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음모우 ~

초록 등불 2011. 10. 13. 18:00

 

※ 음모우~ ※

 

 

 

자동차에 시동을 걸 때에 키를 넣고 돌리면 장착된 축전지로부터 전류가 공급되어서 전동기가 “겔겔겔..”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면서 엔진을 돌려서 “웅웅..”하고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차는 동력을 받게 되고 전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먼저 전류로 전동기를 돌리고 그 동력에 의하여 엔진이 돌아가면서 점점 예열되어서 빠른 속력으로도 충분히 달릴 수 있는 동력이 엔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시절 성령의 불세례를 받고나니 이와 마찬가지로 늘 성령의 전동기가 엔진과 같은 저를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지내거나 말씀을 보지 않고 지내면 “기도하라, 말씀을 읽으라” 성령의 전동기가 돌아가면서 저에게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고는 말씀을 읽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목마른 심령이 되어서 교회당으로 뛰어가서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고는 하였습니다.


성령의 전동기 동력에 의하여 심령으로 교회의 예배시간이 애타게 기다려지고 예배다 집회다 하는 모임에는 불타는 심령이 되어서 달려가곤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함께 성령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나 저의 심령을 살펴보면, 세월이 지나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성령께서 그 역할을 바꾸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전에는 성령께서 전동기 역할을 하고, 내가 엔진이 되어서 성령의 동력에 의하여 거의 타의적으로 불타오르곤 하였는데, 이제는 역할이 바뀌어서 제가 전동기 역할을 해야 성령께서 엔진처럼 타오르고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물론 은은한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과 내적증거는 늘 있지만, 처음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처럼 먼저 전동기가 되셔서 타의적으로 제가 기도하게 하거나 말씀을 읽게 하거나 하는 역사가 잔잔해진 것을 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분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대동소이합니다.


물론 연속되는 집회나 영적인 일들에 끊임없이 사역하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그 집회나 사역을 위하여 성령께서 늘 활활 불타오르게 감동하시지만, 자신만의 여유와 시간을 가지면서 사역하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성령의 감동감화는 평소엔 은은해지고 잠잠해집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불같은 역사를 불러일으키려면 내가, 우리 자신이 먼저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역사를 이끌어 내어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느 정도 성숙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숙할 시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어릴 적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들 모두가 다 돌보아 줍니다. 우유도 먹여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아이는 그냥 모든 것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나도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스스로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나아가 더욱 장성하면 이제는 스스로 땀 흘려 일하며 부모님을 공양하기도 하여야 하고,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게 되면 부모로서의 역할도 하여야 하지요.


그렇게 부모가 되면 가령 때로 몸이 아파도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일터로 나가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장한 모습이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는데도, 마냥 아이처럼 밥 먹여달라, 옷 갈아입혀 달라, 씻겨달라 하면 이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사람이지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에 성령의 세례를 받고 영적 아이로 태어나면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씻겨주시고 어머니 되신 성령께서 전동기가 되어서 엔진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십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성장하게 되면 어머니 성령님은 이제 우리 스스로가 움직이고 애쓰고 땀 흘리는 법을 배우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싶지 않아도 기도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기 원하시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도 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시고, 때로 하나님이 어려움의 길을 걷게 하시고 힘들게 하셔도 묵묵히 인내하고 참 신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냥 처음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와 같이 늘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우리가 타의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예배하고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게 된다면,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상급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장성하고 성장하여 기도하는 것이 때로 힘들고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는 것이 때로 힘들고, 봉사와 섬김과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 힘들지만,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것이 우리의 상급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거나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지 어언 오래건만 여전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전하는 서신에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지요.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리고 육신에 속한 자들의 삶의 현저한 모습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리고 성령 안에서 영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일까요? 물론 우리에게 육신에 속한 모습과 신령한 것에 속한 모습을 대부분 함께 지니고 있지만, 예수를 믿을 때나 믿지 않을 때나 별반 다른 것이 없는 자연인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는 분명히 육에 속한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말씀처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려는 성령 안에서 힘을 다하여 자신도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이 있다면 이는 신령한 사람에 속하겠지요.


우리는 어릴 적에 철없는 아이들을 보고 어르신들이 “망아지 같은 놈아”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듣곤 하였지요. 망아지는 말의 새끼이고 송아지는 소의 새끼인데 아마도 말의 새끼가 좀더 짓궂고 장난기가 많은 모양이지요.


말은 집에서 키워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소는 키워보아서 소에 대해서는 조금 압니다. 소개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일 때는 주인들이 그냥 어미 곁에서 마음대로 뛰놀도록 그냥 두지요.


그렇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성숙해진 모습이 보이면, 요즘엔 무엇으로 하는지 모르지만 제가 어린 적엔 가마니를 깁는 날카로운 쇠로 양쪽 코 사이에 구멍을 뚫어서 코뚜레를 끼웁니다. 코뚜레를 뚫을 땐 몹시 아프기도 하고 해서 발버둥도 치고 또 없던 코뚜레를 끼고 나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움직이면 아프니 “아야.. 음메에..”하고 울어대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제는 주인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가지 않으려도 해도 예민한 코에 구멍을 뚫어서 코뚜레를 끼워놓았으니 아파서 안 따라다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따라나서면 주인이 짐수레를 채우기도 하고, 밭을 가는 쟁기를 채우기도 하면서 일을 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냥 엄마 소 곁에서 폴짝거리기도 하면서 놀 때는 너무 좋았는데, 이게 무슨 무거운 십자가냐? 주인이 그냥 두지 않고 짐수레를 끌게도 하고 쟁기질을 하게도 합니다. 힘들어서 벗어버리고 싶은데 코뚜레 때문에 벗어날 수도 없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주인에게 혼이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러가면 그러한 생활에 철없던 소도 익숙해집니다. 이제는 주인이 억지로 끌지 않아도 “오늘은 어디 가는 모양이다” 스스로 눈치로도 길을 나서곤 합니다. 이전에는 억지로 끌던 짐수레나 쟁기질도 이젠 내가 해야 하는 일이려니 생각하는 듯 군말 없이 힘들어도 땀을 흘려도 주인의 말에 순종합니다.


가끔 너무 힘들면 어릴 때처럼 “음메에..” 가벼운 소리가 아닌“음모우~”하고 큰 소리로 한번 울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인과 함께 비지땀을 흘리곤 또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 주인이 주는 여물을 먹고 편안히 쉽니다.


소는 생각이 없어서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지만, 주인의 눈에는 참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코뚜레도 끼워지지 않고 어린시절 망아지나 송아지처럼 커서도 그렇게 지내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소도 그 존재의 가치가 별로 없겠지요. 그렇지만 비록 고되어도 주인에게 길들여져서 그렇게 땀을 흘리고 함께 땅을 일구어 사람들에게 양식을 먹게 하면, 마냥 뛰어놀던 어린시절과는 존재의 의미와 삶의 의미가 전혀 다르겠지요.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성숙한 모습을 기대하십니다. 언제나 어린아이마냥 망아지나 송아지마냥 제멋대로 뛰놀고 이곳저곳을 어지럽게나 하는, 자신은 편한지는 몰라도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코뚜레로 길들여지고 순종이 몸에 익어서 힘들어도 묵묵히 땀을 흘리며 당신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그런 성숙한 모습을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시절에는 성령께서 전동기가 되어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다 보살펴 주시듯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장성하여 질 즈음에는 성령은 보혜사, 그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곁에서 ‘주관자가 아니라 돕는 자’가 되시고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자발적으로 일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렇게 망아지나 송아지의 모습이 아닌 말씀의 코뚜레가 끼여지고 순종이 몸에 배여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숙한 소가 짐수레를 끌듯이, 쟁기질을 하듯이 분명 우리의 사명과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수고로움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골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주님의 일과 신앙생활을 감당하다보면 때로 땀도 흐르고 힘도 듭니다. 심하면 살 소망마져 끊어진 것 같은 순간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녕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만약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것은 다 싫다하고 구원이나 축복만 바라고 망아지나 송아지처럼 제 맘대로 편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는 아직 육신에 속한 자요, 어린아이의 신앙인인 것입니다. 만약 신앙의 연륜이 오래인데도 여전히 그러하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엔 마치 자라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안타까운 영적 장애인인 것입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참된 신앙의 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어찌 편하겠습니까?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눈물도 나고 때로는 피도 흘리겠지요. 그러나 참된 신앙의 길은 그런 것입니다.


주인이 짐수레를 처음 채우면 억! 소리가 날 정도로 소도 힘이 들겠지요. 언덕배기를 오르자면 때론 죽을 맛이겠지요.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수고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짐을 지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장성한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 것입니다.


때로 머나먼 여정을 다녀와서 소가 밤중에 힘들어서 “음모우..”라고 울어대면 주인의 마음에 안타까움도 있겠지만, 얼마나 소견 대견스러워 보일까요? 점점 얼마나 주인의 사랑을 받게 될까요? 비록 힘이 들지만 그 소의 존재의 가치와 의미는 점점 커져만 가겠지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의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수고로움을 반드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힘들어서 고된 노동에 “움모우..”라고 깊은 소리를 내듯이 우리들도 때로 “주님~”하고 눈물로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삶을 사는 소의 존재가 가치롭듯이, 그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말할 바 없이 가치로운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수고의 땀과 눈물과 혹 때로는 피를 흘릴 수도 있지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주님의 원칙 안에서 멀지 않은 날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을 때 “네가 죽도록 충성하였으니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라”는 주님의 감격어린 칭찬과 함께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연륜과 또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지 오래건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로써, 현저한 육신의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주님이 맡기거나 채우려는 조그마한 짐도 지지 않으려도 망아지나 송아지처럼 달아나버립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장성한 소가 여전히 제 멋대로 뛰어다니면서 곡식밭을 망쳐놓기나 하는 모습이나, 다 큰 어린이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한테 “밥 떠 먹여줘”라고 말하는 사는 비정상적이며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병든 모습과 하냥 일반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갓 태어난 어린신자가 아니라면 이제는 장성한 분량의 믿음으로 자라나기를 애쓰고 자라나서 주님이 어떤 묵직한 짐수레를 채우시더라도,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도리어 땀 흘리고 수고하는데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를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 힘들어도 기도의 삶에 늘 성실하여 성령의 불과 기름부으심을 날마다 공급받아야 하며, 때로 힘들어도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며 묵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며 또한 이웃사랑에 애쓰며,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르치심을 따라 살아가려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록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감동하신 말씀을 나누어 봅니다.


“너희 각자에게는 다 나름의 사명과 소명이 있다. 어린아이의 도를 버리고 성장하여 능력으로 감당하여라”


“세상엔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역사가 얼마나 많으냐. 그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은 또 얼마냐”


“너희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하여 먼저 부름받은 그리스도, 곧 나의 군사가 아니야. 떨쳐 일어나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하여 참된 일꾼이 되어다오. 군사가 되어 다오”


하루 종일 짐수레를 끌며 쟁기를 끌며 힘들고 수고로워 때로 “음모우~” 깊은 소리를 내는 소가 주인의 눈에 얼마나 사랑스럽고 가치로워  일까요? 마찬가지로 때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다 때로 힘들어서 눈물로 “주님~”하고 부르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주님의 눈에 사랑스럽고 가치로워 보일까요? 그리고 주님은 얼마나 귀한 손길로 당신의 나라로 우리가 오늘 그 날에 주실 상급과 선물에 사랑을 담아 예비하고 계실까요?

저와 여러분 모두 이제는 어린아이의 도를 버리고 믿음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서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사명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백하며 자신의 사명에 진력을 다하였던 사도바울처럼 아멘과 감사함으로, 비록 힘들 길일지라도 상급을 위하여 운동장에서 달음박질하는 사람인듯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우리면 좋겠습니다.
 

계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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