하시지만, 평소의 삶을 살아갈 때면 내면의 은은한 평강은 누리지만 다소 차분하고 자연적인 마음의 상태로 살아가게 되더군요.


처음 주님을 만나고 세례를 받았을 때와 같은 영적인 삶을 늘 견지하려면, 매일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의지를 발휘하여 영적인 삶에 매진하아야 하더군요. 주님과의 친밀감을 유지하여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가며 애써야 하더군요.


왜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실까 생각해보면, 언제나 강권적으로 역사하여주신다면,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의 상급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의 의지와 노력은 없이 오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서 행한 것뿐이면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을 요청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지요.


골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해 때로 탄식하시며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뜻을 좇아 우리도 힘을 다하여 살아가려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 곧 삶의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말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모형, 구약의 만나는 신약의 성도들이 매일 하늘로부터 공궤 받아야 할 영의 양식, 하늘의 생수, 어떤 면에서는 성령의 신선한 기름부음에 비유로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성령의 세례를 받고 살아오신지 오래된 분들을 아시겠지만, 어제의 충만이 오늘의 충만이던가요? 오늘의 충만이 내일의 충만이던가요? 아니지요. 오늘은 오늘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자고 일어나서 먼저 영으로 기도하며 그 내용에 귀기울여보면 영은 항상 “하나님, 오늘도 내 속에 충만히 임재하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내 마음과 생각을 주관해 주소서”라고 간구하더군요.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주의 낯을 구하고 그 얼굴의 빛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때때로 우리는 그러한 경건한 삶에 성실하지 못하면 영적 침체의 하루나 시간들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는 타락한 본성의 강한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집요하게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공격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행복과 삶의 참된 기쁨은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요,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어떤 날은 충만하고 때로 어떤 날은 영적으로 다소 곤고함도 느낄 수 있겠지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주님 사랑, 오직 하나님 사랑의 결연한 의지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곁길을 바라보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결국 바라봄이 첫 범죄의 시작이었으니까요.


남들이 보기에 영적인 거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황홀한 기쁨과 만족으로 언제나 늘 그리고 항상 충만하게 주실까요? 아닙니다. 부족한 저를 보아서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다.


언젠가 어느 날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을 만나고 모잠비크로 가서 고아들을 돌보라는 주님의 지시를 받고, 그곳의 고아들의 어머니로 살아가며 주님의 사랑을 베풀며 또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며 지내는 하이디 베이커 여사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고백하기를 제가 주님과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힘써야 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실 거예요..”


만약, 주님 안에서 샘이 철철 흘러넘치고 강물이 범람하여 홍수가 되는 기쁨이 늘 저절로 퐁퐁 샘솟는다면, 그것이 힘들다고 느낄까요? 아니지요.“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사도바울과 같이 그러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킴이 있어야 그러한 기쁨을 누리게 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잃지 않기에 그러한 고백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늘의 기쁨은 그냥 오고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결코 이 땅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령하고 거룩한 기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삶에서 참된 기쁨, 곧 영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기도하는 제게 감동하시며 가르치신 것을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성령이 충만하다 하여, 늘 혼적인 기쁨과 고무된 감정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아픈 일에는 아프고 때때로 힘든 일에는 힘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신 이러한 삶에 힘쓰고 애쓰는 자에게는 저 심령의 깊은 곳,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있는 하늘의 평강은 그 누구도 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혼은 조변석개하며 감정과 기분은 다소 변할지언정 영안의 은은한 기쁨은 세상의 어떤 것도 앗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 있지만, 때를 따라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어떤 날은 춤추고 노래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듯이, 그런 영혼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기쁨, 땅이 아닌 하늘로부터 임하는 충만한 기쁨도 부어주실 것입니다.


첫째,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르셨습니다. 이것은 잘 아실 것이니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애쓰라”이르셨습니다. 말씀의 삶 안에 빛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심령의 정돈이 있음을 아실 것이니, 이것 또한 부연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셋째, “사랑과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라”이르셨습니다.


이 주제는 한 번 독립적으로 감동하신 적이 있어서 따로 기쁨을 얻는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보려고 하던 대지입니다. 언젠가 기도하는 가운데 삶에서 기쁨을 누리고 싶으면 “선을 행하여라.라고 감동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닌 참된 영혼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면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요. 우리의 혼은 먼저 받기를 원하고 주기를 싫어하지만, 그 혼을 쳐서 복종 시켜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은 먼저 대접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선을 행하며 살아보십시요.


그 속성이 사랑이시요, 율법과 말씀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과 선을 살아가면 너무나도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가 아닌 하늘의 기쁨을 주십니다.


호스피스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요? 사람들이 병들고 연약하여 임종을 앞둔 사람들을 돌보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 일은 생각만 우리에게는 다소 두렵기도 하고 하기 힘든 일처럼 보이는데, 그 일에 종사한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한 기쁨을 맛보게 되면 그 일을 그만두기 힘들다고 하지요. 이처럼 사랑과 섬김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으로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는 이 땅이 아닌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생활의 작은 일들에서부터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실천해 보십시요. 가령 공동주택이라면 빗자루를 들고 나가서 공동구역을 청소를 해 보십시요.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고 좋은 말과 사랑의 말로써 위로와 칭찬을 해 보십시요. 누가 잘못하고 실수를 하여도 안아주고 용서해 보십시요.


그렇게 작은 일부터 조금씩 큰 섬김과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하늘의 기쁨을 분명히 주실 것입니다.


넷째, “늘 기도에 힘쓰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르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므로 이 세상의 것들로는 궁극적인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채워질 때에만 비로소 궁극적인 해갈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령한 것은 곧 성령입니다.


성경은 한편 성령을 일컬어 생수라고 하지요. 그 표현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기쁨과 능력을 줍니다. 성령의 열매에는 “희락과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찬송을 불러라, 때때로 그것이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게 해 줄 것이다” 감동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경건의 시간에 어떠한 경우에 가장 큰 기쁨을 누리십니까?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입니다. 찬송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할 때 주님은 가장 큰 기쁨을 주시더군요.


이것은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경배할 때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이셔서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경배할 때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당신의 형상을 좇아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복락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기뻐하시기 때문이시기도 하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지만, 한편 당신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으니까요.


어쨌거나 때때로 우리가 영적인 기쁨을 잃어버렸을 경우, 찬송과 찬양이 기쁨을 회복하는 한 비결이 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찬송과 찬양을 드리고 드리면 하늘의 보좌가 움직이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 깃들었던 악신이 쫓겨나가듯 우리의 마음에 어두움의 세력이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늘 찬송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마음이 우울하고 힘들면 더욱 소리를 높여서 찬송을 찬송 가운데 임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영광의 구름 가운데 임재하실 때까지 부르고 불러보십시요. 기쁨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섯째, “늘 말씀을 묵상하라, 그리고 그 세계관 속에서 생과 모든 것을 바라보아라” 가르치셨습니다.


가령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어떠한 말이 위로가 될까요? 기쁨이 될까요? 세상의 어떠한 것이나 말도 위로나 소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늘 성령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진정 그 말씀이 가슴에 생명이 될 것입니다.


저 높고 높은 빌딩과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부러워질 때, 멋지고 번쩍거리는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20-21절)의 말씀 안에서 다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사람은 그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의 능력 안에서 전과 같은 가치관으로 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늘을 향한 부요함이 참된 부요함임을 알고 그 소망 가운데 빛과 맘 깊은 곳의 행복을 빼앗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 말씀이 마음의 빛 되고 생명의 생수가 되어서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이 땅의 식물과 고기들은 육의 음식이지만,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 말씀들을 그냥 눈으로만 읽어서 혼의 영역인 지적인 영역에 머무르게 하지 말고, 깊이 묵상하고 새김하여 심령 곧 영안으로 넣어십시요. 그리하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영이 살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혼이 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육이 살게 될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 “주님께서 맡기시고 명하신 일에 힘쓰라”이르셨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제게 이르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의 일에 힘쓰라. 그것이 네게 생명이 되리라” 맞습니다. 저는 지금 이 일이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면, 먼저는 제가 은혜를 받고 저의 영혼이 소성케 됨을 경험합니다.


부흥회를 다니시는 부흥사님들은 대부분 거의 매주 집회를 나갑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거절하기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그 사역 속에서 자신이 생명을 누리고 영적 능력이 커져 감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만 쉬어도 영적으로 영력이 떨어짐을 느낀다고 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고, 주님이 섭섭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성령과 은혜를 구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원에 가보면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성도님들이 와서 부르짖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합니다. 굳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어도 힘껏 소리쳐 기도하고 찬송도 부르니 마음도 시원해지고 쌓였던 스트레스도도 풀립니다. 물론 은혜와 성령도 받겠지요.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거기까지 뿐입니다. 내려가면 아무런 주의 일에 헌신과 섬김의 삶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마음의 갈증의 해갈과 기쁨을 위하여 성령과 은혜를 구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


성령이 오시고 임하심은 기초적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에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감정과 기분의 고조와 흥분을 위하여, 만족을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과 마음이 기쁨과 때로의 흥분은 성령이 임재하시는 가운데 나타나는 한 현상일 뿐, 그것을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또한 그것을 위해서 성령과 은혜를 구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 곧 복음전파와 이 땅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세움을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한 성전으로 세워가며 이 땅에서 맡겨진 소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성령 임재하심의 목적과 의도를 알아서 우리에게 맡겨진 증인된 삶과 소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새록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의 기쁨을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요즘은 건강 때문에 길거리 전도를 잘 하지 못하지만, 저의 경험을 돌아보아도 하나님께서 가장 신선하고 활기찬 기쁨을 주시는 경우는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저는 아이들과 잘 통하는 편인데, 교사들이 없어서 그러하지 한 두어 번 전도 나가면 한 삼십 명은 다음 주일에 교회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구리 소리를 잘 냅니다. 거의 원음에 가깝게 잘 냅니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개구리 소리를 내면 “어, 아저씨, 방금 낸 소리 무어야? 개구리 소리랑 똑 같네”하고 삼삼오오 모여 듭니다. 뭔가 궁금증과 호기심을 일으킬 무엇이 있으면 언제나 심심한 아이들은 곧잘 모여듭니다. ㅋ


그러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다가 전도를 시작하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심령이 굳지 않고 직관이 살아 있어서 복음을 전하면 잘 받아들입니다.


아이들 전도에 있어서 꼭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비결은, 그냥 길거리서 전도하고 보내버리면 교회에 대부분 안나옵니다. 반드시 길거리에서 전도하고 영적 뿌리의 근원이 달라지게 하는 예수님 영접기도를 하게 한 후 교회로 반드시 데리고 와서 교회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좀 놀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번 보고가야 장소의 낯섬도 없고 오는데 마음의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옵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기쁨을 누리려면 “주의 일에 힘쓰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의 일에 힘쓰는 사람에게 주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집에서 가만히 계시지 말고, 교회에 나가서 청소도 하고, 길거리 전도에도 참여해 보시고, 이웃에게 전도지도 나누어 주시고 해 보십시요. 교회에서 자신의 달란트에 맞는 적당한 일을 찾아 그곳에 헌신해 보십시요. 주님은 영 안에 기쁨으로 채워주시며 살아 생동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기쁨과 생기 넘치는 활기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건강 등이나 피치 못할 이유가 아니라면 방안에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할 수 있는 주의 일을 찾아 나서보십시요. 주님께서 기쁨과 활기참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편 기억해야 할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또 성령 충만하다고 하여 늘 혼적인 영역의 기분과 감정의 고조됨과 기쁨을 늘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는 세상의 힘든 일들에, 혹은 과도한 사역에 지쳐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 힘들고 아프고 수고롭지만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선한 싸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시키고 낙심시키려는 마음과 원수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남녀가 사랑을 할 때도 진정한 사랑에는 선한 싸움이 있습니다. 때로 더 멋진 이성이 눈에 보이더라도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의지로 거절해야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랑에 진정한 삶의 행복, 곧 참된 영혼의 기쁨이 있을진대, 때로 세상의 것들이 유혹해도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꺾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속에서 참된 능력과 생의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의 가치관이나 생각이나 소욕이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며 그분으로 채워지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살려는 영혼의 갈망, 곧 믿음의 선한 싸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로 살아갈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수록 온전한 목회자의 삶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구나. 정녕 어려운 길이구나.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부단히 애써야하는 삶이구나”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운 만큼 보람과 가치 있음을 또한 느끼고 알게 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낯을 구하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말씀을 따라 무릇 범사에 감사하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려 애쓰며, 늘 말씀을 읽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늘 기도에 애쓰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능히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길 능력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온전한 구속의 그 날이 멀지 않느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로고움과 아픔이 적지 않은 생이지만, 우리의 생은 결코 그리 길지 않습니다. 개인적이던 우주적이던 주님 앞에 이를 영광의 그날은 세월의 수이 흘러감 같이 곧 이를게 될 것입니다. 잠시만 믿음의 도를 지키며 선한 싸움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니 이러하던지 저러하던지 말씀대로 살기를 애쓰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제나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며 살려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구하는 것 위에 더욱 풍성하게 복 주실 것이며, 또한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땅이 아닌 쇠하지 않는 저 푸른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세상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가득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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