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영성수필]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 삶의 어려운 길을 걷고 있습니까? 꼭! 읽어 보십시요.

초록 등불 2011. 9. 30. 15:39

 

※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

 

 

 

어느덧 맞이한 10월, 창가에 서서 한 해를 돌아보고 거울 앞에 서서 잠시 나를 돌아봅니다. 하늘은 더욱 푸르게 높아가고 단풍은 산야를 곱게 물들이겠지만 날씨는 조금씩 차가워져 가고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겠지요.


오늘은 삶의 아픔과 시련의 길을 걷고 있는 분들을 위하여 주 안의 아픈 마음과 사랑으로 글과 말씀을 기록해 봅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목회자의 길을 걷고 걷다보니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왜 그런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는지,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지만 더욱 진정한 목회자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자라는 아이처럼 조금씩 더 깨달아 가고 느껴갑니다.


감당할 자신이 하나도 없지만 주님이 종으로 부르셨으니 어찌할 수 없는 삶,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애절한 마음으로 눈물의 기도를 매일 드릴 뿐입니다.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참 아픈 것 중의 하나는 성도님들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야 그림자도 밟지 못할 사랑이지만, 누구나 그 생의 무게로 무거운 사람의 생,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생도 때로 버거운데 작고 부끄러운 사랑이지만 성도님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조금씩 품노라면 자신의 아픔의 무게와 더불어 무겁고 힘겨워 기도하며 눈물지을 때가 많습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 가운데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또한 비록 본질이 수고로운 우리네 생이지만, 형통의 날에 더욱 주를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 아픔의 날보다 기쁨의 날이, 슬픔의 날보다 웃음의 날이 많은 여러분이길 주님께 맘 모아 기도드려봅니다.


한편 영원에서 바라보면 부질없는 생일진대 솔로몬과 같이 세상의 누릴 수 있는 것들은 다 누렸으나 그 종말이 타락과 어둠이었던 삶보다는 차라리 고난의 긴 세월이었으나 생의 황혼이 아름다웠던 야곱 같은 삶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 드려봅니다. 그것이 진정 복된 삶이니까요.


왜 우리는 어리석게도 형통한 날에 형통함을 주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경외하지 못하고 타락하며, 어둠의 길에서 고난과 시련의 혹독한 사랑의 매를 맞고야 주님께 눈물로 호소하고 돌이키는 어려운 삶의 길을 걸을까요? 고난이 우리에게 오히려 빛과 생명을 주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난은 한편 하나님의 지혜요, 신비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빛과 지혜를 주셔서 감사하고 형통한 날에 주를 더욱 사랑하는 마음 주시고 곤고한 날보다 형통의 날이 많기를 한편 기도해 봅니다.


사람은 한편 참 강한 존재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뛰어난 지능과 재주를 물려받아 저 먼먼 외계도 탐험하고 놀라운 인류문화와 과학문명을 이루어냈습니다. 스스로를 몇 번씩이나 멸망시키고도 남을 가공할 무기들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편 너무나도 약하고 여린 존재이기도 합니다. 너무 어이없게도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으로 인하여도 생명을 잃어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해 버리기도 합니다. 아주 작은 일들로 인하여 기쁨의 하늘을 날다가 또 아주 작은 일들로 인하여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모든 것을 행할 능력을 가진 것 같지만, 실상 일초 후의 미래도 알지 못하고 내 뜻대로 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실상 조금만 생각해보면 모든 것들은 불확실하고 우리네 삶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 실상입니다.


언제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이 찾아올지, 언제 어디서 무슨 불의의 재난과 사고가 나를 덮쳐올지 알지 못하니 불안합니다.


평온한 날에도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불안하고 두렵기만 한데, 지금 내가 걷는 삶의 길이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라면, 차가운 소슬바람이 불어오는 어둠의 골짜기라면, 작은 가을바람 겨울바람에도 사정없이 흔들리는 잎새가 되고 맙니다.


불안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불안의 풍랑이 마음에 불어옵니다. 두려워하려고 하지 않아도 두려움이 마음에 일렁거립니다. 내 속에 있는 마음이건만, 도무지 이 마음이 내 생각을 따라 주지 않습니다. 환경과 사정은 어떠하던지 평정을 찾고 싶고 평화를 누리고 싶지만 내 생각을 마음은 따라주지 않습니다.


격랑과 풍랑이 일렁거리는 달빛 별빛 하나도 없는 캄캄한 밤바다에서 힘없이 흔들거리는 작은 배가 되고 맙니다. 작은 바람에도 힘없이 나부끼는 잎새가 되고 맙니다.


역시 사람이었던 시편 기자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고뇌에 찬 신음을 뱉습니다.


나는 불안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두려워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낙망하고 싶지 않은데, 어찌하여 내 속에 있는 내 것이 나의 영혼아, 너는 왜 낙망하며 불안해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가라는 고뇌에 찬 물음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사람은 참 강한 존재 같지만 정말 연약한 존재입니다. 정말 평소에 강하고 굳건해 보이는 사람도 정작 깊은 고난과 한계 상황적 어둠 앞에 놓이면 힘없이 나부끼는 작은 잎새가 되고 맙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참 유능한 분이 계십니다. 얼마나 삶의 지혜가 대단하신지 유능하신지 보통 사람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큰일을 이루곤 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암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생은 하셨지만 치유를 받으셨지요. 하지만 그 일을 겪고 나신 후 목회자 모임에서 인사말을 전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이도 적지 않은 분이고, 그렇게 강하고 유능해 보이시는 분이셨는데, 그리고 목회자니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굳건하시겠지만, 정작 깊은 어둠 속에서는 홀로 두렵고 불안하셨던 것이지요.


이처럼 사람은 실상 불안하고 두려움에 둘러싸여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항상 이 두려움과 불안에 둘러싸여 살아가야 할까요? 그리고 이 두려움과 불안은 도대체 왜 생겼으며 어디에서 왔을까요?


사람은 본시 두려움과 불안을 모르게 지음 받은 존재였습니다. 평안과 기쁨만을 누리도록 지음 받은 행복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을 누리며 살도록 지음 받은 복된 존재였습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으며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영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안에는 하나님에 속한 신의 성품이외에 다른 것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타락하여 사단과 귀신이 되어버린 천사처럼, 우리도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마귀의 유혹을 따라 욕심을 내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단절이 되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의 존재가 되고만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 모든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은 실상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분의 주권에 도전함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적인 생명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데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굽이굽이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되려면, 그 근원을 알아 답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니 되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환경에서 올까요? 물론 그러한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결코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환경이 유여하고 편안한 사람은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지 않아야 하며, 환경이 어렵고 힘들다면 누구나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죽음 같은 환경과 그리고 두려움의 본질인 죽음 앞에서조차 그리스도인들을 향하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권면할 만큼 그 속에는 두려움과 불안은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기쁨과 소망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소식들 가운데 너무나도 유복해 보이는 환경 속의 사람들이 삶의 행복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행복은커녕 스스로 너무도 깊은 허무와 고뇌 속에서 스스로 생을 정리하는 아픈 소식을 듣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불안과 두려움, 행복과 불행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는 엄마를 만나야만 비로소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찾듯이, 가지일 뿐인 우리 인간은 나무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 접붙힘 바 되어야만 비로소 저 깊은 마음의 평안과 안식, 그리고 근원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부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애정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명예나 쾌락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오는 모든 것들은 유한하며, 한편에 양지가 있다면 한편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두움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온전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어쩌면 이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입니다. 태어난 사람은 아직 영이 어리고 성숙하지 못하여 당연히 땅을 좇아 살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부와 귀와 명예와 사랑과 쾌락 등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도리어 마음의 상처를 가득 안게 됩니다. 행복을 줄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에서 도리어 깊고도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상하고 깨어진 심령이 되어서 울먹입니다. 울부짖습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을 찾으려 울먹이는 눈망울로 땅을 아무리 둘러봐도 행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니 조금씩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늘을 조금씩 만져보고 맛보며 세상이 주는 행복처럼 짜릿하지는 않으나 은은히 들려오는 천상의 음악소리와 같은 하늘의 행복을 맛보며, 조금씩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타락한 혼과 육은 여전히 땅을 바라보려 하기에 갈등과 고뇌가 없지는 않지만, 조금씩 더 눈을 떠가며 영이 성장해 가면서 땅이 아닌 하늘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품는 만큼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어갑니다. 그래서 어쩌면 고난은 하늘이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힘들고 아프나 한편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돌을 품게 된 조개처럼, 쓰리고 아파서 도무지 견질 수 없이 너무도 아픈데 품고 지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주 같은 영적 보화가 내면에서 자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의 날에는 너무도 고난이 싫고 힘이 들지만, 그 세월이 지나가면 그 시간이 흘러가면 “고난 받은 것이 도리어 유익이라”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사람의 불행, 곧 불안과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이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해방되는 길은 이제는 역으로 불순종이 아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가고 그분과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구속하시는 그날까지는 여전히 육과 혼을 입고 있기에, 사도바울과 같이 온전히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지 못하면, 이르지 못한 만큼 하나님을 믿는다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아니 사람이었던 사도바울도 때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는 시간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보면 때로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았다는 고백을 보게 되지요.


그러므로 그의 넘치는 기쁨과 평안에의 고백은 때로 마음의 실제일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힘들어 낙심도 하였지만, 하나님을 향한 능력 주시는 성령 안에서의 믿음의 강한 고백인 것이지요. 사람은 이처럼 연약한 존재이며 연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의 고백과 같이 우리도 신앙의 길을 걷다가 때때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는 시간을 거닐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생각은 불안을 떨쳐버리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은데, 내 것인 내 마음, 내 심령, 내 영혼은 내 생각과 다르게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러한 때에 우리가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나요? 그것은 그리할지라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은 우리가 삶을 길을 가면서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평소에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묵상하면서 심령에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바람이 불어와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요동을 한다하여도 흔들림이 적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누구나 겪게 되는 환난 날에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으십니까? 어두움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남들은 웃고 떠들고 행복해 보이는데 혼자 눈물어린 외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래서 마음에 불안이 다가오고 두려움의 물결이 일렁이십니까? 떨쳐버리려고 해도 떨쳐지지 아니하고 불안과 두려움의 물결에 마음도 삶도 흔들리십니까?


그리하더라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요!”. 두려움과 불안이 일렁거리거든 일렁거리게 그냥 버려두십시요. 그냥 내버려두십시요. 그러나 시선과 생각은 사로잡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십시요. 바라 보십시요.


근원적인 두려움의 본질인 죽음. “죽으면 죽으리라!”,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런 저런 믿음과 담대함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때때로 크게 외치십시요. 그리고 시선과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십시요. 잔잔히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요.


사람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이미 이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면 우리를 더 이상 두렵게 할 것은 없습니다. 불안하게 할 것은 없습니다.


육체를 덧입고 있어서 생물학적 본능으로 고난과 어려움이 다가오면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겠지만, 불안과 두려움이 다가오더라도 내 마음이 아닌 냥 멀리 그냥 버려 두십시요. 그리고 생각과 시선과 마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바라보십시요”


그리하면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처럼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견디고 이기어 나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주님께로부터 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점령해 가시고 풍랑이는 뱃전에서 주무시던 하늘의 평강이 조금씩 그리고 마음에 더 깃들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고만 있으면 고난은 결국 우리에게 유익함과 축복을 가져옵니다. 땅의 썩는 것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것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황혼, 하늘이 부르는 가까운 그 시간엔 고난을 통하여 나를 빚으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합니다.


하지만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길을 걷고 있는 동안은 너무도 아픕니다. 싫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생각을 지키십시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이 우리의 생의 길에 행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영이 어려서 알지 못하여 그러하지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에게서 칼을 빼앗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아이는 그 칼을 가지고 놀고 싶어서 마냥 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을 주시면 감사하고 찬송하십시요. 고난의 길을 주시면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묵묵히 인내하십시요. 도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내함으로 기다리십시요.


생의 길엔 누구나 고난의 광야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아름다운 섭리의 시간입니다. 온유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은 가나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의 가나안, 하늘나라를 안겨 주십니다.


고난의 풀무불을 거치지 않고는 명검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과 훈련과 연단없이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터에서도 주인을 잘 보필하는 훌륭한 군마가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이 깊으면 은혜와 영광도 깊은 법입니다.


형통한 날에도 너무 기뻐하지 말며, 곤고한 날에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요. 생에는 형통의 날도 있고 곤고한 날도 있습니다. 늘 형통하면 늘 태양만 내리 쪼이면 그곳은 죽음의 사막이 되고 맙니다. 형통과 고난의 날들이 어울려 우리를 아름답게 빚어가는 것입니다.


도리어 형통한 날에는 마음을 초장집으로 향하고, 곤고한 날에는 마음을 잔치집으로 향하십시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로운 자의 마음입니다.


형통의 날이던, 고난의 날이던 온유와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십시요. 그것이 마음의 쉼을 얻는 비결입니다. 고난의 바람이 불어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잎새처럼 영혼에 불안과 두려움이 일렁입니까. 그냥 버려 두십시요. 그리고 말씀 안에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요. 그것이 평강의 비결입니다.

처연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결코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생, 죽음의 십자가도 온유함으로 순종하셨던 주님처럼 삶과 죽음, 부요함과 가난함, 사람들의 비난과 판단, 수치와 후욕, 염려와 걱정, 현재와 미래,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요. 하나님의 손길에 믿음으로 온전히 모든 것을 맡겨버리십시요. 그것이 마음의 쉼과 평강,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받는 길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지막으로 형통한 날에 그러한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를 잃지 않아 삶의 길에 형통한 날들이 더 많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고난의 날이라면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신 주님의 음성을 나눔으로 글과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이 말씀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감동으로 깨닫게 하시며 이르시되, “나는 생명이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는 이 말의 의미를 알며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땅에 살지만,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늘에 속한 자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바라보고 품지 않으며 땅을 바라고 품는 자는 결코 진정한 생명과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날마다 기도와 말씀에 힘쓰고 성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이 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 비록 고난이 적지 않은 땅의 길을 걸을지라도 노래하는 참 기쁨과 생명을 누리리라. 나는 평강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자는 평강을 누리게 된다”

“너희는 내가 지었고 나의 사랑일진대, 이르는 모든 말들은 너희의 행복을 위한 것들이다. 나는 살았고 네 뒤에 네 위에 네 곁에 네 앞에 있다. 그러므로 손을 내밀어서 나를 붙잡으라. 나는 결코 나를 찾는 자를 내어 쫓지 않는다. 아니 언제나 사랑으로 기다란다”


“가만히 귀가 아닌 심령으로 귀기울려 보아라. 내가 지은 너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느냐? 나는 사랑이요, 생명이며, 풍성이니라. 내게로 돌아로라. 가까이 오라. 너희를 맞이할 하늘의 잔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너희가 이런저런 일들로 염려하느냐? 내가 일렀거니와 그 염려와 걱정이 너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느냐? 언제나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라”


“이 세상도 너희의 생도 속히 지나가되 나는 영원하고 나를 경외하는 자 또한 그러하리라. 영원을 위해서 살아가라. 본시 너희는 영원한 존재이고 영원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니라” 아멘!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42: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시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시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시42: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샬롬] 혹 말씀을 가져가신다면 불편하시면 아래링크는 삭제하시더라도 글쓴이는 남겨주셔서 저작권은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늘 평안하시고 행복하십시요 / 네이버 카페원을 위해서 배경음악을 위로 올렸습니다. 네이버 카페원님들은 플레이 버튼을 누르시고 읽으시면 더욱 은혜가 되실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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