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X 방정식(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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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 못 보신 분은 클릭해서 읽어 보십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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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원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면 다음 편에서 논하고 싶다고 했던 것을 이어서 함께 나누어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시대에 살다가 죽은 사람이나 저 공산주의 국가에 태어나서 복음을 접하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은 지옥에 갑니까? 천국에 갑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태아가 유산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겠지요. 아시다시피 저는 아주 어릴 적에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가지가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실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심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시절 지적방황을 하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신앙생활을 등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와 같은 것과 관련된 질문, 과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였습니다. 가령 누군가 힌두교를 믿는 인도나라나 종교적인 자유가 없는 북한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봅니다. 그 태어남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우리는 삶의 환경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복음을 듣게 될 확률과 믿게 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요. 어쩌면 그는 구원받을 선택의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살다가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논리를 확대해보면서 고전물리학을 적용해보니, 고전물리학은 그 물체의 처음 위치와 처음 각종 물리량을 알면 어느 시간에 어느 위치에 가 있는지 정확하게 계산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달나라에 로켓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예측과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지구나 달도 실상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지요. 태양계 주변을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지구에서 로켓을 쏘면 어떻게 운동을 할 것인가? 또, 달나라에 로켓이 가는데 걸리는 시간, 그 동안에 달이 지구를 또한 엄청난 속도로 공전하면서 움직이는 거리, 서로 만나게 될 때의 서로의 운동 등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계산이 가능하기에 달나라에 우주선을 착륙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법칙을 사람에게 적용시켜보니, 사람이 환경과 주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 집안의 분위기,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건강이나 타고난 지성, 감성, 천성 같은 것들에 의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이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북한이나 인도나 더 거슬려 올라가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조차 듣지도 못한 시대에 살던 사람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출생과 함께 주어지는 여건들이 사람의 길과 인생을 결정한다라는 그런 생각이 들자, “인간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지만, 신이 프로그로밍 해 놓은 궤도를 따라 살다가 죽는 그냥 로봇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유의지를 믿지 못하니, 어떤 사람은 괜스레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인도나 북한에 태어나서 고생하며 살다가 또 복음은 들어보지도 못하고 지옥에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실상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며,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가는 로봇 같은 존재요, 하나님의 장난감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하나님이 제게는 사랑의 하나님이거나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서 예배하거나 경배하거나 하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을 섬기지도 경배하지도 않았고 교회생활도 하지 않고는 세상의 길을 따라 살며, 때로는 세상에 가득하고 넘치는 인간의 불행을 보면서 “어째서 당신이 사랑의 하나님입니까?”항변하였습니다. 어쩌다 술이라도 잔뜩 먹은 날이면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그러시면 안되지요!!”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휴학을 하게 되었고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군대생활의 마지막 즈음에 친구네 집에서 밤새 놀다가 잠을 자고는 이른 아침에 깨었다가 잠시 다시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연적인 하늘이 아닌 너무도 파아란 하늘, 그리고 저 만치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산, 그리고 그 아래로 펼쳐진 그렇게 고울 수 없는 자갈 아니 돌가루 하나 보이지 않는 곱고도 고운 흙으로 되어진 너무도 넓고 평탄한 길. 가령 어디선가 고운 흙을 가져다가 채로 걸러서 작은 알갱이하나 다 걸려내고 고운 가루만으로 만든 것 같은 너무도 평탄하고 넓은 길이 끝없이 저 앞을 향하여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빽빽이 채우고는 수없는 사람들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저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환상 가운데서 저는 너무도 세상재미에 즐거워하고 신나하고 깔깔대면서 옆 사람들과 장난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 앞서 보이는 산에서 세 개의 불빛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너무도 파아란 하늘에 불빛 세 개가 날아오니 자연 눈길이 그것을 바라보고 저게 뭐지 하고 바라보았습니다. 점점 그 불빛이 다가오는데 보니 그것은 불빛이 아니라 천사였습니다. 제가 본 천사는 어른이 아닌 아기천사였습니다. 아기 천사 셋이 제 머리 위로 날아왔습니다. 천사가 보이니 신기해서 쳐다보니 모습은 아기인데 들려오는 음성, 많은 물소리도 같고 우뢰 같기도 한 음성. 시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시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우렁우렁 울리는 말씀이 길어서 세세히 다 분명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마지막에 시편 11장이라는 말씀은 분명히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이 순간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전체모습이 아닌 상반신의 모습만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입술로 말씀하심도 아니요, 소리로 말씀하심도 아니요, 그냥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의 가슴에서 저의 가슴으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순간 놀라서 눈을 다시 떴고 비록 비몽사몽의 꿈속에서 들은 경고의 말씀과 예수님이었지만, 난생 처음 들은 경고의 말씀과 뵌 예수님. 그리고 저를 부르시던 그 자애로운 음성. 그리고 비록 교회에 다니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있었지만 성경에는 나름 해박했던 저, 그 비몽사몽간의 모든 일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곧 멸망의 넓은 길을 가고 있는 저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저, 곧 회개하고 비록 지적 방황은 끝나지 않았지만, 의문은 그냥 가슴에 묻어 둔 채 주님께로 다시 돌아섰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적인 풀리지 않는 신앙적인 의문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지만, 군 생활을 할 때는 거의 매일 동료들과 술도 마시고 놀러 다니기도 하였지만, 저의 영혼은 곤고하였습니다. 안식을 누리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성경의 두 말씀 안에서 그 지적방황을 끝을 내었는데, 먼저는 이사야서의 말씀이었습니다. 방학이나 시간이 날 때면 곧잘 가서 기도도 하고 하던 고향의 기도원이 하나 있는데, 나이 지긋하신 장로님이 섬기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어느 날 저를 위하여 기도하시다가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이런 말씀을 전하시네” 하시면서 전화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사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제가 그 말씀 앞에 일차적으로 깨어진 것은 8절과 9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자랑하려 하는 말씀이 아니라 저는 머리가 좋습니다. 특별히 논리적이고 수리적인 머리가 굉장히 발달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은 공부를 해서 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전혀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들으면 그 모든 원리와 이치가 깨달아졌었습니다. 1,2학년 때 모르던 것들이 3학년이 되니 그냥 다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습니다. 영어공부를 제일 못했기 때문에 늘 공부를 할 때면 영어를 먼저 하였습니다. 못하는 것부터 보충하는 것이 공부성적을 올리는 비결이니까요. 그러면 조금 하다보면 어렵고 이해도 잘 안 되고 무슨 정해진 원칙도 없이 복잡하기만 한 언어학, 짜증도 나고 외우기만 하려다보면 머리가 아파집니다. 그러면 영어책 덮고 수학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아프던 머리가 그냥 풀립니다. 피로가 쌓이는 게 아니라 그 논리와 수학적 세계에 매료되어서 피로감이 도리어 풀리곤 하였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그 논리적인 머리로 잠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피조물이고 내 머리도 그분이 만드셨다. 그런데 내 머리는 실상 크기가 작은 호박만하다. 철학자 칸트가 제 기억 상에는 12범주를 말하였듯 인간은 사고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만 사고가 가능하도록 지음 받았다. 예를 들어서 시간, 공간, 길이 등등 사고 가능한 물리학적, 심리학적인 영역 안에서만 사고가 가능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다” 조금 쉽게 풀어서 이야기 하면, 우리가 가령 로봇을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면 그 로봇은 우리가 인식하고 움직이게 한 영역 내에서만 인식과 행동이 가능하지요. 움직임을 인식해 자동으로 불이 들어오는 전등은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를 인식하지 못하지요. 그 로봇은 절대로 인간을 다 이해하기 어렵지요. 우리가 인식가능하고 행동가능하게 만든 영역 내에서만 가능하지요. 이런 생각을 확장해보니, “우리 수준에서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저 엄청난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작은 호박만한 내 머리통으로 과연 모든 이해가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나의 교만이 아닌가?” “도대체 내가 지금 내 머리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가? 저 나무 아래서 자라는 이름모를 풀꽃의 작용하나 내가 정말 얼마나 그 속의 진리를 알고 있는가?” “저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 광활하고도 광활한 지금도 과학자들이 빛의 속도로 우주로 팽창하고 있다는 도무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 우주를 지으시고 만드신 권능의 하나님 앞에서, 조롱박만한 내 머리의 지성과 이해로 그분을 다 이해하려고 하였고 이해되지 않는다하여 교만을 떨었구나!!” 기도원 원장님이 전해주신 말씀, 어떻게 나의 지적방황을 그분이 아셨을까? 성령님이 나를 깨우치시려는 말씀이구나! 그 말씀과 순간 머리를 스치는 이러한 논리 앞에서, 저는 하나님 앞에서 깨어졌습니다. 조롱박만한 머리통으로 저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의 경륜을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여 판단하고 항변하였구나! 무릎을 꿇고 자만과 교만을 회개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잠시 나누어 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라고 말씀하면, 영원이라는 단에서 끝없이 무한히 긴 시간을 상상하시지요? 그러나 영원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물리학을 공부하시지 않은 사람은 모르시겠지만, “저 하늘과 땅과 산과 들과 바다가 창조물이듯이 시간도 창조물입니다” 처음 들으시나요? 고전 물리학에서는 어쩌면 시간이나 공간은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창조를 생각하면 하나님도 이 우주 공간의 어디와 그리고 시간 안에서 우주 안의 만물을 창조하셨다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현대물리학을 보면 시간도 저 산이나 돌처럼 하나의 창조물이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분리할 수 없게 서로 얽혀져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시공간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사는 시간이나 공간이나 그 안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요, 하나님은 이 세계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다른 차원의 영적 세계에 거하십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 게임을 보면 그것은 우리가 컴퓨터 안에 만든 사이버 세계 안에서 각종 캐릭터들이 움직이지만, 그리고 그 세계도 실제로 게임을 해보면 결코 좁아 보이지 않고, 가령 몇 기가짜리 하드를 다 채우는 용량의 게임이라면 그 사이버 세계는 엄청나게 광활한 영역의 표현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계 속에 있지 않으며 우리에겐 그 광활한 사이버 영역이 아주 작은 하드디스크 용량으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컴퓨터 속의 사이버 세계와 우리의 현실세계의 차이처럼, 당신께서 만드신 시공간의 우주 안에 갇히신 분이 아니고 그것의 지배를 받으시는 분도 결코 아니십니다. 영적인 세계, 곧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겐 너무도 광활해 보이는 우주가 하나님에겐 작은 하드 디스크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주만물과 공간과 시간을 만드시고 그것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결코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조금 더 어려운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 하나님은 우리와 인류와 모든 것들의 미래를 다 아실까요? “네, 다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도 나오지요. 렘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아니 그러면 미리 아시면 미리 다 정해진 것이고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고 자유의지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항변할 수 있겠지요. 그 항변 가운데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습니다. “예정되어있다”는 말은 우리 편에서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없다”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시간과 영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원은 시간을 초월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 영원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저도 시간 속에서 살기 때문에 영원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영원은 시간을 초월하는 더 높은 차원이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차원은 영원의 한 단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이 놓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자 여기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여기에 펜으로 선을 그려갑니다. 우리는 끝없이 그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끝없이 그려가도 그 선은 결국 한 장의 종이라는 면에 있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점은 0차원, 선은 1차원, 면은 2차원입니다. 아래 차원은 아무리 길고 길어도 더 높은 차원의 한 단편에 놓이게 되지요. 이렇듯이 그 선이 만약에 시간이라면 끝없이 흘려가는 것 같지만, 영원이라는 한 차원 높은 세계에서는 한 장의 단면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긴 시간이 그냥 영원의 한 단면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니 우리 편에서 보면 ‘예정’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자유의지가 없는 고정적인 예정이 아니라, 시간 안의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미리 아심' 곧 예지인 것입니다., 영원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성에 기인한 것일 뿐 우리의 자유의지를 꺾는 예정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에 관하여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만약 영원이 무한히 긴 시간이라면 아무리 시간이 긴다한들 어떻게 하루와 천년이 같습니까? 성경도 시간 안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영원 안에 계신 자신의 존재를 시간 안에 있어 시작과 끝이 있고 원인과 결과가 있는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설명하시기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 계신 자"라고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아무런 자유의지에 간섭하지 않으시지만, 모든 것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실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설명이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유추일 뿐입니다. 그러니 변론은 하지 말아 주십시요. 다만, 장로교에서 주장하는 예정설과 감리교에서 주장하는 인간의지를 강조하는 부분은, 이 시간과 영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해서 하나로 통합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하나의 비유와 유추로 이러한 생각을 드리는 것일 뿐 우리가 하나님과 그 세계를 다 알 수는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봅니다. 그러다가 한편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자유의지를 새롭게 이해하는 물리의 세계도 발견을 하였지요. 고전물리학에서는 어떤 물체의 처음 여러 가지 상태를 안다면 나중의 어떤 상태는 정확하게 계산이 됩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에서 보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물리학적 세계에서는 대략적으로 계산을 하면 그렇게 나오니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만 아주 작은 미시세계나 거시세계로 들어가면 전혀 상식을 뒤집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려워서 자세히는 말씀을 드리지 못하지만, 시간과 길이와 질량 등이 다르게 흘러가고 변화합니다. 그리고 미시세계의 양자역학에 들어가면 어떤 입자가 어떤 운동량으로 어떻게 쏘아졌을 때 어디로 갈지 아무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확률적으로 어디에 가 있을 확률이 몇 %이다 라고 밖에 말을 못합니다. 쉽게 설명을 드리면, 똑 같은 질량과 무게를 가진 공을, 똑 같은 방향으로 똑 같은 힘을 가해서 쏘아도, 가령 총이나 대포 같은 것들, 우리는 절대로 그 총알이나 대포가 어디로 갈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일상세계에서는 어디로 갈 확률이 99.9999% 이런 식으로 확률이 나오기에 우리는 예상이 가능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시세계, 곧 양자세계로 들어가면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냥 여기는 몇 %의 확률로 올 가능성이 있고, 저 위치는 몇 %의 확률로 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답을 구하는 방정식을 파동방정식이라고 부르지요. 이것이 자유의지와 무슨 관련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것일까요? 저는 고전 물리학적인 입장에서 사람의 처음 태어나는 여러 가지 요건들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었었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나라, 문화, 시대, 부모, 성격, 지성, 감성, 재물의 정도 등.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를 배우면서, 한갓 정신이라는 것, 곧 영혼이 없는 작은 물질도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가는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움직이는데, 우리에게는 정신, 곧 물질에게는 없는 영혼이 있지 않은가? 그런 우리가 하찮은 미물도 정해진 미래의 궤도를 알 수 없고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데, 영혼과 정신을 지닌 우리가 태어난 처음 조건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겠구나.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열악한 환경에 태어나도 그것을 극복하고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좌절하는구나. 어쩌면 한편 물리학 때문에 스스로 빠졌던 자유의지에 대한 의문이, 한편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물리학 속에 나름 스스로의 탈출구를 보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물리학 속에서 품었던 의문을 다른 물리학의 원리 속에서 해결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일 뿐, 학문 자체는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 졸업 논문은 이것과 관련된 논문을 썼지요. 이 세상의 어떤 학문도 절대 진리는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변하여 갑니다. 물리학과 같은 것은 어떤 법칙과 원리들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그냥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수리적인 체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뉴턴 시대에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 우리가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중력이라는 힘에 의해서 떨어진다고 생각하였지만, 현대 물리학 곧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공간이 휘어지고 구부러져서 그런 현상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종이를 구부리면 종이 위를 기어가는 벌레가 자기는 똑바로 간다고 생각하면서 가도 구부러진 곡면을 따라 기어갈 수밖에 없듯이 그렇게 사과가 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중력장에서는 직진하는 성질을 가진 빛도 휘어집니다. 이처럼 학문은 그 자체가 절대 진리는 아닙니다. 그냥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수리적 일종의 가상 세계에 불과합니다. 절대 진리와 절대 원리는 하나님과 그 말씀뿐입니다. 조금 어렵지요. 그렇지만 어떤 분에게는 이러한 설명이 도움이 될 듯도 하여서 적어봅니다. 그러다가 제가 신학적으로 의문을 완전히 해결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게 된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20장 1-1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한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구하려고 거리로 나갑니다. 그래서 아침에 사람을 만나 하루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일을 시켜서 보냅니다. 그러다가 제 삼시에도 그렇게 하고, 육시와 구시, 하물며 십일시에도 나가보니 놀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동일한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일을 하려 보냅니다. 여기서 십일시면 우리 시계로 오후 5시입니다. 그러니까 해가 다 저물어 갈 때에 포도원에 가서 잠시 일 좀 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말을 한 것이지요. 자, 이제 품삯을 계산할 때가 왔습니다. 줄을 서서 품삯을 받는데 아침에 일찍 온 사람이 보니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거예요. “어! 나는 아침부터 일을 했고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는데, 저 사람은 해 질 무렵에 와서 겨우 잠시 일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주네? 그러면 나는 한 10데나리온을 주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마침내 아침에 일을 하러 온 사람이 삯을 받을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는 달리 한 데나리온 밖에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합니다. “아니, 주인님. 아시다시피 저는 아침부터 일찍 와서 온 종일 땀 흘려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해거름에 와서 선선할 때 잠시 일을 한 것뿐인데 한 데나리온을 주셨으면 저는 그래도 몇 데나리온은 주셔야 공평하지 않습니까?”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들어도 나름 이유가 있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때 주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사람아, 내가 아침에 일을 하려 보낼 때 내 포도원에 가서 오늘 일을 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그 일꾼이 “그 말은 맞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 때 주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약속한 품삯을 지불했고 뒤에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은 내가 뒤에 만나서 일을 시키게 되었고 그냥 생을 긍휼히 여겨서 내가 선함으로 그냥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인데, 왜 나의 선함을 당신은 악하게 생각합니까?” 여러분도 이제야 이해가 되십니까? 다소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 풀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가령 북한에 태어나거나, 인도에 태어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듣지도 못하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비유컨대 아침에 부름 받은 일꾼인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우리는 해거름이나 아니면 오후 3시경에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바, 주인의 선함을 덧입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시대에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셨으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입었고, 종교의 자유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충만한 이 땅에 태어났으니 또한 은혜와 선을 덧입은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할렐루야! 그러나 가령 북한에 태어났거나 인도에 태어났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 가령 아침에 일찍 부름을 받은 사람도, 오늘 이 성경의 본문은 한편 하나님께서 한마디의 변명도 할 수 없게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실 때, 그 환경과 그 시대를 감안하실 것이고, 비록 복음이 없다하나 우리에게 주신 양심의 증거나 본성의 율법으로 각 사람들을 공의롭게 판단하셔서, “이 사람아, 네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시대에 태어났지만 네게는 어떤 일에 대하여 내가 사람의 본성 안에 이미 심어둔 이러저러한 양심의 증거가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그 양심의 증거를 거슬려 악을 행하지 않았느냐. 혹은 선을 행하지 않았느냐” 등으로 판단하셔서 각 사람으로 하나님의 판단하심과 심판의 공의로우심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을 말씀하는 것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머리와 이해력으로 이해하고 추측이 어려운 여러 가지 사안들이 있습니다. 가령 낙태된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아직 복음에 대한 이해력도 부족한 나이에 아주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면, 조선시대나 고구려 시대의 사람들은 무조건 지옥행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앞에서 말씀드린 성경의 두 본문에서처럼, 그분의 세상의 경륜하심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조건이던지, 어떤 상태에서든지 그분은 각 사람을 향하여 분명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며, 그러한 능력을 가지신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아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우리 스스로는 현대과학이 발달했다고 자부하지만, 실상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저 무한한 바닷가에서 펀 한 바가지의 물에 불과하다고 누가 말했지요. 그런 조롱박만한 머리를 가진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과 그 분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의 지성과 이해력으로는 결코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마치 우리가 로봇을 만든다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영역만 로봇이 이해하고 인식하듯, 오직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알 수 있을 뿐이며, 그 다음의 초월적 영역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는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지성의 이해를 초월하는 영적 교통을 통하여, 지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분이 사랑이시고 선이라는 것을 이해가 아닌 실제와 실체로 아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영역은 오직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만이 알 수 있기에, 아무리 머리가 명석한 사람일지라도 영의 일에는 무지할 수 있으며, 아무리 무식한 촌 할머니라도 영의 일에는 밝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영적인 세계의 일은 이성과 지성을 초월하는 그냥 진리자체요, 실제자체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설명과 이해를 하기란 어렵습니다. 가령 세상일에는 너무도 불공평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때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이 나오고 불평도 나오는 사람도, 성령 안에서 영으로 그분 앞에 서면 마냥 감사해서 울고 찬양하고 경배하지요. 영은 그냥 성령 안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사랑과 그 말씀의 선함을 맛보아 감격해서 우는 와중에도 혼은 왜 우는지 이해를 못하지요 ^^ 이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행하심과 경륜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초월하는 성령 안에서만 가슴으로 느끼는 실제이며, 지금은 희미하게 밖에 알 수 없는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세계이며 그 안의 실재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의 옷을 벗고 영광의 몸으로 하늘에 계신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때에는, 우리가 온전히 영의 세계에 들어갈 때에는, 이성과 지성을 초월하던 하나님의 경륜을 다 밝히 보게 되고, “아 이런 이유로 그렇게 하셨구나! 너무도 아름다운 뜻이 계셨구나” 감탄하며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X방정식의 아름다음에,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높고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경륜 앞에 우리의 면류관을 벗어 그분 앞에 드리며,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너무 길어서... 3편은 다음에 이어서 써야 하겠습니다..) | |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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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혹 말씀을 가져가신다면 불편하시면 아래링크는 삭제하시더라도 글쓴이는 남겨주셔서 저작권은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늘 평안하시고 행복하십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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