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영성수필] 마리아의 눈물, 나의 눈물 - 읽어보십시요. 한번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눈물의 글입니다.

초록 등불 2011. 7. 21. 17:55

 

※ 마리아의 눈물, 나의 눈물 ※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음성을 들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신가요? 저는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그냥 영으로 눈물이 납니다.


왜냐하면 비록 저의 혼은 알지 못하지만, 영은 주님께서 베푸신 그 놀라운 사랑과 주시는 사랑을 저 영의 깊고 깊은 지성소에서 가득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언제나 화답하지 못하는 부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 생에 잊지 못할 두려움의 날, 아니 그래도 류머티즘성 계열의 증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몸에, 어떤 계기로 문득 찾아온 두려울 정도의 이상하고도 아픈 머리의 통증.


머리의 온 신경계가 얽히고 엉키어 버린 듯한 느낌, 답답하고 무겁고 마치 모래를 눈에 가득 뿌렸을 때처럼 답답하고 유리파편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 느껴지는 느낌과 증상으로 의학적인 검사를 해 보지 않아도, 이건 의학적으로 쉬 밝혀질 몸의 이상도 아니고 앞날의 두렵고도 전율스런 고난이 다가온 것을 알겠더군요.


저를 위해서 기도하시던 기도원 원장이시던 장로님께서 “정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서원하셨고 빨리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자의 길로 가십시요. 지금 머리 밑으로는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라고 전화를 주신 지 꼭 한달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러한 권면을 말씀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서 영적인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서 여러 번 들었지만, 한번도 깊이 있게 생각해 보지 않았고 주님의 뜻을 가볍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내 맘대로 살던 어느 날, 그렇게 제게 큰 육체의 고통은 불현듯 찾아왔었습니다.


아마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요나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만큼이나 두렵고 겪어야 할 고통이 두렵고 전율스럽게 까지 느껴졌습니다.


실상 저는 요나였던 것입니다. 훗날 주님께서 꿈으로 분명히 보여주셨으니까요. 아픈 몸을 부여잡고 고통 가운데 기도하며 지내던 날들 속에서 주님께서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꿈으로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을 몇 번 보여주셨는데, 그 중의 한 꿈이 요나의 꿈이었습니다.


꿈을 꾸니 강대상이 보이고 목사님이 보이는데, 얼굴과 몸의 전부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가슴근처와 손만 보이더군요.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펴시더니 요나서를 펴시고, 성경의 각 권마다 창세기, 출애굽기 등으로 굵게 쓰인 곳이 있듯이 요나서의 그러한 페이지를 펴서 굵게 “요나”라고 쓰인 글씨에 빨간 펜으로 굵게 동그라미를 치며, 제 얼굴, 눈앞으로 아주 가까이 쑥 내밀었으니까요.


어쨌거나 교사근무를 마치고 괴롭고 두려운 맘,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저는 죽을 병 앞에 벽을 향하고 통곡하던 히스기야 왕처럼, 주님의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며 편하게 배 안에서 잠을 자다가 풍랑을 만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처럼, 벽을 향하여 앉아서 “주님”이라고 부르며 한없이 때늦은 눈물을 흘렀습니다.


그 땐 영의 세계를 몰라 그것이 주님의 음성인줄도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면 주님의 음성, 그 한없이 우는 눈물 속에서 주님은 제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비록 마음으로 들리는 음성이지만 천둥처럼 들려왔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힘이 듭니다.


주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주사 나를 구속하시고 지금도 어떠한 사랑을 주시는 영은 알기에, 또 그 사랑에 화답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삶을 사는 것을 알기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 “네 삶의 지금 그 모습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냐?”로 들려와 가장 마음이 아프고 눈물만 흘리게 됩니다.


어제는 개인적으로 조금 바빴습니다. 시내산 예배모임이라고 명명한 오프라인 예배에 다음에 참석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모임을 위해서 기도하며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고 바빴고 또 머리도 다소 아파 맑지 않아서 하루 조금은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그 말은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주 안에서 온전히 영 안에 거하지 못하니 혼이 살아나서 마음엔 다소 먼지도 풀석거리고, 날씨도 덥고 머리도 아프고 하니 신경도 날카로워지더군요. 그래서 아이에게 괜스레 별스런 일도 아닌 것으로 야단도 치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낮이 저물고 식사 후 저녁이 찾아오고야 마음에 다소 여유가 생겨 주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는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낮 동안 다소 경황없이 지냈더니 마음집중이 어렵고 기도가 곧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아벨의 제사가 아닌 가인의 제사처럼 기도의 연기가 흩날리더군요.


그 때 주님께서 내적 증거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성경을 읽으라” 그래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조금 읽고 또 다시 내적 증거를 구하니 “더 읽으라!”라고 말씀하셔서 더 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젠 “찬양 중에서 기쁜 찬양을 부르라”고 내적 증거를 주셔서 또 찬송을 부르고 부르며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말씀 속에서 분요롭던 마음이 정리와 정돈이 되고 찬양 속에서 잃어버린 듯한 성령의 임재와 운행하심이 회복이 되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가인이 아닌 아벨의 제사처럼 하늘로 쑥쑥 곧 올라가는 기도의 시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하게 가졌었습니다.


왜 이런 세세한 이야기를 드리느냐 하면,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는 경건의 순서일 수 있으니까요. 기도가 잘 되지 않고 마음이 흐트러지고 할 때는 차분히 성경을 읽고 또 읽어 보십시요. 마음이 정돈되고 그리고 영적인 빛이 스며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한 찬송을 불러 보십시요. 찬송 가운데 임하시는 주님, 성령으로 임재하시며 마음을 당신 안으로 사로잡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정작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라” 말씀하셔서 읽는 세 종류의 성경책 중에서 현대인의 성경을 펴서 읽던 차례인 요한복음을 읽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난 후 부활하시는 새벽과 아침의 이야기가 나오는 20장이더군요.


그 내용을 살펴보니,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습니다. 마리아는 곧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달려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무덤을 향해서 가봅니다. 두 사람이 달려갔으나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먼저 도착을 합니다. 하지만 먼저 온 제자는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고 모시 천만 있는 것을 보고는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뒤 따라 달려온 베드로는 거침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니 예수님을 계시지 않고 모시천이 놓여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모시 천과 함께 놓이지 않고 따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 때서야 베드로와 함께 온 제자도 들어와서 보고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한 바를 아직 깨닫지 못한 채 다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가지 않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울고 울다가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당시 마리아는 몰랐겠지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하나는 예수님이 누워계셨던 머리맡에, 하나는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때 천사들이 마리에게 “여자여! 왜 우느냐?”라고 물어봅니다. 그 때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 내 주님을 가져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본문을 읽다가 그만 성경책을 바닥에 놓고 하염없이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난 상황 속에서도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아까는 없었는데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관심은 오직 주님께 있었습니다.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검이라도 다시 한번 곱게 손질하고 쓰다듬어 보고 싶어 달려온 마리아의 관심은 죽은 예수님의 시체뿐이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이라도 다시 만나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살아생전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던 그 주님 밖에 마음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음을 보고 돌아갔지만, 무덤 밖에서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왜 우느냐고 물을 때도, “누가 주님을 가져갔는지 모르겠습니다”가 아니라 “누가 내 주님, 나의 주님, 나를 사랑해 주시던 주님을 가져갔는지 지금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울먹이며 말을 한 것입니다.


“누가 내 주님을 가져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는 이유를 말하는 본문의 마리아 이야기를 읽다가 저도 하염없이 울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께 받은바 사랑과 은혜를 잊지 못해서 그 주검, 비록 예수님이지만 곧 어쩌면 보기에 다소 두려울 수도 있는 죽은 시체를 찾아서 시체라도 다시 곱게 단장을 해 드리고 쓰다듬어 드리고 보듬어 드리고파서 저렇게 애달파 하며 울었는데, 같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바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리며 살아왔는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나의 무엇으로 주님을 안아 드리려 했던가.. 자책과 회한의 눈물, 주님 앞에 미안하고 송구한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오! 주님, 언제나 부족하고 연약하여 당신 앞에 부족한 나를 용서하십시요..”


뒤이어 나오는 디베랴 바닷가의 이야기도 제게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인 줄 모르지요. 그러다가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리하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는 말에, 밤새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히는 이적 앞에, 다른 제자가 “주님이시다”라고 말을 할 때, 베드로는 당장 겉옷을 두르고 물에 뛰어 들어 주님께로 달려가지요.


그 모습도 제게 또 소리 내지 못하고 한동안 울먹이게 만들더군요.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정녕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옛날 바다 위로 누군가 걸어올 때 제자들이 “유령이다”라며 놀랄 때 주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을 하지요.


그 때 베드로는 당장 “만일 주시어든 나로 명하여 물 위로 걸어 주님께로 오라 하소서”말을 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이적을 경험해보기 위하여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진정 사랑했습니다. 사랑을 노래한 유행가의 한 가사처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그러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주님께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 “나로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라”는 말에 불어오는 바람도 물결도 보이지 않고 그냥 주님께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뵙고 싶은 마음에 풍덩! 뛰어든 것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도 동일한 마음으로 다른 제자들은 배를 타고 고기를 챙겨 왔지만, 고기도 배도 버리고 그냥 물로 뛰어든 것입니다. 동일한 마음으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무덤 앞에서 다른 제자는 먼저 도착하고도 머뭇거렸지만 베드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거침없이 주님께서 누우셨던 자리로 뛰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마음을 아셨기에 주님은 그를 수제자로 삼으셨겠지요. 비록 주님의 십자가 형 앞에서 두려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다른 제자들은 그냥 다 도망갔는데 멀찌기라도 따라갔던 것이지요. 비록 순간 육체의 고난과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지만 사랑하는 주님을 혼자 가게 버려 둘 수 없어서 따라가고 따라가 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언하신 닭울음소리 앞에서 한없이 울고 통곡하였던 것이지요.


요한복음의 끝자락은 마치 연인의 대화처럼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로 끝을 맺고 있지요.


사람의 중심의 그 모든 것을 보시던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부활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실 터, 수제자로서 베드로가 걸어가야 할 사랑의 고난 길이 얼마나 깊고 아픈 것을 또한 아셨기에, 세 번이나 베드로를 향하여 물어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의 물음 앞에서 주님 같은 한없는 아가페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부끄럽지만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하고 대답하고 한편 주님이 주시고 주신 사랑만큼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알기에 한편 미안해하며 슬프게 대답합니다.


그 때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쳐라” “내 양을 먹여라”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이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 베드로야, 수제자 베드로야, 삼년 동안 나를 사랑하고 따라주며 주와 그리스도로 알고 섬겨준 것이 고맙구나. 그런데 이제 나는 네게 더 큰 짐을 마기고 떠나가야 한다. 네가 젊어서는 마음대로 다니겠지만 늙어서는 두 팔을 벌리게 될 아픔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아프구나. 그렇지만 천국과 영생과 상급은 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므로 네가 정녕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앞으로 다가오는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말고 내가 이 땅에서 해 오던 일, 곧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어린 양들은 네가 먹이고 치고 돌보아주려무나!”


오늘 잠시 밖에 다녀와서 홀로 점심을 먹으면서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지체님들에게 찾아갈까 생각하다 어제의 성경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을 쓰려고 생각하니, 들으면 가장 마음 아픈, 다시금 내면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소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그 옛날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 아주 오래 전 두려운 두통이 시작된 날 벽을 보고 앉아서 두려움에 휩싸였을 물고기 뱃속의 요나처럼 한없이 눈물 흘릴 때 천둥처럼 하시던 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서, 밥 먹던 숟가락을 툭! 떨어뜨리고 한없이 울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글도 펜이 아닌 울먹이며 흘리는 눈물로 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또한 그 사랑에 언제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음도 아십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눈물이 납니다. 부족한 나를 용서하십시요. 당신의 영으로 충만케 하셔서 그 사랑에 화답하는 먼저는 사람, 다름으로 참 그리스도인, 다음으로 참 목회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아멘!


여러분의 가슴에는 “누구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심령을 울리며 들려오지 않으시는지요?


저와 여러분에게는 그 받은바 은혜와 사랑이 감사해서 주검이라도 고이 단장해 드리고 쓰다듬고 보듬어 드리고 싶어 아침도 밝기 전에 무덤으로 달려갔던 막달라 마리아, “주님”이라는 말만 들으면 거친 풍랑의 바다라도 뜨거운 주님 사랑의 마음으로 뛰어 들었던 베드로의 그런 마음이 있는지요?


그 옛날 자신을 사랑하던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디베랴 바닷가에서 많은 것을 함축하여 담아 던지신 물음을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묻고 계실 것입니다. “누구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나를 정녕 사랑하는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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