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가위를 들고 가지를 싹둑 잘라버립니다. 그리하면 가지엔 아직도 잎도 싱싱하고 꽃도 피었으나 그 가지는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그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존재속성의 문제를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셨지요.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요, 축복과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그 근원되신 하나님으로 떨어져, 비록 하나님 안에 속했으나 참으로 속하지 않은 버려진 존재가 되었지요.
그러한 죄로 인하여 사망의 어둠으로 떨어진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피를 흘리신 거지요. 그 사랑의 수고로움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참된 하나가 될 축복을 받은 것이구요.
이 단순한 진리, 하나님 안과 밖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나 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요, 생명과 사망의 차이이지요.
이것을 깊이 알았던 사도바울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을 하였지요.
바울에게는 베냐민 지파이거나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거나 바리새인이라는 사실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가 궁극적으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뿐이었습니다.
새롭게 된 존재는 당연히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 새롭게 되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밝히 깨달았던 바울은 그의 삶과 뜻과 생각, 그 모든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의 존재와는 다른,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임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에게도 사도바울과 같은 이러한 새로운 존재의식이 분명히 자리 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석같이 귀한 새로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에 어울리는 별빛과 같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의 뜻과 의미를 새롭게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알아 새로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새로운 길을 걷는 자는 과거의 혈과 육의 썩을 생명이 아닌 새로운 하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생명의 연합 속에서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사도바울과 같은 보석처럼 귀한 새 피조물에 어울리는 별빛처럼 아름다운 삶의 뜻과 소명이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새로운 길을 걷는 자에게 공급하시는 그 하늘의 참 생명력을 충만히 누리고 있을까요?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