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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카이나 (외공과 내공)

초록 등불 2011. 12. 6. 17:15

 

  쉐카이나 (외공과 내공)

 

이얍! 탓! 타타타타.. 공중으로 날렵한 제비처럼 도약하여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밟으며 홱홱! 날아다니면서 현란한 검술을 펼칩니다. 그리고는 나뭇잎에 사뿐히 내려 잠시 서 있습니다. 그리고는 햣! 기합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한없이 치솟아 오르니 반 시진 정도 하늘이 고요합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고요한 적막의 시간, 하늘과 땅도 간 곳 없어지고 나와 검이 한 몸으로 일치된 순간, 이얍! 대갈일성을 토하며 빛살처럼 검을 내리베어 하늘과 달을 베어버립니다. 하하하. 마치 무협지 읽는 것처럼 재미있지요.


작년 급작스런 건강 악화 이후 건강관리를 위하여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필요성은 느끼지만 몸의 움직임이 싫지요. 그래서 한동안은 산책과 함께 운동을 하다가는 그냥 또 중단하게 되곤 하더군요.


그래서 아니 되겠다 싶어서 무슨 대책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가서 걷거나 이러니 운동을 안하게 되는구나. 운동을 할 수 있게 무엇인가 재미를 들여보자 하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무술입니다.


제가 무술을 한다면 저를 아는 모든 친구들은 웃을 겁니다. 정말 운동신경도 둔하고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요. 학창시절 제일 가슴이 두근거리던 시간이 백 미터 달리기, 처음에는 제법 앞서기도 하는데, 골인지점에 가면 저의 뒤에는 늘 아무도 없었지요. 그러니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서 정말 싫었습니다.


그런 제가 이런저런 필요로 무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운동의 필요성이고, 둘째는 겪는 상황들이 너무 어려워서 무사도 정신이 아니면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무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장에 나가서 배울 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오랫동안 운동할 체력도 되지 않고, 일도 많아서 여유도 없습니다. 그냥 목검, 봉 등 몇 가지 무술 연습 및 수련용 기구들을 사서, 무술 동영상을 보면서 기본 동작을 조금 익혀서 밤 시간에 한적한 뜰에 나가서 혼자 스스로 조금씩 익혀 봅니다.


무술 세계도 들여다보니 검, 도검, 봉, 곤, 창 등 18병기라고 불리는 다양한 무기, 거기다가 권법 등을 다 살펴보니 너무도 다양하고 깊고도 넓더군요. 고수들의 동영상 시범을 보면 부럽기가 한량 없지요.


그래서 가끔 밖에 나가면 첫 서두의 글처럼 마음으로는 하늘을 날고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기도 하고, 부양술을 익혔다 상상하며 나뭇잎 위에 가만히 서 있어 보기도 하고, 검선이라고 불렸던 사람마냥 하늘에 치솟아 달을 베는 상상도 혼자 해보곤 합니다.


오늘날에는 조폭이라고 불리고 그들의 삶이 참 불한당같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이전 시대에는 궁극적으로야 악한 세계였지만, 그래도 주먹세계가 나름 의리가 도가 있었지요. 대부분 싸움을 하여도 정당하게 다투었고 그리고 패배자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곤 하였지요.


그런 싸움판의 전설적인 인물로는 우리가 잘 아는 시라소니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지요. 김두한 등도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책들을 살펴볼 때 진정한 싸움의 고수는 시라소니입니다. 이분은 나중에는 회심하여 기독신앙에 몸 담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소천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이 시라소니는 무술을 전혀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정통 무예를 수련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싸움판에서 실전무술을 익힌 그야말로 쌈판에서 배운 무술이지요.


그는 제대로 된 무술은 배운 적이 없지만, 이전의 무술세계가 그러했듯이 어디 고수가 알려지면 찾아가서 자존심을 건 대결을 하곤 했는데, 시라소니는 전 중국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알려진 고수들을 모두 격파하지요. 그만큼 싸움에는 전설적인 기술과 재능을 가진 분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일본의 검술인으로는 무사시가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혼자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듯이, 정말 무술에도 고수가 되면 일당백의 능력을 갖출 수 있는 모양입니다.


성경에도 다윗의 용맹한 장수들의 이름과 그들의 명성이 나오는데 혼자 300여명을 헤치우곤 하지요. 이처럼 시라소니 그분도 아마도 어떤 편법을 쓰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덤벼도 당해내지 못했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분은 무술은 그냥 혼자 실전 싸움판에서 터득하고 배웠었지요. 타고난 운동체질이었나 봅니다.


저도 그냥 목검이나 봉등을 들고나가서 그냥 휘두르고 가지고 놀아봅니다. 요즈음은 웬만한 물건은 대부분 중국에서 제조 역수입이라 가격도 1-2만원대면 살 수 있더군요.


한 칼을 두 손으로 잡고 하는 쌍수검법은 해보니 이리저리 휘두르면 별로 멋도 없고 기술이 조금 단순한 듯하여서, 각 손에 칼을 잡는 쌍검법을 그냥 재미로 나가서 이리저리 휘둘러보곤 하지요. 봉과 여타 무기들도 마찬가지구요.


처음에는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더군요. 봉 돌리기도 힘이 들고, 쌍검법은 자꾸만 서로 칼이 부딪혀서 전장터라면 이거 전을 무찌르는게 아니라 자기 칼에 자신이 맞는 꼴이 자꾸 생기더군요.


그런데 운동체질은 아니지만 시라소니처럼 그냥 갖고 쌈판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놀다보니 이렇게도 하면 좋겠구나, 저렇게도 하면 좋겠구나 싶은 생각과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조금씩 몸에 익다보니 초보지만 그냥 요즈음은 나가서 그냥 재밌게 노는 수준은 됩니다.


그리고 무술은 통한다고 한 가지가 조금 잘 되니 다른 것들도 비슷한 요령으로 조금 잘 되더군요. 그래서 하루는 검, 하루는 봉 등으로 바꾸어가면서 들고 나가서 혼자 뜰에서 해보면 운동도 되고 무료하지도 않고 또 나름 재미가 있어서, 건강관리를 위해서 꼭 필요한 운동을 나름 꾸준히 하게 되더군요.


아마 어떤 분들이 제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조금은 무술을 수련한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동영상을 보면서 흉내를 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품세는 별로 나오지 않는 듯 합니다. 하루는 아들이 오더니 “아빠, 기합소리는 고수인데 품세는 아니야” 하더군요 ^^


하지만 제가 정작 고수를 만나서 아주 초보적인 대련을 한다면 아마도 서로 한번 무기가 부딪히면 제가 나가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공, 곧 모양새는 같지만, 힘이나 속도나 예리한 동작 등의 내공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날 테니까요.


저는 기력이 딸려서 30분만 넘게 운동했다하면 현재 체력으로서는 집에 와서 바로 엎어지면 잠이 들어버립니다. 나가서 살짝만 하고 와야 합니다.


그러니 힘도 무기에 별로 실리지 않을 것이고, 속도나 내공 등의 면에서 고수들을 만나면 같은 동작이라도 파괴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겠지요. 하지만 저는 무술 고수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운동과 정신 무장에서 하니 그냥 제 나름의 수준에서 만족하고 재밌습니다.


중국 어디엔가는 칼로 잘려진 바위가 있다지요. 사진까지 보았는데, 어떤 무림고수가 명검으로 일합에 바위를 쪼개어 버린 것이지요. 이처럼 무기가 좋고 내공이 막강하면 바위도 잘라지나 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릴까요? 무공에는 외공과 내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성과 능력의 세계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외공에 비유할 수 있고, 아홉 가지 열매를 내공에 비유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영성의 책들에서 성령의 아홉까지 은사를 우리 육체에 부어주시는 초월적 능력이라 하여 육체의 영성이라고 하고, 성령의 아홉까지 열매는 우리의 영혼에 부어지는 성품의 열매라 하여 영혼의 영성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성령의 은사들, 곧 육체의 영성적 능력은 다소 그 사람의 삶이 어그러진 삶을 살아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사자들 가운데 인간적인 그리고 신앙적인 내면의 문제점을 가지신 분들도 많지요.


아주 심각하게 잘못된 분들인데도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종말에 대하여 두려운 경고를 하고 있지요. 곧 영원한 사망의 선언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저도 아주 초보이지만 가령 전혀 무술을 하지 않은 사람과 쌍검으로 싸움을 한다면 한 순간은 제가 이길 것입니다. 이것이 해보지 않은 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검이 서로 부딪치지 않게 컨트롤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익혀야 자유자재로 검이 구사가 됩니다. 아니면 자기 칼끼리 부딪혀서 검을 제어하는 것에 어려움을 겼습니다.


그래서 저도 초보지만 가령 산에서 여우나 늑대나 그런 동물쯤이야 만나면 진검이라면 한 순간에 제압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몇 마리 정도야 달려들어도 제가 겁만 먹지 않는다면 능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몸에 익어서 쌍검을 들면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달리고 치고 찌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호랑이나 곰 등을 만나면 저의 검이 진검 중의 명검, 명검 중의 보검을 가졌더라도 38육계 줄행랑이 최고의 무술이요, 저의 마지막 비술이 될 것입니다. 저의 내공과 체력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으니까요.


이런 원리가 영성과 은사와 능력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성경구절처럼 때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에게서도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병든 자가 치유를 받고 귀신이 쫓겨나가기도 하고 권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곧 쉐카이나가 나타나는 능력과 권세는 결코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타날 수 없습니다. 외공이 아무리 현란해도 내공이 없으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듯이 영적인 능력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내면의 영성,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랑, 겸손, 섬김, 정결, 거룩함 등의 내면의 영성이 없으면, 진정하고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사단이 사람을 미혹하려고 행하는 경우입니다.


계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계13: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계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계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위글스워스 목사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며, 아예 다리가 절단되어서 의족을 하고 다니던 목사님에게 새로운 다리가 생기게 하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였지요. 정말 역사가 일어날 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일으키게 하는 놀라운 쉐카이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하였지요.


그것은 그분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설교를 들어보면 오직 하나 ‘성결과 거룩함’입니다. 그러한 거룩함이 있었기에 현란한 외공에 막강한 내공을 지닌 무인이 펼치는 경이로운 예술 수준의 무예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역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영광을 드러내신 경우들을 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시내 산에서 직접 우뢰와 불과 구름과 번개로 나타내셨었지요. 후대로 내려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찬양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릴 때 종종 영광의 구름으로 임재를 하였지요.


대하5: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대하5:14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을 보면 어느 집회에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이 집회 장소에 임하였더군요.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의 능력으로 쓰러졌고 성령 안에서 안식과 만지심을 경험하게 되지요. 목사님은 사역을 하셔야 하기 때문에 그 구름 속에 들어가지 않으려 피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해긴 목사님의 경우도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나타난 것은 그분의 온전하고 순전한 거룩한 삶에 기인한 것입니다.


왜 거룩함이 없으면 진정 놀랍고도 경이로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것은 역사를 일으키시는 주체가 우리가 아닌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에도 유류상종이라는 말이 있지요. 비슷한 것끼리 모인다는 말이지요. 싸움 잘하는 학생은 쌈꾼 학생들끼리 모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그런 원리로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하며 친밀감을 누리려면 ‘거룩함이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함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죄를 견뎌하시지 못하며, 불의를 견뎌하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잘못된 불을 여호와께 드리다가 하나님께 로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태워버리시는 것을 보게 되지요. 이처럼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것을 보시면 우리가 마치 더러운 쓰레기들은 보이면 모아서 불태워 버리고 싶은 것처럼, 불로 태워버리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궁극적인 거룩하심의 분노가 바로 불못 곧 지옥인 것이지요. 죄악과 더러운 것은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삶과 마음의 거룩함과 정결함이 없이는 결코 주님과 깊은 친밀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또 그런 친밀감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 곧 쉐카이나가 나타나는 영광의 삶을 살지도 못하며, 능력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심령으로 누리는 하늘의 빛이나 삶의 능력은 우리가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통하여 주님과 누리는 친밀감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 것은 오직 그 산에 오른 모세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르지 못하였지요. 모세만이 올랐고 그는 올랐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의 빛이 얼마나 강렬하였던지 모세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났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같은 주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며 살아가지만 각 사람이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의 밝기와 능력이 다릅니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더 높은 영광을 맛보게 되며, 더 깊은 능력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사는 육체의 영성이라 하여, 영혼의 영성인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는 삶 없이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능력과 권능과 역사를 나타나는 은사적 능력을 조금은 낮은 차원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낮은 차원의 역사일 경우입니다.


진정하고 깊은 은사적 능력은 결코 거룩함이 없이는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특수한 상황에서는 이례적으로 그런 역사를 일으키실지는 몰라도, 현상적 이적뿐만 아니라 그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임하여 영,혼,육의 모든 것들에 빛이 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영광의 역사, 쉐카이나의 역사는 거룩함이 없이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경에서 약속하신 마음의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그것은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온전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함과 정결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면 거룩하신 주님은 기꺼이 우리 심령의 지성소에 영광의 구름으로 임재하십니다. 기쁨의 불과 희락의 불과 능력의 불로 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밝아지고 우리의 얼굴은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의 얼굴에서 모세의 얼굴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영광, 곧 쉐카이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다른 측면서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함을 온전한 거룩함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룩한 삶, 곧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고 말을 다스리고 행동을 다스려야 하는 거룩한 삶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는 쉽지 않기에, 늘 기도와 말씀에 성실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서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고 하셨지요.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이 바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경건과 거룩함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거룩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썩고 부패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소금의 거룩한 맛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어둡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지만 거룩한 말씀의 빛을 잃지 않아야 하며, 물들지 말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감화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늘 항상 그리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늘 거룩함과 정결함을 통하여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과 친밀한 생명적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 곧 쉐카이나가 우리의 마음과 얼굴과 말과 행동에도 나타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여실히 증명하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영광의 능력과 역사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거룩함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충만 위에 충만하게 누리고, 이웃과 세상에도 그 빛을 널리 그리고 환히 비치는 우리 모두이면 싶습니다. 샬롬! 할렐루야!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출처 및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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