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믿음의 길 - 읽어보십시요. 간증을 곁들인 감동의 글과 말씀입니다.

초록 등불 2011. 6. 27. 16:31

 

※ 믿음의 길 ※

 

 

 

어느 오후 한통의 문자가 왔습니다. 열어보니 잘 아시는 분의 문자인데 급한 기도요청의 문자이더군요. 남편이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여 병원에 왔는데 폐에 물이 찼는데, 아직 원인은 잘 모르겠고 검사 중이라며 급한 기도를 요청하는 문자였습니다.


“폐에 물이 찼다..”라는 표현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그래서 곤함을 물리치고 일어나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왜 놀랐느냐 하면, 신학교 다니는 시절 급우 한 분이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차가 도랑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별로 다친 곳도 없고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는데, 삼일 뒤 갑자기 몸이 아파 병원에 갔으나 그만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고 말았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차가 도랑에 빠졌을 당시 이분이 물을 조금 마시면서 기도로 물이 들어가서 폐에 물이 들어갔는데, 별로 증상이 없으니 모르고 그냥 집에서 있다가 그것이 폐렴 등의 증상을 일으켜서 그만 주님의 나라로 가고 말았지요.


폐에 물이 찬 증상은 상태가 악화되면 급격하게 생명에 위협이 되는 위급한 병증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물도 적게 찬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찼다는 문자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일어나서 하나님께 급히 SOS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분이라 한 번은 병문안은 가야 할 것 같은데, 작년 건강이상 이후로 한번도 시내를 벗어나 본적이 없는 터라 맘은 있지만, 다녀올 수 있을까 싶더군요. 꼭 가야한다면 잘 아는 친구한테 차량 운행을 부탁해서 한번 다녀와야겠다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 날 새벽, 5시 반경 잠을 잠시 깨었습니다. 그런데 내면에서 기도하라는 성령의 내적 부르심이 있는 거예요. “이른 새벽에 별일이네..” 평소 낮에는 곤하여 쉬고 컨디션이 좋은 밤중에 기도하고 성경과 책을 보는 등 다소 늦게 잠을 자는 편이라 피곤하고 졸려서 그냥 내적 부르심을 외면한 채 다시 잠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자고 난 뒤 아침 8시경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문득 “믿음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번개처럼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금번 비공식 예배 모임에 오신 지체님 한 분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믿는 길이 신앙생활을 할수록 마냥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 느껴집니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편 제가 절감을 하고 있었던 터이라, 같이 공감을 하였지요.


다른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릴 기회가 오겠지만, 그냥 평범하게 예수 믿는 것은 어쩌면 쉬운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 참된 영성의 신앙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넘어뜨리려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어둠의 세력과의 영적인 싸움,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저 역시 절감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아침 8시경,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진정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의 영적인 스침과 깨달음.


가령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였을 때 그것이 정말 쉬운 일이었을까, 그래도 아내였고 자기 자식인데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하셨을 때 순종함이 쉬운 일이었을까, 나아가 100세 때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 하셨을 때 그것이 진정 쉬운 일이었을까. 나아가 순교를 당했던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삶이 결코 쉬웠을까? 잠시 가슴이 찡하더군요.


그런데 또 다시 “일어나서 기도하라”는 내적인 성령의 부르심, “거참 이상하네, 새벽에 이어서 다시 기도하라는 내적인 부르심, 무슨 일일까..”


여러분은 “기도하라면 하면 되지, 왜 그리 고민을 하셨어요?”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새벽과 아침 이 시간에 가장 많이 몸의 곤함과 통증을 느낍니다. 밤중에 기도할 땐 성령의 충만함과 그 가운데 기쁨을 가득 누리다가도 아침이 되어서 눈을 뜨면 통증 때문에 마음의 기쁨은 커녕 말 한마디도 하기 싫은 날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냥 한참을 누웠다가 의지를 발휘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몸의 질병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형이나 미래형이 아닌 과거형입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어떤 분들은 이것은 영적인 것에 해당한다고 말씀을 하나 여러 면에서 살펴볼 때 영적인 것이던, 정신적인 것이던, 육체적인 것이던 모든 것을 말씀한다고 보는 면이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모든 병 고침을 십자가에서 받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것을 진정으로 믿기만 하면, 먼저는 영적인 세계에서 고침을 받고 시간이 흐르면 영적인 세계가 현실로 나타나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믿음으로 내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현실적으로 고통과 통증과 아픔이 있어도, 그 증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무슨 병이던지, 어떤 심한 병증이던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치유를 주장하고 나았음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은 미래의 실상을 마음에 그리며, 꿈꾸며 믿음을 잃지 않고 믿음의 스위치를 켜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즉시 혹은 잠시, 때로는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권리를 주장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증상이 있고 통증이 있다하여 자꾸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은 믿음의 법칙 안에서 좋은 일은 아닙니다. 아파도 “나는 치유 받았습니다”라고 말씀을 붙잡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권리로 주장하고 요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의 아픈 증상을 말씀드리는 것은,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상황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글과는 달리 저도 매일 아침, 믿음으로 치유를 주장하고 고백하며 채찍에 맞음으로 나의 모든 질병을 담당하신 주님께 찬양과 감사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쨌거나 이른 새벽에 이어 또 다시 기도로의 내적인 부르심, 피곤도 하고 통증도 몹시 느껴지는 힘든 몸이지만, 연단을 통하여 순종에 어느 정도 익은 몸, 주님 앞에 앉아서 내적 부르심을 따라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5분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마치 무슨 급한 일에 누군가를 심부름 시키듯이, 방언 통역을 통하여 명하시는 말, “지금 일어나서 식사를 간단히 하고 씻고, 친구 목회자의 차가 아닌 네 발로 걸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그 아프다고 소식이 온 분에게 가서 안수하고 기도하며 네가 네게 쥐어준 능력의 지팡이를 그 몸 위에 얹어놓아라. 내가 역사할 것이다”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얹어 기도하면 당장이던지 점차든지 의술을 통해서든지 반드시 낫게 될 것이라는 신적인 믿음을 제게 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조사비는 얼마 하라는 것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급히 서두르시는 듯한 주님의 말씀하심에 나눌 말씀을 깊이 공급받을 기도시간도 갖지 못하겠더군요. 급해서 주님의 마음의 스크린에 생각나는 대로 말씀을 가져다 대어보았습니다.


“이 말씀요?” 몇 말씀 가져다가 주님의 마음에 대어보니 모두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의 본문을 가져가니 그 말씀이라는 영적인 공명, 그래서 그 말씀을 본문으로 나눌 생각을 하고는 시키신 대로 집을 나섰습니다.


평소의 제 성격 같으면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성격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체력이 부족하고 딸려서인지 결단력이 다소 부족하고 그래서 행동이 느립니다. 뭐든지 하려면 피곤했으니까요.


그리고 지난 1여 년간 걸어서 이삼십 분 이상 되는 거리 밖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득 감당하기 힘든 피로감이 몰려오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그런 때는 빨리 집으로 가서 누워서 쉬어주곤 했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아침에 문득 깨닫게 하신 진정한 믿음의 길, 사도바울이 죽을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길, 그리고 지기 싫고 하기 싫고 너무도 마음에 번민이 되었지만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길, 그러한 것이 믿음의 길이라는 아침에 문득 가슴으로 새롭게 깨닫게 해 주신 믿음의 길에 대한 성령님의 조명, 그 안에서 저는 그날 아침 주님이 무엇을 명하셨던지 “아멘!”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그곳이 제주도라고 하여도 갔을 것입니다.


1여년 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병원을 찾아가려고 나서니, 제가 사는 곳의 전철역이 완전히 변하여 있더군요. 이전에는 안전보호망 유리창이 없었는데 1년 사이 그것이 생겼더군요. 그만큼 오랜 시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1여년 동안 나들이는 고사하고 사람도 거의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주님의 간섭하심은 계속 있었습니다.


“길을 갈 때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과도 많이 말을 하지 말며, 병실에 들어서도 사담을 많이 나누지 말고 예배를 간단히 드리고 기도하여라. 그리고 예배를 마치면 후 사담도 많이 나누지 말고 속히 그 자리를 나오너라” 아주 세세히 이르셨습니다. 사람들과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영 안에서 당신과 함께 있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행이 인터넷으로 병원조회를 해보니 그리 멀지 않더군요. 그리고 작년 이후로 멀리 나가보지 않아 다소 긴 나들이가 부담은 되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다고 느끼지 않고 다녀올 수 있게 붙잡아 주시더군요.


가서 주님이 시키신 대로 대부분 행하였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부분은 여유를 가지고 차분히 하나하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조금 더 유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다녀와서 기도하는 중에 주님은 대부분 잘하였다고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날 곁에 계셨던 지체님과 아프신 분은 느끼셨을 겁니다. 저의 짧은 설교에 이은 기도에, 인간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이 실려 있었음을! 그것은 평소의 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아침에 심령에 신적인 믿음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고 단호하게 예수 이름으로 병증은 호전되고 치유될 것을, 두 번도 아니고 한번은 병증을 향하여, 한번은 병증의 뒤에서 역사할지도 모르는 어둠의 세력을 향하여 꼭 한번씩만 명령하였습니다.


예수 이름은 백번 천번 만번, 그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 유익하면 유익하였지 해가 될 것은 없으나, 그 날은 그냥 그렇게 단호하고 분명하게 왕처럼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여러 번 말하지 않지요. 그 날은 신적인 권위로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은 수없이 사용하여 명하면 유익하면 유익하였지 해가 될 것은 없으므로 병증이나 어떤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는 반복적으로 명령하는 것도 좋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령께서 운행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돌아온 후 제게 온 문자에 예수님을 아직 그리 성령 안에서 깊이 잘 섬기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기도 받으신 분이 아주 짧은 몇 분의 시간이었는데 “자신의 생애에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시더라는 소식이 와 있었습니다. 더불어 곁에 가족으로 돌보시는 분의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것 같다”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쾌차하면 찾아와 인사도 드리고 싶다는 감사의 말씀도 곁들여 있었습니다. 그 말씀엔 저도 아직 건강 회복 중이니 그냥 건강회복하시고 신앙생활 잘하시면 기뻐겠노라 답장을 드렸습니다.


비록 그 자리에서 병이 바로 회복되는 역사는 없었지만, 돌아와 기도하는 제게 나을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간 추상적인 예언의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헤롯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과 내일은 어둠 속에 있지만 제 삼일에는 살아나리라는 의미의 말씀이었습니다.


눅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래서 문자적으로 오늘과 내일은 다소 고생하시다가 삼일 경부터 다소 병증이 좋아지는 뜻이거나 아니면 다소 고생은 하겠지만 결국 좋아질 것이라는 의미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쪽지로 “오전에 남편이 수술 들어갑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요. 두렵고 떨리네요”라는 아픈 분이나 곁에 계신 지체님이나 몹시 맘 약해하고 힘겨워 하는 소식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분명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왔었는데, 일단 수술에 들어가면 고생은 물론 회복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데, 이것이 무슨 소식인가 망연자실하면서, 용기와 소망을 전한 문자에도 답장이 없어서 곤하여 앉아서 하지도 못하고 누워서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그 맘을 이해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으신 거 같으시지요? 정말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큰 병증의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에 직면해 보십시요. 두 번 세 번 겪으신 분은 모르겠지만, 처음 당하면 그 순간은 모든 믿음의 그림자도 사라져 버리고 두려움만 다가옵니다. 저는 작년에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게 그리고 간절히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게는 분명 나을 것이라는 확신과 응답, 곧 심령의 확고한 믿음을 주셨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님의 선하신 뜻은 알 수 없지만 수술이던 뭐든지 반드시 낫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를 쉬지 않고 드렸습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오후 5시 경 즈음에 문자가 딩동댕! 하면서 왔습니다. 열어보니, “수술은 차후 경과를 조금 더 지켜보고 하기로 하고 약물치료를 합니다. 어젯밤에 제가 자지 못하여 낮잠을 자느라고 답장이 늦었네요. 남편은 텔레비전으로 권투를 보고 있어요”라고 온 것이었습니다.


혼자 기도하며 얼마나 맘 애태웠는데 잠을 자고 있었다니.. 하지만 수술하지 않고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는 말에 정말 큰 안도감을 가졌었지요.


사람의 마음이란 너무도 간사해서 조금 아플 때와 나을 때의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저는 겪어 보았기에, 그리고 폐에 물이 찬 증상은 가볍게 볼 증상이 아니었기에, 주신 믿음을 따라 하루하루 믿음의 말씀을 문자로 보내드리며 믿음을 붇돋우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수요일 밤에는 기도하는 가운데 4-5일 경 쯤 후에는 아마도 퇴원할 것 같다는 내적증거가 오더군요. 그런데 상태가 속히 회복되어 제가 받은 내적증거보다 다소 빨리 주말에 그분은 퇴원을 하였고 지금은 통원치료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일을 통하여 겪은 것은, 제가 응답 받은 대로 대부분 흘러갔지만, 병증이 나아지고 좋아진 것은 우리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저와 또 곁에서 기도를 드린 지체님, 그리고 저의 조언을 따라 말씀 앞에서 순종하시며 다소 부족한 신앙의 길을 걸어온 환자 당사자의 아픈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겠지만, 저는 육신의 나아짐보다 고난을 통하여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 그분에게 저의 발걸음과 짧은 시간을 통하여 영혼에 새 빛을 비추어 주셨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습니다.


물론 기도하니 깊은 영적인 삶에도 시간과 때로는 연단도 필요한 법, 당장 그분이 깊은 영적인 삶으로 나아가지는 않겠지만, 새롭게 비추어진 빛 안에서 조금씩 곁의 믿음 좋은 가족을 따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걸음을 옮기게 될 것을 영으로 느껴지더군요. 함께 손잡고 예배에 참여하고 함께 집회와 부흥회도 다녀오시고 하시면서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 새롭게 변화되었던 사도바울과 같은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그분이 걸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깨달은 것은 불과 몇 초 만에 가슴을 스치며 가슴으로 새롭게 깨닫게 하신 “믿음의 길”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 비추어 주심이 아니었으면 아직은 곤한 몸, 일년여 동안 한번도 나가보지 않은 먼 길을 저는 아마도 감동하심을 외면한 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더라도 미루다가 친구의 차를 타고 인간적인 인사를 위해서 들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잠시 몇 초간이었지만 성령께서 조명하시고 깨닫게 해 주신 참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배웠기에, 조금은 더 주님께 순종하는, 그리고 그것도 즉시로 순종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길에 대해서 조금은 더 가슴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은 믿음의 길은 성경이 말하듯 한편 영적 전쟁의 길이기에 쉬운 길이 아님을 말씀하시더군요. 성령의 능력과 기도와 말씀의 무장 없이는 승리할 수 없는 길임을 알게 하시더군요.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기도와 말씀에 애쓰고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승리, 그리고 우리 속에 계신 그분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크기에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싸움임을 또한 말씀하시더군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경에서 참된 신앙의 길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좁은 길이지요. 좁다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코 육신적으로 안락하거나 편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마냥 육신적으로 안락하고 마음이 편하기만 하다면, 이는 진정한 믿음의 길을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의 길은, 죽을 줄 알면서도 가라면 가야 하는 길입니다. “쿠오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물음 앞에 “네가 도망쳐 나가는 도시로 가서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 간다”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라도 죽을 각오로 가야 하는 길이 참 믿음의 길입니다.


타는 풀부물도 때론 들어가야 하고, 사자의 굴속으로 때로는 던져지기도 하며, 때로는 불이 붙는 장작더미 위에도 주님 사랑, 일사각오로 성령 안에서 웃으며 올라서야 하는 길입니다. 이 글을 적는 동안 눈물이 나옵니다. 통곡이 잠시 나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위해서 그렇게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실 수도 아니 지실 수도 있는 권한이 있으셨는데, 나를 위한 사랑,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사랑으로 오르셨는데, 그런 믿음의 길을 걸어오지 못했기에, 지금도 잘 못하기에 회한의 눈물이 나옵니다.


주님은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자신을 부인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내 것인데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 그 마음 하나 십자가에 못 박아지지 않는 내 자신의 부족함에 통곡이 나옵니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형제자매님들은 어떠한지요? 진정 믿음의 길을 오롯이 걸어가시면서 주님의 사랑에 화답하는 삶을 사셨는지요? 사시고 계시는지요?


아니면 늘 주님께 삶의 필요나 해결해 주시며 무엇이나 해 주시길 간구하고, 주님을 향한 섬김이나 복음 전파가 아닌 마음과 기분의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위하여 성령을 간구하고,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가시밭길은 외면하고 살아오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러셨다면 우리 함께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의 피 흘리시는 그 발에 입 맞추고 함께 통곡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신 그 길, 우리도 한번 용기를 내어서 걸어가 봅시다.


기도의 정과 말씀의 망치를 꺼내 듭시다. 그리고 우리 앞에 버티어 선 자아의 그 산들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저 바다에 던지울 때까지 주님따라 겟세마네 기도를 우리도 드려봅시다. 오늘 아니 되면 내일도 그러하고, 올 해 되지 아니하면 내 년에도 그러하고, 사도바울과 같이 내가 사는 것은 온전히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는 그날까지 그렇게 합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산 어디 있겠습니까.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리 쉽지 않은 길, 그러나 제게는 다소 부담이 되었던 길, 그러나 부끄럽고 작은 순종이지만, 순종하고 돌아온 제게 주님은 그날 한없는 하늘의 기쁨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이기에 결코 육신적으로 안락하거나 편한 삶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다 놀려 다닐 수도 없고, 때로는 텔레비전 드라마도 편하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앉아 있어야 하고 기도하여야 하며, 말씀을 읽어야 하며, 혼자 자아를 날마다 쳐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입니다. 때로는 울어야 하고 때로는 몸부림쳐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좁은 길을 오롯이 걸어가면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주님은 하늘의 능력과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매를 맞고 헐벗고 굶주려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으로 채워주시며, 훗날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면 뭇 천사 보내어 영접하시며,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랑의 눈과 환한 미소로 저와 여러분을 안아주시며 기쁘게 맞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당신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주님을 따라 비록 힘들지언정 정녕 복되고 생명의 길인 좁은 길, 믿음의 길을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오롯이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면 참 좋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그 참된 길로 우리를 “오라”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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