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설교

[주일 설교] 기도 외에는! - 항상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우리면 좋겠습니다.

초록 등불 2011. 8. 15. 19:40

 

※ 기도 외에는 ※

 

 

 

금번 주일에는 마가복음 9장 14-29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막9: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막9: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막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막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막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9: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막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막9: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막9: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막9: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막9: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막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막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나눈 것은 물론 주님이 감동하셨기 때문인데, 얼마 전에 읽은 장봉운 목사님의 글에서 나름 일리 있는 이 본문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떠올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말씀이나 성경 등의 지식의 범주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물론 특별히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하여 새롭게 계시하시는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우리에게 선지식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말씀하셔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말씀이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서 말씀하십니다.


가령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정신의  “코람데오”라는 용어에 대한 우리의 선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은 코람데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말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폭 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들으려면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고, 또한 영적이며 신앙적인 것들에 대하여 나름 관심을 가지고 선지식의 폭을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 곧 성령님으로부터 더 폭 넓게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장 목사님의 나름 일리 있는 해석에 의하면,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본문에서 “류”에 해당하는 문자는, 헬라어로 게노스인데, 부류, 이런 귀신, 가족, 집단, 국가, 자손, 후예 등등으로 해석되거나 의미가 있고 영어로는 “kind"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들에서 종류라는 의미가 생겨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의 없는 세대여”라는 표현에서의 세대와 같은 의미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헬라어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대라는 의미를 같은 어떤 사상이나 생각에 물들어 버린 군중, 혹은 무리의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


어쨌거나 장목사님의 의미있는 해석을 바탕으로 본문으로 돌아가봅니다.


아들이 귀신이 들러서 고통을 당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귀신은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게 하고 파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아들을 결국 죽이려고 불과 물에도 자주 던졌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들러왔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나사렛에서 오셨는데 그분은 만나기만 하면 모든 병든 것들과 귀신 들린 것들을 고치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소망이 생겼습니다. 나도 아들을 데리고 가서 예수님을 만나기만 이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차라리 자신이 고통당하고 싶을 정도로 보기에 안타깝고 마음 아픈 사랑하는 아들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다는 곳으로 수소문을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시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자 제자들에게 고쳐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남은 제자들은 고칠 수 없었습니다.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자, 여기서부터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그럼 그렇지, 어떻게 저렇게 귀신이 심하게 들린 사람을 사람이 고칠 수 있겠어?”라는 생각과 의식이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이되어 갔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도, 뭇 사람의 무리의 마음에도, 그리고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의 마음조차도 “고칠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부정적인 생각, 불신앙과 의심의 생각이 오히려 모인 군중들로 인하여 군중심리가 되어서 커져 나갔습니다.


곧 “안된다,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의 ‘게노스’, 곧 무리, 부류, 세대가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빛 되신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고치지 못하였고 무리들의 마음도 고치지 못한다는 군중심리의 불신앙이 가득한 가운데, 그래도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자 아들을 고치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주 어릴적부터 저렇게 귀신이 들렀는데,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옵소서”


아마도 아버지는 이 말을 예수님께 하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주 먼 거리지만 유일한 남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찾아왔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백에는 믿음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무리, 세대들의 군중심리 속에서 불신앙이 자리를 거의 자리를 잡아서 믿음보다는 불신앙이 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지, 어떤 귀신이든지 다 쫓아내신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고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왔는데, 그만 군중심리, 곧 세대들에 휘말려 자신도 믿음의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힘들겠다, 안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닌 능력의 주를 만나고도 “무엇을 어떻게 해 보실 수 있거든..”라는 식의 표현으로 말씀을 하였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많은 군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대부분 불신앙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빛이라곤 없었습니다. 불신앙의 어둠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어둠의 한 중앙에서 주님의 목소리가 한 줄기 빛으로 던져졌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을 것입니다. 불신앙과 어둠으로 가득 찬 무리, 곧 세대를 향하여 큰 빛을 비추어 일깨워야 하셨을 테니까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믿음과 능력의 빛 된 생명의 말씀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가장 애타는 마음을 가진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가장 애타는 마음과 갈망이 있었기에 그 빛에서 실낱같은 믿음이지만 작은 겨자씨의 믿음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리고 예수님의 믿음과 생명의 말씀에 무리들의 마음이 한편 깨어나고 술렁거렸겠지요.


예수님은 그 후 당신의 능력으로 그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집에 왔을 때 제자들이 “우리들은 왜 고치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어 보셨을 때,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처럼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질병이나 귀신들림을 고칠 수 없다”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만, 장 목사님의 견해처럼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세대, 곧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을 쫓아낼 수 없다”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 자리에서 강하게 기도하여 그러한 부정적인 의심을 쫓아내었더라면 너희도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역의 현장에서 질병의 치유나 축사의 사건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불신앙의 사람이 있으면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리고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때때로 자신만 들어가거나 믿음을 소유한 사람만을 데리고 들어가서 기도하시곤 하셨지요.


불신앙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요. 단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람에게는 영과 혼이 있습니다. 혼이 물질계를 접촉하고 상대하고 산다면 영은 영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를 접촉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자연인은 영이 죽어 있기에 영의 세계는 알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한 채 대부분 악한 사단과 귀신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영, 곧 속사람이 강건하지 못하면 수시로 사단과 그 나라에 속아 넘어지고 마음과 생각을 뺏기고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혼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본성적으로 타락하여 그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대부분 더러운 죄악들이며 부정적이고 어둡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연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 안에서 깨어 있으며 속사람이 강건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혼의 영역에서 대부분 죄성과 부정성과 어두움의 속성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혼의 영역인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은 “이건 안돼, 안되는 것이야, 불가능한 것이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럼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낼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주는 어두운 생각들을 몰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신앙의 삶 속에서 수없이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지내면 가령 손을 얹어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던가, 귀신이 예수이름의 명령으로 쫓겨나간다는 등의 우리의 혼이 상식과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에 대한 믿음은 고사하고,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신앙의 모든 것들이 무미건조해지고 의미를 잃어가고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경의 말씀처럼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너무도 강한 혼의 영향과 그리고 믿음과 말씀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는 온갖 부정적인 세대, 무리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 역사하는 생명이 되고, 기도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으로 만나며 알게 되고, 교통 가운데 인도하심을 받게 되고, 기도할 때 성령의 빛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산을 들어 바다에 옮길 수도 있다”라는 믿음의 새로운 생명의 세대가 우리 속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는 말은 하나의 비유가 아닌 실제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호흡하지 않으면 금세 죽어버리듯이 우리의 영도 기도하지 않으면 금세 힘을 잃고 무기력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호흡을 쉬지 않고 하듯이 그렇게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마음으로 늘 주님께 기도하고 교통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영은 곧 힘을 잃고 무기력해지고, 타락하고 모든 것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혼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여,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과 긍정이 사라지고, 상식과 논리와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는 모든 믿음의 사라지고 의심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타락한 본성을 좇아 죄의 길로 곧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십시요.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애써십시요. 쉬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요. 기도는 신앙의 뿌리입니다. 영혼의 호흡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도 없으며, 그 생명과 능력을 맛보지도 못하며, 생명과 긍정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능력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의심과 두려움과 어두움과 낙심과 좌절만이 깃들게 됩니다. “오직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습니다” 아멘!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샬롬] 혹 말씀을 가져가신다면 불편하시면 아래링크는 삭제하시더라도 글쓴이는 남겨주셔서 저작권은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늘 평안하시고 행복하십시요 / 네이버 카페원을 위해서 배경음악을 위로 올렸습니다. 네이버 카페원님들은 플레이 버튼을 누르시고 읽으시면 더욱 은혜가 되실 것입니다. 샬롬!

 

 Home  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