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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각론] 방언과 방언통변 (2) - 통변에 대한 이해와 은사가 열리길 기도 합니다.

초록 등불 2012. 4. 2. 07:49

 

※ 방언과 방언통변 (2) ※

 

 

 

방언에 관한 글에 이어서 방언통변에 관하여 글을 써 봅니다.


그것에 앞서 왜 방언의 은사가 유익하고 필요하며 영적인 세계를 알아가고 영성, 은사 능력의 세계가 열려감에 있어서 필요한지 한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고 가고 싶습니다.


사람이 육과 혼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사람의 언어도 육의 언어, 혼의 언어, 영의 언어가 있습니다. 육의 언어는 몸짓이나 표정 등으로 하는 제스처와 같은 것이요, 혼의 언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이요, 영의 언어는 방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듯이 우리 타락한 인간의 육과 혼은 늘 땅을 향하여 살고 하나님을 반하려 살려 합니다. 오직 거듭난 영만이 거룩한 삶, 영적인 삶,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려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싸움이 있습니다.


땅에 속한 육체를 가지지 아니한 하늘의 영적인 가령 천사와 같은 존재는 육이 없고 영만 있기에 영만 좇아 살고 갈등이 없고 내적 싸움이 없습니다. 반면에 땅에 속한 동물이나 생물들은 땅에 속한 것만 있고 하나님의 생기, 곧 영이 없으므로 그냥 땅에 속한 것, 속칭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육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늘 우리 안에는 영과 혼, 영과 육의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육을 좇아 살면 영이 곤고해지고 영을 좇아 살면 육이 불만의 소리를 냅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영으로 몸의 행실, 곧 육을 죽일 때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나아가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리고 영은 영으로만 접촉과 교통이 가능하고 분별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러한 말씀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교통하거나 접촉하는 것은 우리의 육도 아니요, 혼도 아니요, 우리의 영입니다.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며,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는 말씀처럼 영의 일은 영으로만 분별이 가능하고 인식이 가능한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유익한 점들이 많으나, 여기에 한 가지 꼭 필요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로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면, 그 때는 혼이 작동하고 움직입니다. 혼이 생각하여야 하고 지성과 감성과 의지 등이 작용을 해야 우리가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혼과 영은 서로 반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혼이 왕성하게 활동하면 영은 활동하거나 역사하기가 어렵습니다. 혼이 죽어야 영이 활동하거나 역사가 쉬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임재하면 우리의 영이 적극적으로 활성화되기 때문에 육과 혼은 무기력해져서 쓰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움직일 힘도 잃게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많이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 움직일 때가 아닌 꿈속 등에서 나타나셔서 많이 말씀을 하시곤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하거나 환상 등을 보게 될 때는 비몽사몽, 우리의 육과 혼이 무기력해 버리는 것입니다.


영이 활동하려면 육과 혼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활동을 제대로 합니다. 금식기도의 유익함이 여기에 있지요. 금식은 살아 벌떡거리는 죄성과 타락의 육과 혼을 죽입니다. 힘을 빼어버립니다. 그래서 금식기도가 강력한 영적생활의 한 수단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혼의 언어를 말하면 혼의 활동이 왕성해지고 혼의 역할이 극대화 되듯이 우리가 영의 언어인 방언을 말하면 방언의 활동이 왕성해지고 극대화되어지며, 혼의 역할이 축소됩니다. 우리를 지배하던 혼적 의식 대신에 영의 의식, 곧 성령이 다스리고 운행하는 영의 의식세계가 열리며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시동키요, 영적 의식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여기에 방언은사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혼적인 마음은 우리가 알다시피 온갖 죄성과 원망과 불평 등으로 마음에 먼지가 풀석거리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영의 상태는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령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혼적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방언기도를 하며 영이 활성화되고 성령이 나타나심바 되면, 우리의 마음에 하늘의 평강과 생명과 빛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혼의 의식”과 “영의 의식”, 곧 성령 밖과 성령 안의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방언의 통변은 방언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의식이 영의 의식세계로 들어가게 되면서, 영의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방언은 이 땅의 다른 나라 말을 하는 대인 방언의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께 우리의 영이 그 비밀을 말하는 대신방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대부분의 방언은 대신방언이요, 대인방언은 특별한 경우에 나타나거나 받기도 하지요.


대인방인은 이 땅의 말이니 가령 영어면 그냥 해석을 하면 되지요. 독일어면 그냥 독일 사람이 해석하면 되지요.


때로 강권적으로 이러한 대인방언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간증을 읽어보았는데, 어떤 선교사가 잠시 귀국하여 장래를 놓고 기도하고 있는 와중에 어떤 집회에 참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성도가 대인 방언으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그 나라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선교사님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앞의 장래에 대하여 그 나라말로 그 성도를 통하여 알려 주신 것이지요.


또 어떤 목사님은 인터뷰 도중 갑자기 다른 방언이 나와서 당황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통하여 독일어로 메시지를 성령께서 직접 전달한 경우였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유대인 청년이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누군가 유창한 히브리어 방언으로 그 형제를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다는 간증도 읽어 보았습니다. 들을 때는 누가 히브리 말을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성령의 역사인 방언이요, 그러한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이지요.


때로는 선교집회에서 통역자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 나라말을 열어 주셔서 그냥 생각하는대로 그 나라말이 방언으로 열려서 집회를 인도하였다는 간증도 듣지요.


이러한 대인방언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방언은 그냥 그 나라말로 듣고 풀이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대인방언도 그것을 말하는 당사자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쩌면 성령께서 통변을 해 주시겠지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통변을 말할 때는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대신방언, 곧 하늘의 언어를 말할 때를 상정하고 이야기 하는 것일 것입니다.


대화와 의사소통은 같은 종끼리는 가능하고 쉽지만 다른 종끼리는 쉽지 않지요. 가령 우리가 물고기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려면 결코 쉽지 않지요. 개나 소나 말에게도 우리의 뜻을 완전하게 전하기 쉽지 않지요.


그래서 영의 말은 우리의 혼과 육이 완전히 이해하고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혼과 육이 모르는 차원의 언어와 역사를 통해서 영과 영이 말을 하고 의사를 소통하니까요.


그러나 통변의 은사가 열리면, 영과 영이 주고받는 신호가 우리의 혼적인 마음으로 전이가 되어져 옵니다. 우리가 통변을 말하면 대부분 언어적인 부분만을 생각하는데, 물론 언어적인 부분으로 그 뜻이 전달이 되어 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언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그림이나 심령으로 보이는 내적환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어를 조금 하는 사람이 팝송을 듣는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아니면 군대에서 모르스 부호를 약간 배운 사람이 그 신호음을 듣는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면 팝송의 전체내용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겠는데 사랑의 행복에 관한 노래구나, 사랑의 아픔에 관한 노래구나, 혹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거구나 어렴풋이 알 수 있지요. 유창하고 복잡한 모르스 부호가 오가면 초보라면 다 해석은 되지 않아도 어렴풋이 무슨 의미의 명령이 전달되고 오가는지 알 수 있지요.


이처럼 방언 통변의 은사도 영적 의식 세계 속에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말, 언어, 느낌, 생각, 그림, 환상 등으로 다양하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어지고 통변의 기름부음이 깊어지면 더욱 더 분명하고 선명하고 세밀하게 듣게 되는 것입니다. 또 기도시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소의 차이와 깊이를 두고 그 의미들이 전달되어져 오는 것입니다. 깊어지면 그냥 동시통역처럼 그 의미가 전이되어져 오지요.


“생각과 느낌으로도 온다구요? 그건 자신 오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물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요.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께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생각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고 계시는 것이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까?”라는 의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아니지요. 결코 아닙니다” 생각이나 느낌 등이 모두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요, 한편 통변인 것을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키워드는 “혼의 의식”이 아닌 “영의 의식”상태에서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의 의식 상태는 내 혼은 잠잠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내 마음과 생각이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의 생각이나 느낌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의 의식”과 “영의 의식”, 곧 내가 혼의 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 성령께 사로잡힌 영의 의식세계에 있는지는 스스로 분별하여야 하며, 이것은 글로 설명하기 어려우며 체험적으로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영적인 은사나 여러 가지 현상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일들에 대하여 설명을 자꾸만 요구하고 설명으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려고 하려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일은 대략의 설명을 할 수는 있으나 결국은 체험되어져야만 비로소 완전하게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슨 희귀한 병이나 혼은 산모의 고통 등에 대하여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설명만 듣는다면 결코 진정으로 그 병증을 이해했다거나 고통을 이해했다고 하긴 어렵지요. 영적인 현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영적인 지식을 쌓아두면 그러한 현상이 올 때 아하! 하고 이해를 하는데는 도움이 큽니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그것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다보면, 무식한 시골 할머니도 통변이 오면 통변을 하고 예언이 오면 예언을 합니다. 논리적으로 지식적으로 알지 못해도 성령께서 오면 체험적으로 알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현상이나 은사 등은 알려고 하는 지적 호기심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기도가 중요합니다. 간절하고도 꾸준한 기도의 삶 없이 지적호기심으로 기웃거려보았자 교만하게 하는 지식만 쌓여갈 뿐 아무런 실상과 실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를 통하여 세상의 삶과 세상에 속한 것들과 자신의 자아와 욕심과 그 모든 것을 점점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죽고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영성이 회복되고 은사와 능력 또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삶이 무엇보다도 우선입니다.


방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께 그 비밀을 말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통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영어를 해석하듯이 한 문장을 해석하면 한 문장이 통변되고 혼적 세계의 언어처럼 그러하지 않습니다. 짧은 방언이 수많은 말로 해석이 되어지기도 하고, 긴 방언이 아주 짧은 의미로 전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성경 본문을 두고도 여러 각도에서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고 해석하고 영적인 의미를 알게 하셔서 설교를 하게 하시듯, 한 방언을 여러 사람이 통변한다고 할 때 모두 동일한 통변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영어를 해석하듯이 같은 해석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영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영의 세계는 감성과 예술의 세계와 많이 통합니다. 어떤 예술작품을 놓고 모든 사람이 다른 느낌과 감동을 받듯이, 영의 세계도 그러합니다. 이 사람을 통하여서는 이러한 통변으로 영적 깨달음과 가르침을, 다른 사람을 통하여서는 다른 부분을 성령께서 조명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방언을 통변하려는 기도의 요령에 대해서 나누고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방언을 통변하려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우리의 영에 우리의 마음을 합하여야 합니다. 통변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그냥 영이 기도하게 넋을 놓고 기도하면 아무런 의미가 전달이 되어오지 않습니다.


마치 왼손과 오른손을 서로 마주보게 꼭 합장을 하듯이, 그러한 마음으로 방언의 위에 자신의 마음을 얹어 집중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요. 처음에는 쉽지 않을 수 있으나 처음에는 깊이가 얕을 수 있으나 조금만 애쓰면 통변은 열립니다.


그렇게 자꾸 방언으로 기도하며 애쓰다보면 조금씩 통변의 세계가 넓어지고 깊어지고 세밀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가 깊어지다 보면, 자유자재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영의 기도인 방언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혼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도 있고, 또 영의 기도인 방언에 마음을 합하여 통변을 하면서 함께 기도할 수도 있고, 때로는 통변없이 그냥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하지요.


고전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저는 기도하다가 곤하면 굳이 통변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냥 영으로만 기도합니다. 굳이 통변하려고 애쓰지 않으니 그 뜻이 전달되어져 오지 않지만, 성령 안에서 저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기쁨 안에서 교통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의 저의 기도시간은 수고로운 시간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 앞에서 노는 아이처럼 행복합니다.


성경이 말하듯 통변이 열리면 그것이 때로는 예언의 말씀이 되고 지식과 지혜의 말씀이 되기에 방언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종 다양한 은사와 영적 교통과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의 문이 열려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신 분은 받기 위하여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은 통변의 세계가 열리고 깊어지도록 또한 기도하십시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을 좇아 예언의 은사 등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요.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물론 이러한 은사 등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강한 능력과 은사를 받고서도 그 삶은 엉망인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은 은사는 육체에 부어지는 껍질이요, 영적으로 보면 다소 저차원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이고 귀한 보화는 내적변화요, 성령의 열매이지요.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주님과 말씀 안에서 하나 되고 자아를 죽임으로써 생명의 연합 가운데 나타나는 열매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은사와 능력의 체험이 한편 중요한 것은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살아있는 믿음,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올 때 각종 이적과 기사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러한 기적과 이사의 체험을 하였음에도 불고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었지요.


마찬가지로 각종 은사의 체험 등이 비록 본질이 아니라서 우리의 육성과 죄성이 쉬 변화되지는 않지만, 광야에서의 고된 연단과 훈련을 통하여 규례와 법도와 순종을 배우고, 더 나아가 가나안에서의 진정한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는 생명의 연합으로 나아가서 우리의 본성과 내면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져야 하지만, 기적과 이사의 체험, 각종 은사와 능력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체험적 신앙을 갖게 하기에 한편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을 경험하는 수단과 길은 무슨 뾰족한 방법이나 요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뿐인 것입니다.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글쓴이: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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