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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수필] 두려운 간증, 당나귀의 혀 - 꼭! 읽어보시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길 함께 애쓰면 싶습니다.

초록 등불 2011. 10. 4. 16:01

 

※ 두려운 간증, 당나귀의 혀 ※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속에 기이하고 한편 특별한 기사도 가끔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진하여 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일과 그들의 수가 많다는 말을 듣고 공포를 느낀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기기 위하여 자기 고향 브돌에 살고 있는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 오라고 사람을 보내어 시킵니다.


그것은 그가 발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시고, 또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심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발락은 발람에게 뇌물과 함께 그의 종들을 수차례나 보내지요.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다가 나중에는 가기는 가되, 당신의 입의 말만 전하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그들을 따라가는 가운데 재미난 일이 발생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발람을 죽이려고 서 있는 것이, 발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나귀의 눈에는 보인 것이지요. 그래서 나귀는 밭으로, 또 담벼락에 몸을 비벼대며 두려워서 피하고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발람은 나귀를 채찍질 하고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곤 하지요. 그 때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처럼 말을 하게 합니다. 이 사실을 보면 동물들로 비록 우리와 의사소통이 원활히 되지 않아서 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몰론 이 특별한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당나귀의 입을 움직여 소리를 낸 것일 수도 있겠지요.


나귀가 입을 열어서 말을 하기를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립니까? 나는 오늘까지 당신이 평생 타고 다니는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칼을 들고 선 것을 보게 하시지요. 그제야 발람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지요. 성경을 보면 발람은 나귀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사자가 발람을 죽였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왜 이렇게 화를 내시고, 또 나귀의 입을 열어서 아둔함을 깨우치셨는지는 베드로 후서에 잘 나옵니다. 발람은 불의의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벧후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벧후2: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어쨌거나 그러한 일을 겪고 발락의 사람들을 따라간 발람은 발락의 수차례나 거듭되는 간청에 바못-바알 산에서 수차례나 예언을 하게 되지요. 그 때마다 발람은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를 해 달라고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라는 말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저주가 아닌 축복과 미래의 일들에 대하여 4번이나 예언을 하게 되지요.


뇌물을 사랑하여 발락의 요구대로 그들을 저주하고 물질을 갖고 싶었으나, 자신의 입과 혀였으나 자신을 죽이려는 하나님의 사자를 본 두려운 상황 앞에서 결코 자신의 뜻와 의지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강권적으로 입을 열어서 말하게 된 당나귀처럼요.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살아서는 아니됩니다. 철저하게 그분의 뜻과 의지를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깊은 기름부음과 영적인 능력과 큰 사명과 소명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개 무명의 사람이 그릇행하는 것과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그릇행하는 것의 일의 파장이 결코 같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붙들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은 더욱 엄하며, 순종할 때 주시는 축복 또한 크지만 그릇행할 때의 형벌 또한 큽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발람은 당시 모압왕 발락이 전해주려고 한 물질에 눈이 어두워 영적으로 어두워졌고 그로 인하여 당나귀도 보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한 것이지요. 결국 그는 나중에 이러한 불의한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일의 과정에서야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였지만 그의 내면으로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고 그러한 과정들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모압여자들의 관계 속에서 이방신을 섬기게 되고, 이방신전의 행위의 음란한 행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큰 재앙을 간접적으로 가져오게 하였지요. 이로 인하여 그는 죽음의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계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과 영권을 덧입기를 사모합니다. 강력한 영적체험을 하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영권과 은사와 능력을 덧입거나 강력한 영적체험은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그 깊이만큼의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은사와 능력은 그냥 자신의 즐거움이나 혹은 자신의 과시를 주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동기로 간구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며, 성령 그러한 능력과 은사와 영권을 부여받는다하여도 십중팔구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되며, 결국 발람과 같은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으로부터 강한 영권을 받는 것은 한편 축복이지, 한편 두려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강력한 영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의 기사와 이적 때문에 한편 인정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러지 못할 때에는 작은 실수와 불순종에도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과 심판도 감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러하지는 않지만, 또 한편 강력한 기름부으심을 받은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이후로 편안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대부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과 고초, 그리고 순교의 피 또한 흘려야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깊은 영적 은혜를 받음은 깊은 사명과 육신적인 고난이 도리어 기다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깊은 기름부음을 사모하고 영권을 덧입기를 사모하는 마음이전에,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이며, 얼마나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하여야 하는 길이며, 또한 얼마나 엄중한 책임과 또한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길인가를 깊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깊은 기름부음과 영권을 주시기 전에 일반적으로 엄청난 시련과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시며, 칼과 창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주인의 말대로 달리는 군마처럼 아름다운 순종과 겸손의 사람으로 조련하시고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감사하고 축복된 길이기도 하지만, 정말 두렵고도 떨리며 어쩌면 육신적인 고난도 수없이 많은 세계가 구약이나 신약이나 사도나 선지자와 같은 깊은 기름 부으심과 영권을 받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언을 하거나 무슨 능력을 행하곤 할 때는 사람들에게 환호성과 칭송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의 삶에는 엄청난 자기부인과 고난과 고독의 삶이 동반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그러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나 혹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절대로 명심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자신은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누구에게보다도 집요하게 공격하는 사단의 공격에 무너져서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으로 도리어 가게 되는 수가 허다함을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나 체험의 깊이가 깊을수록 겸손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절대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죽음과 멸망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일에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의 정신과 마음 가운데서 주님께서 하신 겟세마네 기도의 정신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의 마음과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보면 진정한 기도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란 내 혼의 육적인 생각과 마음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 안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물론 때때로 혼적인 기도도 필요하지만,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가 참된 기도요,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그래서 저는 별로 혼의 기도를 잘 드리지 않습니다. 그냥 성령 안에서 영으로 대부분 기도합니다. 그렇게 영으로 기도를 드리다보면 혼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가령 육신의 생각은 건강과 편안함을 간구하고 싶은데, 영은 고된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참된 진리의 사람으로 세워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나를 위한 기도일 것을 알기에 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려 애를 씁니다.


중보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분들이 중보기도를 부탁하면 사람인지라 이러저러한 어려움을 두고 그것에서 벗어나고 해결받기를 위해서 기도부탁을 하십니다. 목회자의 일 중의 두 축이 말씀과 기도라, 기도부탁을 받으면 매일 해드리지는 못해도 기도노트를 보면서 종종 해 드립니다. 요즘은 나름 많은 분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육으로 그분들께서 부탁한대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진정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성령을 따라 중보 기도를 해 드립니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다보면 그들의 부탁과는 달리 성령께서 기도하고 계신 것을 때때로 보게 됩니다.


가령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속히 광야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요청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을 두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광야에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순종하심을 잘 배우고 고난과 연단의 시간을 잘 견뎌, 아름답게 그 영이 성장하여 진정한 평강과 축복의 가나안을 누리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를 드리게 되지요.


이렇게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조금은 무섭고도 특이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무섭다는 것은 그 중보기도의 대상자를 생각할 때 무서웠고, 특이하다는 것은 처음으로 겪는 일이라 특이하였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분 저 분들을 위하여 성령 안에서 중보기도를 드려오는데, 어떤 분을 위하여 기도하니 성령께서 중보 기도를 막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영으로 기도하면서 분별하니, 다른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비유컨대 자전거를 타고 간다면 체인이 제대로 연결이 되어서 제대로 성령 안에서 힘을 받고 제대로 돌아가는 듯한 기도인데, 그분만을 위해서 기도하면 자전거 체인이 벗겨져서 헛돌아가는 느낌이고 성령께서 얼굴을 돌리시고 외면하는 듯한 선명한 느낌과 함께 기도가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이상하였지만 그래도 그분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 드리고 싶어서 기도하려 애쓰니, 너무나도 이상한 느낌, 무엇인가가 막아버리고 자꾸만 기도가 헛도는 느낌, 자꾸 기도드리려 하니 급기야는 처음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말할 때 강권적으로 혀를 움직이셨듯이 성령께서 제 혀를 강권적으로 비틀어 버리고 막아버리셨습니다. 기도를 하다말고는 마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언청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게 되고, 혀를 강권적으로 비틀어버리시니 혀나 입의 느낌이 너무도 이상하였습니다.


다른 분을 위해서 다시 기도하면 정상적으로 기도를 드리게 하시는데, 그분만은 기도를 시작하면 동일한 현상으로 기도가 헛돌고 성령께서 입과 혀를 강권적으로 막아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분을 위한 중보기도를 성령께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시고 강권적으로 저의 입과 혀를 막아버리시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좋은 느낌의 일은 아닌, 그분을 생각할 때 조금은 두렵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통하여 너무나도 불행한 두 여인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여인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서 읽은 것이 기억나고 다른 한 여인은 누군가의 천국지옥 간증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을 보면, 아직 살아 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멸망과 형벌이 정해진 가련한 한 여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목회자의 아내 사모입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하여 목사님과 함께 영적인 사역을 잘 감당합니다. 그런데 상당히 예쁜 여성이었던가 봅니다.


사단이 그의 귀에 생각에 속삭입니다. “너는 예쁘고 아름다운 여성이야, 힘든 일 던져버리고 멋진 다른 남성과 함께 연애도 하고 부와 명예와 쾌락을 누려라” 지속적으로 유혹합니다. 처음에는 넘어가지 않다가 결국은 넘어가서 남편과 헤어지고 다른 능력 있고 멋진 남성과 연애도 하며 부와 명예와 쾌락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히브리서 6장 4-6절에 해당하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짓고 맙니다. 히브리서의 이 죄는 성령 훼방죄와 함께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요, 영원한 멸망과 죽음이 확정되는 죄입니다. 그 여인은 분명하고 똑똑한 자기 의지로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합니다. 그로 인하여 아직 육의 생명은 살아 있으나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죽음과 멸망이 확정됩니다.

그래서 해긴 목사님이 그 여인을 위하여 기도하려 할 때에 주님이 하시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영원한 죽음이 확정되어지고 유기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두려운 일입니다.


히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히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정말 두렵고도 무서운 일이며, 정말 그 여인의 남은 운명은 참혹한 것이지요. 도리어 타고난 미모가 그녀를 멸망으로 이끌어 간 것이고, 유혹에 넘어가게 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가 가진 좋은 것들이 우리를 멸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된 것들을 정말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진정한 축복을 누리도록 한시도 마음의 경계를 잃어버려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부요하여져서 도리어 멸망하고, 명예와 권세를 얻음으로 도리어 멸망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한 여인은 지옥에 가 있던 여인인데, 이 여인도 주님을 사랑하며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남편을 많이 사랑하였기에 질투의 화신이 되고 맙니다.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뒤에 깨닫고 아내에게 몹시도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의 화를 다스리지 못하여 급기야 남편을 살해하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화가 날만도 하고,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여 그런 일도 어쩌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누가 용서를 구하면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해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마져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였고 그 미움과 증오와 질투의 마음이 사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생각은 사단에게 사로잡혔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은 믿음도 잃어버리고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그녀의 인생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영적 간증은 절대화할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의 경종의 자료로 한번 생각해 볼 순 있겠지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저인지라, 성령께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시고 강권적으로 기도를 막는 경험 앞에서, 그분을 생각할 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또 무슨 연유로 성령께서 기도를 막으시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또 강권적으로 당나귀의 입과 혀를 움직이게 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기도를 막으시는 것을 보면 분명 좋지는 않은 일, 그분을 생각할 때 다소 두려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글과 말씀을 통하여 제가 나누고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정말 우리는 그분을 경외하고 한편 두려움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속히 회개하여야 하며,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다시는 사하심이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결단코 지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편 공의의 하나님, 우리의 생이 끝나고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우리가 행한 대로, 준엄하게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하고 어린아이처럼 생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한편 뜻이지만, 또한 진정으로 창조주이시요, 주권자이시요, 절대자요 지존자이신 공의의 하나님도 되심을 잊지 말고, 그분 앞에서의 경외와 겸손과 순종의 삶 또한 분명히 가슴에 새겨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 앞에서 그런 복된 생이 되시길 기원 드립니다. 아멘!


민22:28 그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고 사람의 말을 하게 하셨다. 나귀가 발람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였다고 이처럼 세 번씩이나 나를 때리십니까 ?'


민22:29 '네가 나를 이렇게 바보 취급하지 않았느냐 ? 내 손에 칼만 있었다면 너를 당장 베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고 발람이 말하였다.


민22:30 '나는 일생 동안 주인님이 타고 다니던 나귀가 아닙니까 ? 이제껏 지금처럼 마구 날뛰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습니까 ?' 하고 나귀가 볼멘소리를 하였다. '없었지' 하고 발람이 대답하였다. [현대어성경]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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