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주님 감동말씀

허리띠 (깨어있음, 경성)

초록 등불 2011. 6. 13. 18:04

 

※ 허 리 띠 ※

 

 

 

제가 어릴 적에 어머님이 가끔 우스개로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가령 옷을 입혀놓고 너무 커서 잘 어울리지 않거나 그러면 “빨갱이 우장 입혀 놓은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풀어 그 말을 해석하면, 공산당 북한군 비가 올 때 비옷을 입혀 놓은 것 같다는 말로, 아마도 6,25사변 당시 북한군들이 비옷을 입고 있으면 그 모양새가 볼품이 없었나 봅니다.


저는 다소 나쁜 시력과 몸체력의 연약함으로 정규군이 아닌 요즘의 말로 표현하면 단기사병의 군생활을 하였는데, 초병의 역할을 하는 군생활이라 그래도 다소 엄격한 군율의 군생활을 잠시 해 본 경험 있습니다. 그런데 군복을 입으면 “아 이제 군복을 입었구나”라는 느낌이 들 때는 언제이냐 하면 군복의 허리띠를 졸라맨 때입니다.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고 단검과 수통을 차고, 철모를 쓰면 제법 단정하고 군인다운 풍모가 나오는데, 군장을 다 하여도 허리띠를 매지 않으면 모양새가 어머님의 우스개 말씀처럼 빨갱이 우장 입혀 놓은 것처럼 우스웠지요. 왜냐하면 군복 자체는 조금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일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니, 깨어 경성함에 대해서 감동하셔서 조금 느낌 있게 “허리띠”라는 제목으로 깨어 경성하는 삶에 대하여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저는 매일 구약과 신약을 조금씩 병행하여 읽는데, 요즘 읽고 있는 누가복음에 마침 그러한 가르침에 해당하는 말씀이 있어서, 그것을 본문으로 삼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눅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눅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눅12: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12: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눅12: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개인적으로 보면 언제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앞에 서게 될지 모르니,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우주적 종말이 임할지, 주님이 재림하실지 모르니, 항상 깨어서 경성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러한 깨어있으라는 의미로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한 표현들은 “허리 띠를 띠고 있으라”, “등불을 켜고 있으라”, “서 있으라” 또 나아가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라는 표현등입니다.


그 중에 앞에서 제가 예를 든 허리띠를 비유하면, 허리띠를 빼고 군복을 다 입어도 왠지 군인다운 풍모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단검과 수통, 그리고 각자의 임무에 적절한 개인화기 가령 권총 등이 부탁된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면, 왠지 단정하고 맵씨가 있고 정신무장이 된 듯한 느낌, 군인다운 풍모가 풍겨나옵니다.


옛날 장수가 평상시에 입던 옷을 벗고, 갑옷과 칼과 창 등으로 완전 무장했을 때와 비슷한 무사나 군인다운 풍모가 풍겨나오지요.


예수님은 허리에 띠를 띠고 있으라는 등의 다양한 표현을 통하여 깨어 경성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하여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양한 표현을 통하여 우리에게 깨어 경성하는 삶을 말씀하며, 있는데 그렇다면 깨어 경성하는 삶은 어떠한 삶인지 주님의 감동하심과 가르치심을 통하여 살펴본 뒤에 말씀 속에 다양한 표현에 대해서도 잠시 나누어보겠습니다.


언제가 주님께서 깨어있는 성도의 생활 곧 상태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매 순간 어떤 것이 영에 속한 것이고, 어떤 것이 육에 속한 것인지가 분별되는 상태”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금번 주일 설교를 앞두고 기도하는 가운데는 조금 더 세분하여 대지를 주셨는데, 하나씩 살펴보며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 점검해보고, 마음을 새롭게 함께 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깨어 있는 삶이란 “우주만물의 창조와 근원, 인류의 기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는 구속사, 죽음과 심판, 구속과 부활과 영생 등의 성경이 말씀하시는 근원적인 진리의 빛이 그 마음에 있는 상태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깨어있다, 경성하다”라는 말의 표현은 같지만, 그 정도는 다를 수가 있지요. 가령 깨어서 적의 동향을 살피는 파수병의 마음의 각오가 다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깨어 경성하는 마음의 결단과 노력과 의지와 애씀이 다양할 수 있는데, 이것은 조금은 초보적인 수준의 깨어 있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의 빛조차도 그들 속에 없지요. 그냥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 줄 알고, 세상의 노래가락처럼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 노나니..” 가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이지요. 영적으로는 잠을 자고 있는 상태요 죽은 상태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는 일차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철학이 묻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영적인 빛의 비추임이지요. 그러나 이 상태로만 있다면 이는 초보적인 수준의 깨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이 이르는 말씀을 각각 가슴에 분명하게 새기고 각인된 마음의 상태가 깨어 경성하는 상태이다”라고 조금은 더 구체적으로 깨어 경성함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군인을 예를 들면, 나라를 지키는 국방의 임무가 자신들의 임무임을 압니다. 그러나 각 개인으로 돌아가보면, 소대장은 소대장대로, 분대장은 분대장대로, 일등병이나 이등병은 그 나름대로, 또 부대의 성격이나 또 육해공군등 맡은 영역별로 그가 행해야 할 임무와 사명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근원적인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한편 나아가 각 개인과 그 개인의 삶의 자리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적용되고 이르시는 광의적이고 때로는 협의적이며 때로는 개인적인 말씀들은 새기고 명심하며 깨어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태가 깨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가령 성경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지켜 행해야 할 보편적인 말씀도 있지만, 각 직임이나 은사에 해당하는 그러한 말씀도 있지요. 또는 어떤 특별하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의 말씀도 있지요.


그렇게 보편적인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 행해야 할 말씀이니 그러한 보편적인 말씀의 진리는 물론이거니와, 늘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지고 행해야 할 말씀들은 살피며 가슴에 새기고 각인하여 지켜 행하려 애쓰는 삶의 상태가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는 상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군인으로 비유하면, 기본적인 군인이 지켜야 할 군기이외에, 파수병이면 파수병의 수칙이 있으니 그것을 완전 숙지하여 하고, 통신병이면 통신병의 수칙이 있으니 그것을 숙지하여 새기고 각인하여 언제나 깨어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여야 하겠지요. 그렇게 늘 말씀을 살펴 자신에게 적용하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각인하며 살아가는 상태가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의 깨어 있음이라 가르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저와 여러분은 과연 우리 각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선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있는지요? 쉽게 말하여 여러분 각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려 애쓰고 그것을 감당하려 애쓰고 있는지요?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말씀이겠지만, 주님께서는 때때로 제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이 너의 생명이요, 살길이다”


표현상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겠지만, 저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전하시는 말씀의 내용은 “너는 나(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죽거나 살거나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되는 것만이 육신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네가 생명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길이다”라는 의미에서 그런 말씀을 이르십니다. 육적이던 영적이던 만나를 누리는 길은 그것 밖에 없다는 말씀으로 그렇게 이르십니다. 하나님이 맡기셨으니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저의 사명이요, 소명이라는 것이지요.


목회자의 삶이나 성도의 삶이나, 이 세상의 누구의 삶이나 그곳엔 수고로움이 다 있겠지만, 목회자로 살아보니 정녕 이 길도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영적인 기쁨과 삶의 의미의 깊음은 이 길이 더 할 바 없이 깊지만, 또 한편 제가 느끼는 일의 수고로움과 무게는 교사로 살아갈 때의 10배는 더한 듯싶습니다. 사람은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니 목회자로 살아보지 아니한 분은 잘 모르실 수고로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거니와 목회자의 경우,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회자가 되려면 내 마음, 내 생각, 내 감정, 내 모든 것들은 죽여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육신과 자아를 지닌 몸이라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온전히 성숙한 단계는 주님께서 그러하셨듯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만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저의 모습은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제 멋대로 행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요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러나 다윗의 참회시편처럼, 죄악 중에 출생하고 본성이 부족한 사람이라 죽어라고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읽어도 때때로 죽지 아니하고 살아나는 자아와 죄성 때문에 내적 고뇌에 빠집니다. 그래서 내 능과 힘으로 극복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좌절하기도 하고 주님 앞에서 탄식하기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독한 목회자의 길, 때로 기뻐 춤추고 노래하지만, 연약하고 부족한 본성의 제가 감당하기는 너무 무거운 듯하여 때로 혼자 주님 앞에서 신음하고 고뇌하며 부족함에 몸부림치다보면, 가끔은 다 벗어버리고 나도 저 햇살이 비치는 세상으로 나가서 놀고 싶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주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협의의 의미로 구약시대로 말하면 “너는 구별된 나실인이 아니냐? 나로 말미암아 살며 나로 인하여 살 수 밖에 없으니 세상을 결코 바라보지 말라”는 의미의 감동을 주십니다. “너의 즐거움은 하늘에서 찾고 새 하늘을 기다리라”는 의미의 감동을 주십니다.


삿13: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그래서 때로는 광야 같은 목회자의 삶이 힘들고 때로는 지겹기도 하고 버겁지만, 때로 죄악 가운데 넘어지고 자아 가운데 넘어지고 쓰러져서 신음하고 주님 앞에서 성령과 함께 영이 말할 수 없이 탄식도 하지만, 널브러져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쓰러져 있기도 하지만,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길을 걸어보려 애써봅니다. 저의 소명이 무엇이고 살 길이 무엇인지 아니까요.


그렇게 애쓰면 본성이 부족한 사람이라 큰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하여도, 주님께서 말을 바꾸어 주시고 행동을 바꾸어 주시고 생각을 바꾸어 주시고 성품을 조금씩 바꾸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아직 부서지고 깨어져야 할 본성과 죄성이 태산 같지만 개미의 걸음으로 조금씩 오르게 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타고난 본성이 부족한 이 사람도 조금씩이나마 주님께서 세워주심을 경험할 진대,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받은바 소명이 무엇인지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며 세워지려 애쓰며 깨어 있는 삶을 살기로 결단할 때 놀라운 변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두 번 째로 깨어 있음에 관하여 가르치신 것은 각 사람이 말씀의 보편성과 개별성 안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마음에 새기고 각인하여 이를 좇아 사는 삶의 상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셋째로 깨어 있는 상태란, “날마다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영적 상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해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은 다 보고 들으니 압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 깊이가 얕던지 깊던지 하나님, 곧 성령님께 민감합니다.


어떤 것을 기뻐하시고 어떤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어떻게 행하면 좋을지 직관적 느낌이던, 내적증거나 음성이든지 감지하게 됩니다. 지금 이 말씀을 기록하는 제게는 내적 증거로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전하라”이르십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 곧 하나님의 음성듣기에 성도님들이 많이 듣고 익숙해져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내적증거, 인도하심에 대해서 많이들 아실 것이고, 경험하실 것입니다.


가령 낮은 수준의 인도하심을 예를 들면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데, 무엇인가가 내면에서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기를 원하는 것을 감지하게 되고 무엇인가가 이끄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이러한 것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며 영의 움직임이며 얕은 수준의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지요. 그런 단순한 느낌이던, 말씀하시는 음성이던지, 아니면 때로 강권하심을 받던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인도하심을 받는 상태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에 가만히 앉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시며, 우주적으로 전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작게로는 각 개인의 삶에 목적과 뜻을 두시고 걸음걸음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살아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받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상태가 또한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넷째로, 주님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깨어 있는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늘이 땅보다 귀한 것을 알아 하늘, 곧 천국을 침노하는 심령의 상태가 적극적인 의미에서 깨어 있는 상태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잘 알지 못해서 돈 100원을 갖고 싶어하는데, 1만원 권을 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웁니다. 떼를 씁니다. 알면 너무도 기뻐하고 감사할 터인데 모르기 때문이지요.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우리 속에 진정한 나인 영이 있으며, 멀지 않아 육체의 무거운 옷을 벗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하늘로 천사의 인도함을 받아, 주님이 계신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이 땅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화로운 참 생을 누릴 것을 아는 성도는 땅보다 하늘을 위해서 삽니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것과 썩을 것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저는 두어 번의 죽음의 고비가 힘들었지만 한편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누구의 마음속에나 상상으로 존재하지만, 이제 제게는 실제처럼 느껴지니까요.


문득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 서면 그분이 뭐라고 하실까? 누구나 스스로 돌아보면 부족함과 죄의 순간도 있는 법, 주님 앞에 회개하였지만 혹 용서받지 못한 죄나 삶의 아픔의 굴레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해서 책망을 받거나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지나 않을까?” 자신부터 살피게 되더군요.


눅12: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언제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녕 하늘이 땅보다 높고 귀하고 영원한 것임을 알아, 단순히 깬 상태에서 나아가 더욱 깬 의식으로 천국을 침노하고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이 땅의 재물에 온 마음이 가고, 이 땅의 쾌락에 온 마음이 가고, 세상 사람들의 부와 귀와 공명이 온 눈에 가득 보인다면, 말씀과 성령의 빛 안으로 들어가서, 사도바울처럼 그 눈의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저도 아직 부족해서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서로 격려하고 말씀으로 권면하며 천국을 침노하는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죽음 앞에서 다 헛되고 헛되며 하나도 가져갈 것 없는 땅의 것들보다 영원한 사랑과 진리의 삶,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을 위한 헌신으로 하늘의 보화를 쌓으며 침노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면 좋겠습니다.


다섯째, 이것은 깨어 있는 상태라기보다는 깨어 있기 위한 영적 동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말씀 안에서 성령충만, 곧 거룩한 참 생명을 누리며 흐르는 상태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말씀을 읽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압니다. 어떤 것이 공의이고 진리인지 잘 압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압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의 탄식처럼 해산할 날이 이르렀으나 해산 할 힘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차량이 네비게이터가 있어서 나아갈 목적지는 분명히 아는데, 기름이 없어서 엔진을 가동시키지 못합니다.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을 영적인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능으로는 결코 타락한 본성과 죄성과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초월적인 영력 그 힘의 근원 되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 성령의 생명이 우리 속에 샘으로 또 강물로 솟아나고 넘쳐흐를 때가 그리스도인이 진정 깨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를 비유하여 “기름을 준비하라, 등불을 켜고 있으라” 비유로 말씀하신 적도 있으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거룩한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매일 하늘의 전기로도 비유할 수 있는 거룩한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으며 새롭게 충전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고 영으로 찬미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앉아서 그분의 얼굴과 빛을 구하는 경건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알아도 행할 능력이 없으면 무엇합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음의 기초요, 근간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주님은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우리 속에 거룩한 성령의 생명이 흐르면 마치 임산부가 아이의 생명을 느끼듯이 스스로 느낍니다. 나 자신이 아닌 거룩한 인격체의 감동감화하시는 역동적인 역사를 느낍니다. 우리는 늘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아닌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고, 아는 바를 행하고, 자신과 사단을 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여섯째, 이것 또한 깨어 있는 상태라기보다는 그러한 충만한 깨어 있는 상태의 삶의 나타남, 곧 증거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풍성한 소망과 감사와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이러한 주님 안의 영광의 풍성함과 다가올 소망의 영화로움을 안다면, 우리는 풍성한 감사와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살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적지 않은 아픔과 수고로움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가시에 찔리면 아프고 먹지 못하면 배가 고픈 육신을 지니고 있기에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성령이 충만하다고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는 홀로 담벼락 아래서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의 마음의 저 깊은 지성소에는, 바다나 호수의 표면의 물결은 출렁거리나 저 깊은 곳은 고요하고 평화롭듯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소망과 감사와 기쁨이 언제나 은은히 흐릅니다. 때로 성령께서 충만이 새롭게 임하시면 그 거룩한 기쁨과 감사의 물결이 온 혼과 몸을 휘감아, 우리로 하여금 언약궤 앞의 춤추던 다윗왕이 되게 합니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절망인 죽음에서 해방되었음을, 사도바울과 같이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담대히 외칠 수 있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과 부활과 영생이 가슴으로 실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령 안에서 잉태된 영의 생명의 약동함을 느끼며,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를 알고 누리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못하고 아픕니다. 부유하지 못하고 가난합니다. 잘나지 못하고 못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시간이 바람이 불어가면 스러지고 사라질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종하시면 “다 이루었다” 외치신, 우리를 향하신 놀라운 사랑 안에서 예비 된 영광이 이미 내 것임을 알기에, 저 영혼의 지성소에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과 평강이 흐르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주님은 마지막으로 온전한 깨어있음의 상태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따로 제가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할 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주님, 제게 원하시는 깨어있음의 상태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것은 온전한 사랑 안에의 상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생활이던 깨어 있는 삶이던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완성이요, 깨어있는 삶의 온전한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율법과 말씀은 하나의 지점을 향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한 남녀간의 사랑이나 친구간의 우정 같은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이신 그 사랑, 곧 아가페의 아름다운 사랑의 빛을 말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삶을 위해 애쓰고 그렇게 영적으로 자라가고 자라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빛의 비추임 안에서 우리의 가슴 속에도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사랑의 빛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행하던지, 봄날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그런 꽃향기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와 빛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늘 깨어 있는 삶에 애쓰고 애써 이러한 진정한 깨어 있는 삶의 온전함, 성도의 삶의 온전한 상태인 하나님의 사랑의 빛으로 충만한 데까지 자라고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전할 말씀은 거의 전한 듯싶습니다. 잠시 앞에서 언급한 깨어 있음의 상태에 대해서 표현한 성경의 구절들을 한번 생각해보면서 깨어 있는 상태가 어떠한 상태이고, 우리의 지금의 마음이 그러한지 한번 살펴보고 말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그러한 표현 중에 “허리에 띠를 띠라”라는 말씀은 마음의 단단한 정신무장의 의미로 생각해도 되겠지요. 가령 무사들이 허리에 단단히 띠를 두르거나 혹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공부나 혹은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그 띠를 통하여 표현하는 바는 결연한 마음의 의지를 말하지요.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깨어 경성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고서 있으라”라는 표현은, 열처녀 비유에서도 나오지만,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성령 안에서 빛을 잃지 말하는 의미로 생각해보아도 좋겠지요. 마음이 하늘의 신령한 빛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궁극적인 절망이나 낙심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빛은 궁극적인 절망인 죽음조차도 성령 안에서 웃게 하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표현을 살펴보면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저는 다소 성격이 예민해서 그런지 가령 어떤 날 택배가 오기로 되어 있으면, 편하게 잘 쉬지를 못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니 속옷차람으로 있을 수도 없고, 집안이 정돈되어 있지 않아도 그러지 옷을 나름 차려입고 집 안을 조금 정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동료 목회자나 혹은 선배 목사님이나 귀한 손님이 온다하고 하면, 이것은 전날 대청소하는 날입니다. 보이면 좋지 않은 물건들은 광속으로 다 집어넣고, 집안을 정리 정돈을 하고 청소를 합니다. 그리고도 마음의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오시는 분을 맞이할 마음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영적인 깨어 있는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래의 구절을 보십시요. 이렇게 기다리고 경성된 삶이 비록 힘들다고는 하지만, 한편 우리에게 영적인 기쁨과 소망과 평안을 주는 것인데도, 주님은 이렇게 우리가 깨어 있는 모습을 당신께서 오셔서 보시면,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라고 복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되고 기대되고 설레이는 말씀입니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글 중에 언젠가 환상 가운데 예수님의 눈동자를 바라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환상 가운데 본 예수님의 눈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눈빛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랑과 온유의 눈빛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바라만보아도 황홀한 사랑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하시며 손수 당신의 나라에서 우리를 위하여 수종도 들어주시며, 우리가 좁을 길을 가며 흘렀던 눈물을 훔쳐 주시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주님은 성경의 곳곳에서, 그리고 오늘의 본문의 마지막에서, 깨어 있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신 다음, 그리고 그렇게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복락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또한 경종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을 때에 인자가 오리라!” 성경은 곳곳에서 주님은 분명 도적같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 소돔과 고모라가 홀연 멸망하였듯, 노아의 홍수로 사람들이 부지중에 멸망하였듯, 그렇게 도적같이 오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 처녀 비유 등을 통하여 믿는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주님을 영접하거나 만나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분명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머리가 아닌 가슴에 심고 새기어, 늘 깨어 경성하는 삶을 통하여 영육간에 기쁨과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언제나 준비된 그리스도인의 삶, “오! 주님, 만물과 우리가 온전한 구속의 그 날을 기다립니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마라나타!”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참 좋겠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깨우치시고 인도하시길 기도 드려봅니다. 아멘!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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