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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각론] 방언과 방언통변 (1)

초록 등불 2012. 4. 2. 07:25

  [은사 각록] 방언과 방언통변 (1)

 

한 동안 화창하더니 오늘은 여긴 비가 조용히 내립니다. 주님 안에서 복되고 행복한 시간 되십시요.


저는 성격상 어떤 일에 몰두하면 그것이 다 해야 다른 일에 비로소 신경을 쓰는 성격인 편입니다. 한 며칠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곳에 몰두 하느라 다소 일에 소흘하였네요. 이해하세요. 자꾸만 그 일로 방해를 받으면서 하는 것보다는 완전히 처리하고 전념하는 것이 어쩌면 좋으니까요.


오늘도 다소 곤한데, 그래서 주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해드리는 건 조금 힘들 것 같고 하여, 영이 아닌 경험으로 아는 혼의 영적 지식으로 쓸 수 있는 영성 은사의 글 하나를 써 봅니다. 방언과 방언 통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 번 제가 방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의 징표로 받는 물세례로 좋지만, 반드시 성령의 불세례를 경험하여야 하고, 또 방언의 은사를 받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였을 때 모든 제자들은 다 방언을 말하였지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령의 증거로 확증하시기 위하여 영적 세계의 언어가 아닌 이 땅의 언어, 곧 다른 나라의 방언이 모두에게 임하는 놀라운 사건이었지요.


방언을 말하게 됨은 영이 성령 안에서 자유하게 되고 흐르게 됨을 의미합니다. 곧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혼과 육을 뚫고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분의 글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1장부터 4장까지가 특색이 있는데, 사도행전 1장은 오실 성령님을 기다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장은 오신 성령과 방언을 말하게 됨으로써 성령 안에서 영이 본격적으로 생명적인 활동을 시작함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3장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됨으로써 우리가 초자연적인 능력과 역사와 이적의 영역으로 들어감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날때부터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처럼 치유하는 이적을 보여 주지요.


그리고 4장의 의미가 중요한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영적인 세계의 법칙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병자를 치유하였을 때 물론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칭찬과 칭송을 들었지만, 그들이 겪어야 했던 것은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오해와 핍박과 박해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단지 머리로만, 관념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시는 목회자나 성도님들은 그 세계를 알지 못하기에,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우리가 들어가면 핍박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삶이 자신에게 시작되었을 때 오해와 핍박을 받는다면 그냥 영적 세계의 흐름이려니 하고 생각하시고 주님에게만 더욱 집중하시면 됩니다.


기독교 역사나 성경을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인 것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는 영이신 하나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 세계, 그 빛과 조명을 받지 못하고, 전통적인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관습에 매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아닌 의문의 죽은 것으로만 자꾸 섬기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어쩌면 마지막 날 적그리스도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분을 못 박은 것처럼,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과 성령의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러한 기독 종교인으로부터 나타나지 않을까 가끔 혼자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이것은 그냥 저의 단순한 상상이니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요.


어쨌거나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고 영이 생명력을 얻고 영적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언을 받지 못하신 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받아보신 분은 그 방언의 놀라운 영적인 중요성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참 신앙과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시려면 성령세례를 받고 가능하면 모두 방언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았지만, 성령세례는 받았는데요”라고 말씀하실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충만히 받게 되면 방언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저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인 위글스워스 목사님의 간증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성령세례를 받았었습니다. 분명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면 충만하게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기분이 상하고 속이 상하곤 하였겠지요. 그러나 그가 진정 성령의 은사, 곧 방언을 받고 난 뒤에 하는 말이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깨우침을 줍니다.


위글스워스 목사님은 방언의 은사를 받고서야 비로서 “아, 이제야 내가 진정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방언의 은사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라고 고백하였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세례를 사모하고 그리고 아직 받지 못하였다면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요.


방언은 영이 생명력을 얻고 활동하는 증거요, 영적 세계의 관문이며, 모든 영적인 것들의 풀림의 시초입니다.


작년 언젠가 기도원 집회에 참석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방언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초기 애기방언이라 거의 대부분 랄라라.. 수준에서 방언을 하시더군요. 듣고 있으면 마치 염소나 양이 울어대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애기방언이라도 지금 성령과 은사를 받은 그들의 심령에 임한 기쁨은 제가 잘 압니다. 기쁨에 겨워 웃고 우는 양이 됩니다. 음메에..


초등학교 시절 방언을 받고, 저는 시작부터 비록 랄라라.. 식의 애기방언이 아닌 나름 조금 더 깊은 방언이 나왔지만, 그래도 다소 단조롭긴 하였었지요. 그래도 은사를 받고 단순하긴 하지만 방언을 할 때의 그 기쁨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방언이 처음 임할 때의 그 묘한 신체적인 느낌과 감각도 아직 생생합니다. 마치 입술과 혀에 전기가 지잉~ 하고 임한 것 같았지요. 입술이 떨리고 진동이 오면서 제 의지가 아닌 어떤 미지의 힘에 의하여 혀와 입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모르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방언을 받아보시면 같은 기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받지 못하셨으면 사모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입니다. 특별히 거의 모든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방언은 더욱 그러합니다. 신학적으로 자세한 논쟁은 싫습니다. 그러나 경험과 역사를 살펴볼 때 방언은 사모하면 주십니다.


그런데 방언도 방언에 따라 그 깊이와 능력과 흐름이 다릅니다. 다른 은사도 마찬가지지요.


저의 경험을 보아도 방언이라고 하여 같은 방언이 아니더군요. 저는 초등학교 시절 방언을 받았고, 그리고 단순히 랄랄라 하는 애기 방언도 아니었습니다. 조금 단순하기는 해도 나름 외국언어처럼 들리는 그런 방언이었지요.


처음으로 방언이 임하면 “랄랄라” 하는 식의 비 언어적인 방언으로 많이 시작을 하시다가 계속 기도하면 다소 단순한 언어 문장의 방언으로 바뀌고, 계속 기도하면 방언이 바뀌고 바뀌고 하면서 조금 유창해 지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소 안정된 어떤 언어의 형태로 자리잡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이 단계의 방언을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어떤 징표적인 의미도 있기에 “징표방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을 받은 것을 분명합니다.


대부분의 분들이 이 수준의 방언에서 많이 하시고 어떤 분은 평생 이 수준의 방언에 많이들 머무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꼭 방언의 깊이와 다른 능력의 깊이가 같은 것은 아니어서, 방언이 이 수준의 방언에 머문다고 하여서 능력과 은사가 더 깊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차원의 징표방언을 벗어나서 더 깊은 방언의 세계로 들어가면, 방언과 통변과 예언등이 언어계열의 은사이듯이 주님과 교통의 세계는 깊어지고 넓어지는 부분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분들이 머무는 이 징표방언의 너머에는 제가 “능력 방언”이라고 부르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성경에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영의 일들은 다소 많은 부분은 더 깊은 부분은 침묵하고 있는바, 우리가 더 깊이 연구하고 알아가야 하는 부분도 적지 않은 바 그런 배움의 나눔의 의미에서 저의 경험적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능력 차원의 은사를 받은 것은 수년 전입니다. 년도를 기록해 두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그 방언을 받고서야 제가 비로서 방언의 능력을 어떤 책들이 아니라 경험과 실제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 단계의 방언이 이르면 자신도 전혀 다른 차원의 방언과 어떤 영적인 능력과 깊이가 이전 방언과는 확연히 다른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그 새로운 능력차원은 방언은 어느 날 낮에 제가 자리에 누워있는데 홀연 임하였습니다. 아들과 성령과 또한 선물로 은사를 주시는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방언을 받고 나니 차원이 전혀 달랐습니다. 완전한 외국말처럼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교통의 세계가 이전에는 시냇물 같았다면 마치 큰 강이나 근 운하를 만난 듯 한없이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언어자체가 영어 같기도 하고 중국말 같기도 하고 하여간 전혀 다른 완전한 나라말과 같은 방언이 임하였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길가다 아이들에게 말을 해보곤 했지요.


그러면 아이들이 “어! 아저씨, 중국사람이야?”라고 묻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 때 설명을 해주고 전도도 하곤 하였었지요.


언젠가 어떤 예배 모임에서 제가 기도 중 방언을 말하였더니, 예배 후 한 분이 그것은 방언이라니까, “저는 목사님께서 설교 도중 더 깊은 의미와 해석을 위해서 영어로 말을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렇게 완전한 나라말과 같은 능력차원의 은사가 수년 전 제게 홀연히 임하였습니다.


정말 그러한 능력차원의 방언의 은사를 받고 보니, 또 다른 한 차원 높은 영적 세계가 열리더군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뜻을 분별하는데 깊이가 놀라울 만큼 깊어지고 확장되더군요.


다른 곳에서 특별한 이름을 찾을 수 없어 제가 “능력 방언”이라고 이름 지은 이 단계의 방언은 징표방언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방언을 받았기에 수십 년을 방언기도를 해 왔고 그 동안 다양하게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다소 폭의 제한이 있기는 하였으나 유창하게 언어방언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징표방언입니다.


능력 차원의 방언이 임하면 자기 스스로 마치 새로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이전과는 다른 방언의 능력과 세계가 열림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렇게 확연히 폭과 느낌이 다른 교통과 능력의 차이를 느끼는 방언이 능력방언입니다.


방언은 받지 못하신 분이거나 모르시는 분들은 때로 무시하거나 신학적으로 반대를 하곤 하시는데, 정말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받아 보시면 생각과 입장이 달라지실 것입니다. 방언은 영적으로 너무나도 유용한 은사이며, 모든 영적 세계와 은사세계의 관문이며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애기 방언이던 어떤 방언이던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들은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십시요. 그리고 아직 받지 못하신 분이라면 사모하고 사모하십시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요. 그리하면 주십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을 겪지요. 우리의 영도 성령으로 거듭나는데 그만한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수고의 각오로 매달리면 반드시 성령의 불세례를 충만하게 받고 방언 등 각종 은사도 받습니다.


하지만 아직 애기방언, 단순히 랄랄라.. 정도의 방언만 되시는 분들은 아직 영이 왕성하게 풀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더욱 기도하고 또 방언으로 기도하십시요. 그리하면 더 깊이 그리고 풍성히 열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은사의 부분은 사모는 하시되 인간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성령의 이끄심과 부어주심에 순응하는 온유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사도바울처럼 세계적인 영성능력자가 되고 싶겠지요. 그러고 사모는 하시되 주님의 뜻에, 성령께서 그 뜻에 따라 나누어 주시는 것들에 아멘! 할 수있는 온유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은사나 능력이 아닌 언제나 주님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세계, 그 안의 영성의 세계와 능력의 세계도 하나님만큼이나 높고 깊으며 끝이 없습니다. 점점 끝없이 우리는 한 단계, 한 단계 더 깊고 높은 영적인 영적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특징은 성장과 변화이지요. 그러한 성장과 변화가 없다면 이는 죽은 것이지요.


경험을 해보니 방언의 세계도 끝없이 깊어집니다. 저는 그 능력 차원의 방언 위에 또 다른 방언, 또 다른 방언이 겹쳐지고 다양하게 나타나서 다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처럼 방언을 기도하면 기도 중 수시로 방언이 변하고 다양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곧 한 방언이 아닌 “각종 방언을 말하는 세계”가 열립니다.


이를 저는 “권능 방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그러한 까닭은 각종 방언을 말하는 단계가 열리면 일반적으로 예언의 은사나 영분별의 은사 등, 저의 경험상 그리고 영성 연구가들의 글을 살펴볼 때, 몇 가지의 은사가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능력보다 의미가 강한 권세와 능력의 의미를 합친 “권능 방언”이라고 제가 이름을 지었지요.


각종 방언을 말하게 되는 이유는 기도할 때 각종 다양한 영들이 역사하고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단도 다양한 영들이 있지만 하나님 아래 수많은 천사들도 결국은 모두 한 영, 그 다양한 영들이 방언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다른 영이 임하면 다른 방언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방언이 임하면 기도제목이나 대상이 달라지면 방언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방언의 특징은 초기 방언처럼 다소 원초적이고 단순하고 까칠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변화무쌍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너무도 흔하기에 한편 너무도 소흘히 하는 방언의 은사가 실제 역적인 것을 경험한 분들에 의하면 영적 세계의 열림이나 은사의 열림이나 영성 사역에 있어서, 그리고 기도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방언이 흔한 것은 보잘 것 없고 누구에게나 쉽게 열릴 수 있는 은사이기에 흔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서 절실하게 필요하기에 그렇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보다 쌀히 흔한 이유와 같습니다. 하지만 실상 금이 귀합니까? 쌀이 귀합니까? 금은 없어도 살지만 쌀과 같은 양식은 없으면 죽지요. 이처럼 방언의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너무도 소중하고 귀한 것이며 꼭 필요한 것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단순해 보이는 방언의 은사도 이처럼 무한한 깊이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수준의 방언은 이 단계까지의 방언이지만, 더 깊은 방언의 세계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러므로 방언을 받지 못하신 분은 방언을 받기 위하여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방언을 말하시는 분들이라도 더 깊은 능력 차원의 방언, 그리고 더 깊은 세계를 향하여 끝없이 나아가십시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새 방언을 말하며..” 약속하신 말씀대로 새 방언이 임하고 더 깊은 방언이 임하고 그에 따라 더 강한 영권과 능력이 임하고 주님의 형상대로 조금씩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12: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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