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영성수필] 깨어 있으란 말

초록 등불 2011. 7. 13. 19:12

  깨어 있으란 말

 

건강의 특성상 낮 시간보다는 밤 시간이 활동이 편하여 다소 밤에 주님 앞에서의 시간을 갖고 조금은 늦게 자는 편입니다. 그래서 보통 눈을 뜨면 오전은 잠 지우개로 벌써 지워져 버리고 없지요.


눈을 뜨면 아무도 없는 홀로 빈집,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는 몸, 인간적으로 보면 감사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는데, “주님, 지금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라는 물음에 “감사하고 기뻐하라”하시는 말.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셔서 감사하고, 건강이 악화되지 아니하고 오늘도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고, 가족과 부모형제가 평안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세상이 아닌 주님 안에서 소망을 누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 기뻐합니다. 결국 썩고 죽고 없어질 이 사망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불러주셔서 기뻐하고, 천지를 지으신 지존하신 하나님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시니 기뻐하고, 비록 육신적으로 아픔이 많은 생을 살아왔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는 희락의 불길을 때를 따라 누리게 하시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의 그윽한 눈물을 당신 앞에서 흘릴 수 있는 기쁨을 알게 하셔서 기뻐합니다”고백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도 아직 부족하고 부족한 신앙과 삶이지만, 감정과 기분에 흔들리는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이젠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짧지도 그리고 결코 쉽지도 않은 생의 고난의 여정에서, 가끔은 주님의 삶을 묵상해봅니다.


주님이 계시던 당시에는 이동수단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였지요. 성경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니 잘 알 수 없지만, 대부분 걸어 다니셨을 것입니다. 결코 짧은 여정이 아닌 긴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대부분 걸어 다니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가 나오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혼자가 아닌 제자들과 그리고 동행하였던 사람들과 매일의 먹거리며, 잠자리며, 씻는 것들과 의복 등의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셨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만 고난으로 묵상하곤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가 큰 의미의 십자가에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 긴긴 여정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과 감사함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이젠 우리의 신앙도 예수님을 따라 복이나 바라는 기복신앙이나 기분과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그런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죽을만큼 고민이 되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도 끝내 순종하며 당신 자신을 죄를 위한 번제물로 드리신 것처럼, 이젠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아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우리 자신을 드리는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으면 어버이 된 사랑으로 때로는 몸이 아파도 일을 하러 나가고, 때로 기분이 나쁘고, 때로 직장 상사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 아이들을 위해서 묵묵히 참고 견뎌내듯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모습도 그러해야 합니다.


때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다가와도, 때로 오해와 편견 속에서 핍박을 받아도, 때로는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을 들어주시지 않을지라도, 오직 이 땅에서 행한 것은 선을 행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신 것뿐인데, 당신께 다가왔던 것은 십자가, 죽음의 형벌, 하지만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시던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 속에서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여야 합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궁극적인 우리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 그분의 나라에서 궁극적인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젠 어린아이와 같은 감정과 기분과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어린아이의 신앙을 벗어버리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상하고 변함없는 묵묵한 경외와 섬김의 장성한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광야에서 연단하시고 고난의 풀무불 속을 거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으로 들어가 봅니다.


“오호라! 나는 사망의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난과 시련 속에서 도리어 귀로 듣기만 하던 주님을 눈으로 뵙고, 주님 앞에서 버려야 할 것들을 하나씩 버려가지만, 그래도 육신의 몸을 입은 몸, 발버둥치고 애써도 때로 극복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자신의 연약함,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한없이 울기도 합니다.


한편 성정이 완벽함을 추구하는 편이라 조그마한 것이라도 무너지면, 성격 상 그냥 와르르 무너지고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되곤 하는 편이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많이 힘들어 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의와 성결의 삶에 실패한 날이면 하루의 혼의 마음이던지, 영의 깊은 마음이던지 기분도 좋지 않고 스스로가 싫어질 때가 있곤 합니다. 종종 경험하게 되는 나의 연약함, 어느 하루도 그러한 일들로 스스로에게 낙심하여 종일 누워 자거나 쉬었습니다.


그래도 맡겨주신 사명,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죽음의 길이라도 가라하면 가야 하는 사명의 길, 본래 부족하고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내게 왜 이리도 무거운 사명의 짐을 맡겨놓으셨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명을 감당하려면 기도하고 기도하며 주님 앞에서 우는 길 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저녁 시간 다시금 주님 앞에 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드리다가 “주님, 오늘 저의 삶이 형편없었지요?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더군요.


“내가 너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네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구나. 내가 말씀 속에서 깨어 있으라고 했지, 언제나 내 앞에서 온전하게 살라고 하더냐!”


“성경이 너희에게 온전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더냐. 그렇게 살 수 없기에 율법은 십자가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말하지 않더냐. 내가 너에게 언제 완벽하고 흠이나 티 하나 없는 온전한 삶을 살아라고 하였느냐. 너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죄사함과 구원을 예비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는 말은, 언제나 말씀이 네 속에 살아 있어, 한번 목욕한 자라도 때로 묻는 발의 때는 씻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처럼, 넘어지면 다시금 네 속에 살아있는 말씀을 붙잡고 십자가로 나와서 죄 용서함 받고 새롭게 일어나라는 것이지, 온전하고 완벽하게 살라고 하는 말이냐.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한다하여 낙망하고 좌절하라는 것이냐?”


“말씀 안에 깨어 있으라는 말은 너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며, 그렇게 살지 못한다하여 낙망하고 좌절하라는 말이 아니다. 연약함을 지닌 사람이기에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와 죄의 용서를 믿으며 다시금 십자가에 나와서 부족함을 아뢰고 죄사함을 받으며 새롭게 빛과 생명과 용기를 얻고, 조금 더 높은 성결의 삶을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삶,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온전히 살지 못한다 하여 낙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결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짧은 순간의 계시적인 빛의 비추임으로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감동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완전히는 아니지만 많은 위로가 되고 용기가 나더군요. 완전히는 아니라는 말은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나를 사랑하사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주님 앞에서 그 말씀대로 온전히 살고프니까요.


맞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흠하나 없이 티 하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우리가 마음과 생각으로 품은 실오라기 같은 것들까지 다 죄라고 말씀하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연약하여 다소 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니 자연상태로 마냥 방임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선한 믿음의 싸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속에 주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기를 바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되, 때로 부족하여 넘어지고 실족하더라도 낙망하거나 좌절하여 물러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일수록 더욱 용서의 십자가와 능력 주시는 주님 앞으로 나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 살아 있는 말씀 속에서, 때로 우리가 실족하거나 죄를 범하면,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베드로가 들었던 닭울음 소리를 들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1서에서 연약한 우리에게 얼마나 복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1:9)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때때로 우리의 본성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지 못할 때가 있더라도, 마냥 좌절하거나 낙심하여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요.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유다도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가슴찟는 눈물로 회개하였다면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책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지요.


“말씀 안에서 깨어 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비록 우리가 주의 말씀에 유의하며 죄를 떠난 성결한 삶에 애쓰라는 말씀이긴 하지만, 우리가 온전하게 살수 있다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게 살려 애쓰라는 말씀이고, 때로 실족하면 또한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리라. 가서 아들이 아닌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소서”라는 심정으로 다시금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요?


잠시 말씀을 기록하기 전에 포도나무 되신 주님 앞에 가지로서의 제가 간구하는 기도 속에 주님께서 잠시 이르신 말씀 나누며 오늘의 “깨어 있으란 말의 의미”라는 글과 말씀은 마무리하려 합니다. 끝으로 이르신 주님의 말씀도 귀가 아닌 가슴으로 새겨듣는 저와 여러분이면 싶습니다.


“너희가 비록 부족하여 온전하게 살지 못하더라도 말씀대로 살려는 선한 싸움에 애쓰는 삶을 살아가라. 성령께서 너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신령한 빛이 비추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가까이 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생명이 될 것이다.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며 경건한 생활에 애쓰라.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받지 않고는 너희가 이러한 삶을 살 수 없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능력을 덧입으라!” 아멘!


살전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살전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살전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살전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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