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영성수필) 주님과의 산책

초록 등불 2011. 6. 14. 18:19

  주님과의 산책

 

저는 지금 주님의 선한 섭리 가운데 광야 가운데 홀로 있습니다. 선한 섭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좁은 저의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대부분 혼자 지냅니다. 혼자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은 병증의 특성상 오전이나 낮에 주로 잠을 자거나 쉬고 나면, 밤에는 다소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거나 때로는 온 밤을 뜬 눈으로 지내는 날도 있기 때문에 옆의 사람까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낮에 쉬거나 잠을 자기 때문에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 것은 알지만, 병증의 특성상 그렇게 생활이 역순환 되어버리곤 합니다. 이 병증은 오전이나 낮에는 힘들다가 밤늦은 시간이면 몸 상태가 최상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혼자 제 방에서 낮에는 혼자 잠을 자거나 쉬거나 하다가 시간을 내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거나, 밤중에도 혼자 쉬던지 성경이나 책을 보던지, 아니면 앉아서 기도하던지 잠을 이룰 때까지 그냥 누워서 기도하면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 나도 몰래 잠이 들곤 합니다.


어머님이 제 건강을 위해서 무리해서 사 주신 건강메트 위에서 낮이나 밤이나 누워 쉬거나 잠들었거나 아니면 기도하거나 말씀을 보며 보냅니다. 낮이나 밤이나 독방의 죄수처럼 주님이 선한 섭리 가운데 예비하신 광야에서 혼자 비비적거리며 주님 앞에서만 지냅니다.


이런 조금은 답답한 저의 생활을 주님이 긍휼히 보셨는지, 어젯밤엔 내일은 일하지 말고 나가서 바람을 좀 쏘이어라 이르시더군요. 낮 시간에도 동일한 감동하심이 와서 작년 갑작스런 건강 이후 처음으로 말끔하게 씻고 새 하얀 반팔 셔츠에 청색 바지 멋을 조금은 내고서 자전거를 타고서 나들이를 갔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다소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서 피로감은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불어오는 바람의 기분좋은 선선한 느낌이며, 길가의 들국화과 예쁘게 핀 꽃들도 눈에 들어오더군요. 주님께서 감사하게도 다소 건강을 회복시켜 주심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지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찬송을 불렀을까요? 아니면 가요를 불렀을까요?” “찬송가요?” “땡! 틀렸습니다. 좋아하는 가요를 부르며 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편견 중에서 고쳐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인들은 찬송가만 듣거나 불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니 그 삶에 찬송과 찬양이 충만해야 하고 성령이 충만하면 세상 가요는 그다지 부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찬송과 찬양이 자꾸만 부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가끔 건전한 가요나 클래식이나 팝 등의 노래를 듣거나 감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니 가끔은 그러한 것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찬송과 찬양은 우리의 영혼에 충만과 기쁨과 평안을 주지만, 한편 우리의 마음이나 혼은 때때로 건전한 가요나 음악 등을 통해서 쉼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가요를 도무지 불러서는 아니된다는 그러한 편견과 판단은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리스도인은 책은 성경만 읽어야 하고 여타의 소설이나 잡지 등을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리스도인은 영화를 보아도 성화만 보아야 하지 일반 영화를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의 터전 위에 굳게 서길 원하시고 그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며, 한편 그 안에서 또한 우리에게 허락하신 풍성한 삶을 우리가 누림을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것들에는 건전한 가요나 미술이나 영화 등의 문화생활도 포함됩니다. 건전한 운동이나 취미생활 등도 포함됩니다.


다만 그러한 다양한 세상적인 문화를 통해서 영적으로 어두움과 사단의 세력이 우리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자꾸만 낮은 영역으로 우리를 끌어가려함으로, 늘 깨어 경계하며 영적으로 분별하고 깨어서 진리 안에서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도 누림도 중요하지만 늘 영적으로 분별하며 읽어서 아니 될 것은 읽지 아니되며, 불러서 아니 될 건전하지 않은 노래는 부르지 않아야 하며, 보지 않아야 될 것은 보지 아니하는 세속의 영적으로 타락한 문화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자전거를 타고서 평소 제 감성엔 나름 예술인의 끼라고나 할까요? 뭔가 그런 느낌을 주는 이현우 가수의 리듬이 한편 묵직하고 태고의 저음의 북소리의 느낌을 가진 노래“헤어진 다음날”을 흥얼거리며 드라이버를 했습니다.


어쩌면 외출하리라 마음을 먹고 나름 멋을 내고 외출을 해 본 것은 작년 건강이상 이후 첫 나들이, 벤치에 누워서 하늘과 초록 잎사귀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간만의 외출을 주님께서 위로라도 해 주시는지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더군요. 너무 선선하고 편안해서 잠시지만 졸음이 솔솔 오더군요.


이제 봄을 벗어나 초여름에서 장마철과 한 여름으로 걸음을 내딛는 대지 위에는 초록의 생명빛이 가득하고, 그 생명력이 신록들로 스며 올라 온갖 나무들도 푸르고 우거진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더군요.


생명의 초록빛 대지, 청록으로 우거진 무성한 생명력의 신록, 그 가지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그리고 빛나는 햇살과 불어오는 산들바람, 제 가슴에는 자연의 생명과 그 숨결, 그리고 만물에 어린 하나님의 신성의 숨결이 느껴지더군요.


그냥 자연인의 눈에는 자연의 생명력이나 그러한 아름다움만 보일 터인데, 제 눈에는 모든 만물을 붙잡고 계시며 그 근원이신 하나님의 신성과 숨결까지 보이는 까닭은, 제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신령한 빛이 제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문득 어젯밤의 주님과의 교통을 나눈 시간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자정이 넘었지만 누웠다 일어나서 앉았다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다소 가졌는데, 개인적인 기도, 중보기도, 이런저런 기도를 드리다가, 평소 성경에 대해서 궁금하던 한 가지를 가지고 주님께 묻는 기도로 다가갔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성경을 보면 조금은 의아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눌린 자를 해방하게 하려 오셨지요. 사람들을 깨우쳐 구원 받게 하시려고 오셨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러한 목적과는 다른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눅8: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오래 전 예언된, 하나님 안에서 이미 선포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오셨는데 이러한 말씀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 왜 이런 말씀을 하셨고 왜 이런 말씀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는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다소 기도하니, 말씀을 깨닫게 하실 때 느껴지는 말씀의 세계의 열림이 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영적인 느낌이지만 마치 말씀의 빛이나 말씀의 숲 속에 서 있거나 거니는 듯한 세계가 열립니다.


그 가운데서 음성과 영적 영상과 함께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가르치심은 이러하였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의 빛을 갈구하는 마음이 청결한 심령에는 풀어서 말을 하던지 비유로 하던지 그 말씀의 빛을 보게 되어 있다”


“이사야가 그렇게 예언하고 한편 내가 그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그렇게 행한 것은,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시대, 내가 땅을 거니는 동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뭇사람들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완악하고 어두워서 결코 진정한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미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그분의 얼굴과 빛을 구하는 심령에는 풀어서 설명을 하던지, 비유로 하던지 영적 진리의 빛이 비추이게 되어 있느니라”


영적 말씀의 열린 빛 속에서 주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보니, 성경의 예언과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종교지도자들 등의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헛되이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참 빛”이 이 세상에 왔으되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못할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이며, 그렇게 될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유기이며, 그 사실에 대한 예수님의 한편 탄식이요, 비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의 깊은 중심이 무엇을 향하고 어디를 향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더군요.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하지요. 세상의 그 말처럼 영적인 세계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것입니다.


분명 귀머거리가 들으며, 벙어리가 말하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 앞에서도, 귀신이 말씀 한 마디에 쫓겨나는 부인할 수 없는 표적 앞에서도, 기존의 종교적 제도권과 자신들의 기득권에 강렬하게 도전해 오는 참 예언자 예수의 혁신적인 가르치심을 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진리의 참 빛을 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의 깊은 중심이 무엇을 향하고 어디를 향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더군요. 저와 여러분의 중심은 진정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의 뜻을 진정 헤아려 행하기 원하고 그 하늘의 신령한 참된 빛을 언제나 갈망하시나요? 그러하시다면 여러분은 결코 마음의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라도 언제나 주님의 빛과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의 조금은 답답한 삶을 헤아리셨던지“내일은 나랑 잠시 밖을 산책하자” 하시던 주님 안에서 벤치 위에 누워 쉬면서 바라본 나뭇잎 사이의 파아란 하늘엔 햇살이 밝게 비추이고 있었습니다.


저 파란 하늘에 밝게 빛나는 햇살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빛을 참되이 갈망하는 가운데, 참 진리의 빛을 사모하는 심령에는 무엇을 통해서도 보고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신령한 빛과 음성을 언제나 보고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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