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영성수필] 깜작 놀란 주님의 말씀 - 주님을 사모하는 심령이시라면 읽어보십시요. 생명과 진리의 글입니다.

초록 등불 2011. 9. 28. 15:38

 

※ 깜짝 놀란 주님의 말씀 ※

 

 

 

오늘은 저를 감짝 놀라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너무도 중요한 영적 진리를 먼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중보의 종교입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과 땀흘림으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더 풍성한 생명으로의 종교이지요. 가장 근본적으로 그 중보의 대표자가 되시는 분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그리고 온 인류 앞에서 중보자가 되셔서 당신의 생명과 피흘림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지요.


그러나 중보의 의미는 예수님의 사역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어떤 역사를 일으키실 때는 반드시 작은 씨앗을 원하십니다. 반드시 작은 씨앗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경륜하시는 영적 원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오병이어가 필요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한 어린아이가 가진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 그 아이도 몹시 배고팠을텐데 안드레가 “주님께 드려보자”할 때 싫다하지 않고 드리는 작은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 작은 헌신의 씨앗이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어킨 것입니다.

 

엘리야를 위해서는 사렙다 과부의 작은 헌신이 필요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생각한 밀가루와 기름을 드림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 살펴볼까요? 성경은 우리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당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특히 예언적인 부분과 관련해서 들을 때 대부분은 조건적인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 등과는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계시하시기도 하지만, 개인을 향한 대부분의 예언은 앞에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도 일반적으로 조건부입니다.


가령 “내가 너를 어떻게 어떻게 복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셔도 항상 그 앞에 생략되고 함축되어 있는 말씀은, “내가 나를 경외하고 내 법도를 지키고 순종하면..” 이라는 말씀이 생략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러한 부분은 언급한 부분도 많이 있지요. 솔로몬이나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들이 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왕상3:1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수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이렇듯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은 대부분 조건부이기에 참 선지자가 아닌 거짓 선지자, 곧 선지자 노릇이나 하면서 예언을 그릇되게 사용하시는 분들의 그 예언의 틀렸을 경우의 탈출구가 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러한 말씀이 있든지 없던지 대부분 조건부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과거의 삶이 아닌 현재의 삶이 제일 중요합니다.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다가 지금 바르게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만, 과거에 아무리 올곧은 길을 걸었다 할지라도 지금 악을 행하고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분노를 삽니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지금의 삶의 길에 우리는 성령 안에서 최선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겔3:20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 지방을 떠나라고 하시면서 “너로 복의 근원을 삼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만약에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떠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였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 복이 갔겠지요.


하나님께서 마침내 진정 아브라함에게 하나의 가능성의 씨앗으로 말씀하신 그 축복의 말씀이 이제는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가 되게 하신 것은 모리아 산에서 실제로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한 그 때입니다.


창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창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 곧 나를 참으로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때에 가능성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통과하고 인정을 받아 이제는 실제의 씨앗이 된 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정말 사람이나 하늘의 존재들도 모르시는 기묘한 방법, 곧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모든 만민을 구원하실 거룩하고 선한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누구의 혈육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실까 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죽게 하시려고 뜻을 세우셨기에, 자신의 아들이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드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너무도 휼륭하게 그 시험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능성으로 주셨던 말씀이 비로소 옥토에 열매가 맺는 실제의 말씀이 되게 하셨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과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만약에 아브라함의 순종함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인류구원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불순종하였다면 연단하고 훈련시켜서 그를 순종의 사람을로 만들어서 그렇게 하셨던, 아니면 다른 사람의 혈통을 통하여 그저 은혜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게 하셨던, 어떻게 하셨던 하나님은 그 사랑의 뜻은 이루셨을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원인과 결과의 신학적 깊은 논의를 떠나서, 우리를 포함한 세상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 배후에는 아브라함의 아픈 희생과 순종의 헌신, 곧 생명의 씨앗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냥 스쳐 읽어가므로 그 깊은 의미와 기쁨과 아픔들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한번 되어 봅시다.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지치도록 기다려 100세 노인이 되어서야 겨우 얻은 귀하고 귀한, 눈에 넣어도 생명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귀한 독자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번제는 아시다피시 완전히 동물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불태워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보면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령 아들이 죽어서 재가 되어도 그 속에서라도 다시 소생하게 하실 분이심을 믿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 믿음이 참이었다고 한들, 아버지로써 아픔과 번민과 고뇌가 없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제라고 하여도 아들이 죽어서 태워지고 재가 되고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는 분명 아들이 겪어야 할 육체적 죽음에 이르는 통증과 극심한 두려움에 아버지로서의 깊은 고뇌는 분명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마음의 진정한 중심을 보기 위하여 3일이라는 아픈 시간까지 주십니다. 어쩌면 그 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하나님 당신이 견디셔야 했던 시간의 예표는 아닐까도 조심스럽게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이 변할까, 또 방해를 받을까, 아내에게조차 말하지 아니하고 아침 일찍 떠난 길, 삼일의 번민과 고뇌를 뒤로하고 모리아 산에 가까이 도착하자, 혹여라도 종들이 말릴까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빈틈이 없는 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통하여 마지막 비수를 아브라함의 가슴에 던집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마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여기서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펑펑 울면서 하나님께 애소를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태워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철석같았습니다.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와 만민이 누리는 복의 뒷면에서는 그 깊이만큼 또한 아팠던 아브라함의 뼈아픈 순종의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여기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하려 함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받는 복의 이면에는 그런 아브라함의 아픔의 헌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피에서 피로 흘러감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생명의 전이의 법칙이요, 원리입니다. 반드시 씨앗이 있어야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그보다 수십, 수백의 열매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가령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이루시고 축복을 주시고자 하여도, 거기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기도의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기도를 씨앗으로 사용하셔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겔36:36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겔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겔36:38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 떼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간증문들을 읽어보면 어떤 선교사님들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다른 어떤 곳에 있는 어떤 분에게 그 선교사를 위한 성령의 강권하시는 중보의 기도의 부담이 주어집니다. 그 사람은 그 부담으로 이유도 모른 채 그 부담감이 사라지기까지 신음하여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그 선교사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곧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이제 시간이 되어서 사형장에 끌려나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원주민들은 갑자기 선교사님이 신인냥 땅에 엎드려 경배를 하고 살려달라고 빕니다.


선교사는 영문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후에 알고보니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눈에 선교사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천군이 큰 칼을 들고 곁에 서 있는 것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로 선교사와 그 중보의 부담을 진 사람이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서로의 기도의 노트와 신앙노트를 비교해 볼 때, 중보의 기도를 드린 시각과 기적이 일어난 시각이 같음을 알고 함께 울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독교는 피에서 피로,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이 흘러가는, 곧 누군가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줄 사람들을 끊없이 필요로 하는 종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없는 짐승이 피를 흘러 당시의 사람들을 대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구원에 관한 대속은 단번에 자신을 드리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대속을 위한 피흘림은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고 사단과 마귀에 얽매이고 포로되어 사는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구원하기 위한 헌신과 희생의 씨앗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한반도 이 땅에도 이만큼 복음의 나무가 가지를 펴고 잎사귀가 무성해진 것은 선교사님들의 거룩한 희생과 죽음, 그리고 일제 식민지하에서, 6.25동란 등의 와중에서도 수없이 복음을 위하여 피흘린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너무도 기초적이지만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여도 그냥 습관적으로, 관념적으로 많이 합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예배에 임재하시고 그곳에 계시고 우리를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관념과 허공을 맴도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억하신바 되고 분량이 차면 역사를 일으키는 분명한 실제입니다.


그 중에 너무도 아름다운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품고 기도하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런데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구원도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랑하는 가족이나 형제나 이웃이나 친구나 친지가 아무리 권유를 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악을 행하고 악을 쌓아갑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남은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 그 사람을 가슴에 품고 중보의 희생을 치루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희생을 치르고 피와 땀을 흘리는 만큼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풍성하게 그 사람에게 생명이 임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의 지식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중보의 기도는 십자가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소모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썩는 밀알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거룩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찰스 피니는 대단한 영적부흥과 영혼을 많이 구원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영혼의 구원을 이룬데는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찰스피니가 어떤 곳에 가서 집회를 하게 되면, 일주일 먼저 갑니다. 그리고 때로는 식음을 전폐하며 그곳에 영혼구원을 받아야 될 사람을 위하여 신음하여 기도합니다. 한번은 그 사람이 거하는 곳에 찰스 피니가 갔더니 주인이 “잘 모르겠어요. 종일 방에 계신데 어디 아픈지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곤 합니다..”라고 말을 하였다지요.


정말로 구원받아야 할 영혼을 가슴에 품고 땀과 피를 흘리고, 식음을 전폐하여 집회가 끝날때까지 그는 중보의 기도, 중보의 전쟁을 치루었던 것입니다. 화려한 열매는 찰스피니가 거두었지만, 한편 그 뒤에는 그렇게 숨어서 피를 흘리며 씨를 뿌린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실제입니다. 나를 위한 간구이던, 중보의 기도이던 실제이며 하나님이 들으시며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씨앗이나 삶의 씨앗이나 언제고 심은대로 거두게 됩니다. 생명을 심었으면 더 풍성한 생명으로, 사망을 심었으면 결국 사망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하면서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주님의 말씀을 나누어보려 합니다. 마지막에 이 글을 쓰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진리지만, 진지한 사모의 열정이 없는 분들은 아래에 기록해 두면 혹 보시지 않을까 해서 앞에 기록한 것입니다.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주님의 말씀은 중보의 중요성과 한편 즉각적인 순종에 대한 교훈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이번 시내산 예배모임 때 환절기라 사실 몸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앞의 예배 모임은 어려울 줄 알았지만 이번은 진행이 될 줄을 알고 있었기에 나름 준비 등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모든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행위, 기도나 찬양이나 예배는 영적 순서는 동일합니다. 성전의 뜰에서, 성소로, 그리고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기도도 처음에는 집중도 잘 되지 않고 흩어지는 연기 같지만 기도하고 인내하면 서서히 성령이 임재하시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지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님들과 더불어 성전 뜰에서 성소로, 그리고 지성소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누리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물론 목회자의 역할이 제일로 중요합니다. 그 자리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면 실패한 예배지요.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고 열납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처음 예배를 시작하면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이 있지요. 어떤 경우는 환경이나 사단에 억눌린 상태의 어둠, 어떤 경우는 죄의 삶으로 물든 어둠, 어떤 경우는 영적 나태함으로 인한 혼미함의 어둠, 이러한 모든 것들을 목회자는 영적으로 분별하며 기도와 찬양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성전 뜰의 영적전투지요.


그래서 한편 참석하시는 분들이 영적으로 충만해져 있거나 그런 분들이 많으면 예배 진행이 쉽습니다. 예배를 마쳐도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고 때론 더욱 충만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초신자나 환경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어둡고 사로잡힌 분들이 많으면 그만큼 목회자는 더욱 힘든 영적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분들을 위한 헌신과 섬김의 땀흘림의 씨앗이 뿌려져야 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풍성한 흘러감을 공급받고 해방이 되니까요.


영의 세계는 속일 수 없는 법, 말씀은 안 드리지만 대략적으로 각 분들의 영적 상태가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분별이 됩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시시각각 분별해가며 성령 안에서 함께 기도와 찬양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주신 승리의 그 이름, 예수 이름과 그 안의 권세와 권능으로 어둠을 쫓아내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목회자는 영적인 피흘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또한 생명은 지체들에게 흘러가는 것이지요.


이번 예배 모임은 다른 요인도 없다고 말씀드릴 순 없지만, 무엇보다 저의 몸이 다소 곤하여 예배 인도가 조금 힘이 들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영의 활동에 장애가 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죄요, 둘째는 우울이나 슬픔의 감정이요, 셋째는 육신의 장애입니다.


죄는 회개하면 됩니다. 가장 어려울 것 같지만 한편 주님의 대속의 은혜 안에서 가장 쉽기도 합니다. 우울감이나 슬픔에 사로잡히면 때론 벗어나기 쉽지 않지요. 그러므로 늘 생각과 마음을 잘 관리하고 그러한 생각이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려 하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 그리고 어둠의 세력의 대적함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아멘! 항상 기쁨을 강조하고 있는 성경, 우울이나 슬픔이나 염려나 걱정이나 불안이나 두려움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오는 것들이 아닙니다. 사단의 나라, 어두움의 나라에서 생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침투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와 선포로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성령의 기쁨의 영, 우리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면 잘 역사하지지 않습니다.


육신의 장애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한번 아프면 금방 낫거나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육신의 건강관리를 잘 하는 것이 한편 영적 생활을 위한 튼튼한 뿌리가 됩니다. 결국 우리는 육을 입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과 교통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군대의 장교가 전쟁을 하다보면 날씨가 좋은 날도 있겠지만, 궂은 날도 있을 것이고 가지가지 상황에 따라 다 맡은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하겠지요. 그런 의미의 훈련이라 생각하고 예배인도에 저로서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애쓰는 만큼 성령이 임재하시고 참석하신 분들이 눈물을 닦으시기도 하시며, 성령의 어루만지심을 받으시더군요. 그리고 예배 말미 즈음엔 주의 영이 임하시고 기름 붓고 계심이 영으로 감지되었습니다. 하늘문은 활짝 열리고 하나님과 주의 천사들과 우리가 언젠가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제이다”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 안에서 주의 임재하심과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하늘잔치가 열려지고 있음이 지각되었습니다.


주의 영은 거대한 기류의 바람처럼 교회를 가득 채우고 운행하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각 심령을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기름을 붓고 계셨습니다. 영으로 지각되고 심령으로 보였습니다. 영으로 지각되니 “지금 주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기름을 붓고 계십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으십시오. 주님을 누리십시요”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말씀을 드리며 살펴보니 주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눈물들을 많이 훔치시더군요.


어쨌거나 3-4시간 가량의 짧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결코 지루하지 않은 주님의 은혜로 승리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몹시도 곤하더군요. 다소의 몸살 기운도 있더군요. 식사는 함께 하고 왔기에 몸을 씻고는 조용히 누워서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히 쉴 겸 큰 방으로 가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재미나게 보고 있는 중반 즈음에 심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내적 음성이 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종일 예배 인도하느라 피곤하기도 하고 또 좀 쉬면서 재밌게 보고 있는 중반이라 그냥 무시하고 늦은 시간까지 쉬었습니다.


그렇게 쉬다가 밤 늦은 시각, 늘 기도하는 시간에 주님 앞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깜짝 놀랄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앞서 너를 기도하라고 명하였고 불렀다. 그런데 너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여기까지는 별로 놀란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제게 너무도 충격적이고 놀랄 말씀이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앞서 너를 기도하라고 명하고 불렀다. 그런데 너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만약에 말이다. 내가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여 있는 어떤 사람의 중보 기도를 위하여 너를 불렀는데, 네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주님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주님께 주의하고,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에 민감하고, 주님이 명하시면 아브라함처럼 즉시로 순종하여야 함을, 때로 한 순간의 불순종이 다른 한 영혼을 영원한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순종의 생명됨과 중보기도의 생명됨을 새롭게 배운 말씀과 순간이었습니다.


말씀과 글이 길어 짧게 요약하기는 어렵네요. 글과 말씀 속에 담긴 영적 진리들을 잘 가려 가슴에 담으시길 기원해 봅니다. 간단히 정리해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전 세대가 우리를 위한 피와 땀 흘림의 씨앗으로 우리가 영적 생명을 누리듯이, 이제는 우리가 훗 세대와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피와 땀의 씨앗을 심어야 하겠지요. 생명에서 생명으로 흘러감이 영적인 법칙입니다. 한 사람이 피와 땀을 흘리는 것 만큼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풍성히 더욱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실제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중보기도는 예수님을 따라 작은 십자가를 지는 너무도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소모하는 만큼 그 기도의 대상이 반드시 생명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의 순종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꺾고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것도 아브라함처럼 명하시면 즉시로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당신의 뜻을 온전히 그 사람을 통해 이루어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이 글과 말씀 속에 담긴 영적 진리를 가슴에 새겨, 한 단계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봅니다. 아멘! 샬롬!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막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1:18 곧(즉시로)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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