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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십자가, 고난의 신비

초록 등불 2011. 12. 17. 15:24

 

  [영성의 글] 십자가 (고난의 신비)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이 열리고 주님께서 길을 걸어 오솔길 같은 곳을 걸어오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약간 넓은 공터에 이르시더니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적으셨습니다. 환상 가운데 그 글자를 읽으려 하였지만 보이지 않아서 영으로 무엇이라 쓰셨는지 읽어내니, “인내”라고 적어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앞서 기록한 글자 앞에 무엇인가를 적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저편 노을 지는 서쪽 하늘을 보라보시더니 “해가 지고 있구나”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적은 글자를 영으로 읽어내니 “소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글자 앞에 한 글자를 또 쓰셨습니다. 그리고는 “겨울이 와서 날씨가 춥구나. 그렇지만 곧 다시 봄이 오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으로 무엇이라고 적으셨는지 읽어내니 “열매”였습니다. 그리고는 오시던 길 저편으로 걸어서 가셨습니다.


너무도 자주 말씀 드려서 모르시는 분이 없겠지만 저는 수십 년을 육체적 고통, 그 와중에 이런저런 정신적 고통 등 보통 사람들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의 생을 살아왔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천적인 요인, 그리고 저의 불순종 등 부족함으로 인한 징벌의 의미, 그리고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등 다양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수십 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와중에서 또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작년에는 중한 병증으로 쓰러지고 말았지요. 저는 그 때 실상 몸보다 마음을 더 다쳤었습니다. 도대체 나의 생은 왜 이리도 고난과 눈물, 아니 진물과 피범벅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나의 생은 도대체 왜 이리도 고난과 아픔의 붉은 피가 줄줄 흐르는 생인가! 몸보다 마음을 다쳤었습니다.


작년의 병증은 비유로 들면 차가 운행을 하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다가 천재일운 어딘가 대롱대롱 걸린 형국,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극히 운 좋으면 그 상태로 걸려서 구조를 받을 수도 있는 그런 병증의 상태였습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다가 걸려서 간들거리는 형국이었지요. 조금만 더 진행이 되면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거나 아니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제 느낌 상 종이 한 장 차이 같은 실낱처럼 위험한 상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체님들에게 유언 형식의 남겨진 가족을 조금은 도와 달라는 메일을 드리기도 하였고, 가족에게는 수차례 유언을 미리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조금만 몸에 이상증상이 느껴지면 식은땀을 흘리며 응급실만 다섯 번을 찾아가곤 하였지요.


그런 위급한 상황의 두려움과 아울려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온 몸을 엄습해 왔습니다. 수십 년을 아파왔지만 이건 다른 차원, 온 몸이 너무도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너무도 계속 아프면 스스로 생명을 끊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도무지 견뎌낼 수 없는 통증이었기에 만약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면 주님께 사정을 아뢰고 회개하고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린 후,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이 극렬한 통증의 육신을 속히 벗어날까 생각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통증과 고통이라면 기도드린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고 하여도 주님이 이해하시겠지, 용서하시겠지 싶었습니다.


아파트 같은 곳에 불이 나면 가끔 사람들이 그냥 창으로 몸을 던지지요? 그 사람들이 떨어지면 죽을 것을 몰라서 몸을 던질까요? 아니지요. 죽을 것을 알지만 지금 엄습해 오는 불길로 인한 통증을 도무지 참을 수 없으니 죽음의 세계로 그냥 허겁지겁 제 정신을 잃은 채 던지는 것이지요. 제가 그런 형국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인터넷으로 살펴보니 정말 저처럼 극심한 통증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자살병’이라는 병들이 있더군요.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육신의 통증, 번져오는 불길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창으로 뛰어내리게 되는 그런 극렬한 통증의 병들도 있더군요.


그렇게 도무지 견뎌내고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데 병원에 쫓아가면 “무엇을 어떻게 도와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의사들은 그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하루 아무도 없는 침침한 거실에 누웠는데 또 그런 극렬한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이렇게 아프다가는 미치거나 너무 뜨거워서 죽을 줄 알면서도 창가로 뛰어내리는 사람처럼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마취제! 강력한 마취제”


저의 병증은 원인이 무엇이고 왜 아픈지도 의학적으로 잘 모르는데, 일반 진통제나 소염제 이런 계열의 약은 먹어도 통증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력한 일반진통제가 아닌 강력한 마취제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근처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 곧 살아있는 삶이란 생의 길이도 중요하지만 질도 중요한 것을 선생님은 아실 것입니다. 지금 저는 얼마나 사는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짧은 생이라도 통증이 없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생을 끊고 싶을 정도로 아프니 강력한 마취제를 좀 주십시오”


의사 선생님도 저의 표정에서 통증을 읽을 수 있고 진정어린 호소의 말씀에 아무런 말씀이 없이 강력한 마취진통제를 처방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마디 하셨습니다. “약을 드시고 나면 혹 넘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마취력이 강력하니 정신을 잃고 쓰러지거나 넘어질 수 있다는 조언이었습니다.


집에 급히 돌아와서 한 첩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이 몽롱해지더니 잠이 오면서 그 극심한 통증이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몽롱한 상태에서 통증이 줄어드니 얼마나 행복하던지, 그 약을 먹고는 거의 종일을 자고는 일어나서는 봉투에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적어두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 봉투는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글을 진행하기 전에 잠시 이 부분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지나가렵니다. 너무도 아파서 육신을 덧입은 몸, 목회자이기에 먼저 사람인 저도 스스로 어쩌면 생을 마감하여야 하는 순간이 오겠다 싶었지만, 이처럼 마취제이던지 무엇이든지 또한 벗어날 길이 있더군요.


병원에서 말기의 통증의 환자들에게는 몰핀(아편)주사로 진통을 덜어주지요. 그러므로 육신의 극렬한 아픔이 오더라도 또한 덜 수 있는 길이 있으니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은 너무도 존귀하고 귀한 것이니까요. 또한 우리 자신들의 존재가 우리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는 너무도 또한 소중하니까요.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는 쓰지 말까 하다가 고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썼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부분은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고,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시며 부르시는 그날까지 모든 것들에 인내하시고 감사하십시요.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현대의학은 제 병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니 별스런 약을 다 주지만 효과가 없으니, 그 이후 여차여차 이런저런 각종 자연 의학적 치료와 때로 너무 아프면 마취제 등 이런저런 약물의 도움도 받으면서 일년이 넘는 세월을 잘 싸워왔습니다.


그토록 외롭고 아프고 고독한 사투의 시간, 거기에 이상한 현상들이 또 일어났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연락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사귀어 온 사람들이라 그러한 일로 그렇게 될 것이 아닌데, 이상스럽게 아주 사소한 일들로 연락이 두절되고 철저하게 혼자의 시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냥 저의 일상이란 눈만 뜨면 홀로 침침한 거실에 병동처럼 누워서 통증과 두려움과 고독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생각에 설움이 붇받쳐 오면 때로는 소리없이 가슴으로, 때로는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고 소리내어서 아이처럼 이를 악물고 울 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프고 힘들다보니, 외롭고 고독하다보니 평소에도 기도의 삶을 늘 드리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얍복강가의 야곱처럼 정말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밖에 멀리 나갈 체력도 되지 않았고, 혹 나가도 시야의 색번짐이 심해서 겨우 길을 걸어다닐 수 있을 뿐, 안개가 극심하게 자욱한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답답하면 일 이십분 잠시 나들이를 하고는 들어와서 누워서 쉬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홀로 통증과 싸우고 두려움과 싸우고 고독과 싸우며, 기도하고 말씀을 읽거나 아니면 대체의학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의술을 익혔었습니다. 침술, 뜸술, 피를 맑게 하는 부항요법 등 새로운 의술을 독학하며 익혔습니다. 그래서 침이며 뜸이며 이젠 다 다룰 줄 알지요. 전문가만큼은 아니 되겠지만 웬만한 한의학적 모든 시술은 할 줄 압니다.


그 와중에 현대의학으로는 되지 않으니 신적치유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신적 치유에 관한 글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신적 치유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는 모르지만 정말 간절하게 수년을 기도하여도 건강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고 회복시켜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자포자기하며 지냈었지요.


그런데 다시금 절박한 상황이 되고 보니 다시금 하나님을 찾게 되고, 현대의학으로는 어려우니 신적치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러한 신앙서적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침을 받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읽으면서 “목회자인 내가 성도님들이 이렇게 아플 때, 현대의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죽을 만큼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때 주님의 능력으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 그래서 저의 치료뿐만 아니라 신적 치유의 능력, 곧 신유의 기름부음을 간절하게 사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의지가 다소 약한 면도 있지만 성격은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비록 아프고 힘든 와중에 있었지만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 신유에 관한 서적들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며, 지금은 아프나 나은 것을 실상으로 믿고 바라며, 새로운 목회의 꿈, 치유를 비롯한 진정한 능력 사역자로서의 꿈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줄 수 있는 기름 부으심이 내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들이 확장되어서,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들로 성령 안에서 조언을 해 드릴 수 있다면,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신음하는 분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저의 건강의 회복과 아울려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능력의 기름 부으심을 밤낮으로 간구하였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정말 진심과 전심으로 간구하였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아프니 그냥 세상사 다 잊고 산속이라도 들어가서 살다가 가고픈 맘, 세상의 것들은 아무런 재미도 흥미도 없었습니다. 돈이 수억 수조가 들어와도 기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이런저런 분들께서 도움을 주셨지만 돈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도 재미도 없고, 먹는 것도 재미도 없고, 그냥 깊은 지하 감옥살이처럼 하루하루 연명하듯 그렇게 암울하고 어두운 고통과 고난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냥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기도와 말씀, 그리고 신앙서적들이나 글을 읽을 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흥미도 없고 내려놓고 기도와 말씀과 영적 독서, 간간 대체의학에 대해서 공부하며 그렇게 일년이 넘는 제게는 천년 같은 시간을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이 홀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제게는 결코 짧지 않은 고통과 고독과 두려움의 시간, 하지만 저는 믿음의 서적에서 배운 대로 치유를 고백하고 주장하며 지금까지 싸워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아직도 병증의 뿌리는 여전히 저를 힘들게 하지만 여타의 증상들은 많이 호전이 되었습니다.


그 힘든 와중에 간간 주님은 음성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게 하셨고, 딱 하나 영적인 선물을 주셨습니다. 날짜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2011년 1월 23일, 주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내게 천국 열쇠를 주노니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말씀하시며 천국의 열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일생 주님의 음성으로부터 받은 첫 선물입니다.


물론 천국의 열쇠에 관한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리스도인 모두가 소유한 것이지요. 하지만 만약 모두가 소유한 자녀 된 신분의 그런 차원의 천국열쇠라면 또 다시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겠지요.


어떤 의미에서의 말씀이던지 저로서는 권능과 능력 차원에서의 “천국의 열쇠”라고 생각하는 것이 저의 믿음에 도움이 되기에 그렇게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능력과 권세를 주심을 심령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의 블로그 이름이 “천국의 열쇠”입니다. (천국의 열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은 다음에 한번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간간 그러한 주님의 위로가 있었지만, 돌아보면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버리시고 홀로 고독한 광야 같은 곳에 두신 것도 주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영으로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한 고통과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오직 주님 앞에서만 있게 하시던 주님께서는 저의 모든 것을 하나씩 다루셨습니다. 첫째는 생각이요, 둘째는 말이요, 셋째는 행동이요 그 모든 것을 다루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덕스럽지 못한 말이나 정죄하는 말이나 비속어나 저속어 심지어 사투리도 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반듯한 말, 은혜의 말, 덕스러운 말만 하게 하셨습니다. 행동도 홀로 있던지 사람들 가운데 있던지 반듯하게 하도록 다루셨습니다. 다루심을 오래 받아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여서, 그리고 자동적으로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중단하게 하심으로 말과 행동에 대한 실수가 적습니다.


그리고 일 여년의 세월이 지난 조금 더 지난 다음에 그 때부터 하늘의 문을 여시고,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들을 쏟아 부어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불과 5-6개월 동안 정신없이 이전에 누리던 은사와 능력 위에 더 높은 차원의 하늘의 신령한 능력과 권세와 은사들을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부분들은 간증과 신령한 것들에 관한 나눔으로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로부터 거룩한 불이 임하고 신령한 것들을 누리다보니, 때로 인간인지라 마음이 힘들 때가 없잖아 있지만, 이제는 성령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하늘의 영광 속에서 거닐다보니 이전에는 그토록 갈망하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조금은 내려놓게 되고 저 높은 하늘을 향한 갈망만 점점 커져감을 느껴갑니다.


영광차원의 하늘의 평강이 심령에 임하여 땅을 거니나 늘 하늘을 거니는 거 같은 시간 속에 머물다 보니,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바울처럼 위대한 고백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니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은 아닐지라도 비슷한 심령으로 살아갑니다.


그러한 가운데 제가 머리가 아닌 가슴, 곧 심령으로 깊이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신비’입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 중에 그 누구도 고난과 어려움을 좋아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지요. 그러나 이전과 같은 마음은 아닙니다. 고난의 신비를 깨달은 것이지요.


저는 요즘 집회를 인도하며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냥 눈에서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흐릅니다. 제가 그토록 아파 보았기에 그 아픔을 넉넉히 알 수 있고 가슴으로 함께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이모저모 다 겪어 보았기에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들을 품고 기도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높으신 하나님의 경륜과 고난의 신비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고 더 깊이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은 단지 고난이 아니라 또 다른 어떤 의미의 생명, 영적으로는 생명이며 그 시간이 생명의 시간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면 참으로 힘든 생을 살아갔습니다. 대부분 요즈음으로 보면 이단으로 판단되고 정죄되어서 숱한 박해와 핍박을 받기도 하였고 그들은 말이 아닌 때로는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며 전하기도 하며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또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하였지요.


그 중에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하루는 그의 아내를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아내를 데려가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에스겔을 향하여 하나님은 “울지말라”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서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뺏어 가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그의 아내를 사랑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였으나 그들이 배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난 아픔을, 에스겔은 그의 아내를 잃음으로 그 마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지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그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할 수 있기에 그렇게 에스겔 선지자에게 아픔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탕한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게 한 것도 음탕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지요.


이처럼 선지자의 삶들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려고 그들의 삶에 극렬한 아픔을 주시기도 하시고, 또 호세아의 경우 자녀들의 이름을 저주스럽게 짓게도 하시곤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하도록 이끄신 그들에게 맡기신 십자가인 것이지요.


앞으로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이 고난의 시간 동안에 주님은 중보에 대하여 새로운 눈과 시간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남은 고난이 우리에게 있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죄로부터의 자유와 사단으로부터의 자유함의 모든 법적인 근거는 주님께서 온전히 완성하시고 다 이루어 두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깨달은 것은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백한 것이지요.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다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히 승리를 거둔 것입니까? 아니지요.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이미 법적으로 보장되어지고 확정되어진 승리이지만, 그 권한을 가지고 영적 전쟁을 하여야 하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로부터 자유하시고 해방시켜 주셨지만, 죄와의 싸움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으며, 만민의 영혼구원의 길을 열어 두셨지만 복음을 전파하고 저 복음의 불모지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며 피를 흘려야 하는 사명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육체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채워야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하나는 고난과 아픔과 죽음입니다. 그리고 한편은 부활이요, 생명이요,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음으로 말미암는 풍성한 생명의 열매의 의미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찔림으로 우리의 허물의 사함을 입은 것입니다. 그분께서 상함으로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사함을 입은 것입니다. 그분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런데 제가 발견한 고난의 의미, 곧 고난의 신비에는 이러한 십자가, 곧 중보의 깊은 의미가 있음을 새롭게 보게 된 것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곁은 숱한 고난과 아픔에는 선천적인 원인, 저의 불순종으로 인한 원인, 그리고 섭리적인 차원이 어쩌면 다 있어 보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의 극렬한 풀무불을 통과하게 하신 후 하늘의 영광과 능력으로 덧입혀 주심을 보면서,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에게 남겨진 십자가, 곧 중보의 의미였습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드리면, 저는 육신의 아픔이라면 지긋지긋하게 겪어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의 고난이었던지 간에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픔으로 인하여 제가 육신의 아픔을 겪는 심정들을 참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들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가슴으로 품게 되니 말입니다.


에스겔에게 있어서 아내의 죽음이나 호세아 선지자에게 있어서 음탕한 아내 고멜은 고통이요, 시련이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이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고 품고 사랑으로 예언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아픔과 시련은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뭇민을 살린 것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는 중보의 십자가인 것이지요.


이러한 고난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니, 고난은 아픔이요, 고통이요, 속히 벗어나고 싶은 것이긴 하지만, 한편 생명이나 생명의 뿌리나 십자가나 중보의 의미로 바라보게 되더군요.


가령 송명희 시인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분을 치유하시지 않을까요? 아니지요. 송명희 시인은 주님께서 안겨주신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육체적 아픔과 고난 속에서 “나 가진 재물 없고 나 남이 가진 건강 없으나 나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듣지 못한 것을 들었네”라고 가시나무 새처럼 노래할 때 같은 장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생명이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송명희 지체님의 아픔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것이 중보가 되어서 많은 장애우 분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생명이 흘러가는 것이지요.


그처럼 제게도 징계이던지 섭리이던지 이러한 고난이 없더라면, 그러한 분들에게 참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요? 아픈 이들을 보면 눈물과 가슴으로 안고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은 그것이 징계이던지 섭리이던지를 불문하고 모두가 다른 한편, 영적인 차원에서는 생명이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전할 수 있는 십자가와 중보의 뿌리가 되는 것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깊은 의미와 신비를 깨닫고 나서부터는 물론 하나님께서 더 속히 온전한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서 고통으로 벗어나게 해 주셨으면 하는 인간적인 바램과 속히 건강을 회복하여 건강 때문에 사역에 제한을 받고 싶지 않은 맘 없잖아 있지만, 이전처럼 아등바등 거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것이나 부요한 것이나, 아픈 것이나 강건한 것이나,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되고, 조금은 초연해져 갑니다. 그리고 형편이 어떠하던지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모든 것을 초연하여 땅이 아닌 하늘의 영광 속에서 살아갑니다.


앞에서 기록한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인내는 인내하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인내를 함에 있어서 소망을 품고 인내하라는 것이지요. 환상 가운데 노을이 보인 것은 우리네 생이 그리 길지 않음을, 고통과 시련의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그리 멀지 않음을 그림으로 가르치시는 것이지요. 곧 머잖아 이 땅의 힘든 육체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시는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이제 차가운 겨울이구나, 그렇지만 봄이 곧 오겠지”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록하신 ‘열매’는 우리의 삶에 소망을 품고 인내의 선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다보면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가 땅에 속한 것이던지 하늘에 속한 것이던지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겨울도 속히 지나고 새 열매를 향한 봄이 올 것임을 환상의 이미지로 가르치신 것이지요.

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하루는 주님 앞에서 기도하다가 누워 쉬는데 어떤 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누워서 편하게 그분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는 가운데 중보의 영이 임하여 그분의 심령이 제 심령에 덧입혀진바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편안히 누워쉬다가 새벽녘 남들이 들으면 청승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울음과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 울음은 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아픔을 안고 제가 중보의 십자가를 지고 우는 것이지요.


그 사람의 심정으로 구슬피 울다가 생각해보니 “지금도 아픔을 거닐고 있지만 수십년 그토록 아프게 하시더니,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 안겨 울게 하시는구나!”왜 나는 평생 나의 아픔 때문에, 또 남의 아픔마져 안고 이렇게 울어야 하나" 싶으니 “십자가, 십자가”찬양이 생각나서 조용히 부르다보니 인간적인 눈물이 흘러 귓불을 적시더군요.


그 때 주님께서 “울지 말라”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즉시로 눈물을 멈추었습니다. 에스겔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는 아마도 통곡을 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울지 말라 하실 때 그는 마음대로 울 수도 없었지요.


목회자의 삶을 걸어보니 그 삶이 이런 것이더군요. 울고 싶어도 우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목회자의 삶이더군요. 그 울음마저 안으로 삭이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뭇민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그 아픔을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십자가로 품어야 하는 삶이더군요.


이러한 고난의 신비, 곧 십자가와 중보의 아픔은 비단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차원의 고난도 있지만 어쨌거나 주님은 이러저러한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성품을 아름답게 빚어 가시고 그 빚어진 성품으로 같은 아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안고 생명을 살리는 중보의 신음을 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너무 힘들게만 여기지 마십시요. 제가 경험하였듯이 고난 뒤에는 반드시 영광을 주십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을 주십니다. 고난이 깊으면 영광이 깊습니다. 고난이 깊으면 부어주시는 권세와 능력이 깊습니다.


혹한의 겨울이 오면 모든 신록들의 모습은 초라합니다. 모든 잎사귀들은 다 떨어지고 그 모양이 길거리 노숙자처럼 앙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시간 동안 땅 속 뿌리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돋음을 위한 생명의 에너지를 저축하지요. 그리고 그 시간이 없다면 결코 봄에 새로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환상 속에서 겨울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처럼 고난은 마냥 부정적이거나 의미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생명의 신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품는 중보와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나 곤고한 날에나 너무 마음 흔들려 하지 마십시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찬양하며 곤고한 날에는 기도하며 영적 생명의 힘을 응축하십시요. 주님의 성품을 배우십시요. 다른 사람을 품는 중보와 십자가가 있음을 기억하시고, 조급해하지도 당황해하지도 마시고 묵묵히 온유함으로 주님의 때까지 기도하고 인내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빚어지시길 애써십시요. 그리하면 때가 이르면 다시금 움이 돋게 하고 어여쁜 꽃을 피우시게 하고 가득한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이니까요.


부족한 종의 이 글이 고난을 겪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마음의 새로운 눈과 생명을 전해 주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겔24:16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겔24:17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겔24:18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겔24:19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출처 및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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