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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은사론] 예언, 음성,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1)

초록 등불 2012. 4. 23. 19:03

  

   예언, 음성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1)

 

한동안 목회자로서 이모저모 결코 쉽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며 아파하고 힘겨워하시며 신앙상담을 해 오시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한편은 정말로 죄로 인하여 인류에게 찾아온 사망과 수고로움 다시 말하여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삶 속에서 겪는 고난의 이유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 속에서 영적 성숙과 소명을 위한 것들 등 숱한 원인들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죄라는 것은 정말로 사망과 고난과 형벌을 자초하는 죄라는 독소의 실제를 원죄의 결과 속에서 보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분들이 결국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의 영적 싸움에서 지는 것을 보면서, 물론 구원까지 상실하는 믿음 수준의 이하로 떨어지는 일은 허다하지는 않겠지만,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적으로나 삶적으로나 왕권을 잃지 않고 승리하여 누리며 살아가는 영적 전쟁의 승리가 결코 만만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 신앙은 한편 영적 전쟁입니다. 얼마나 우리 주위에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어둠의 영들과 환경들이 많은지, 영적 세계를 조금 경험하신 분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전쟁이란 생명을 건 사투입니다. 그리므로 그리스도인은 의의 병기, 곧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영적 투철한 군인 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저와 우리 모두 끝까지 믿음의 끝끝내의 인내로 영적 성숙도 이루고 영육간의 승리를 누리며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신앙상담을 해 오시는 분들의 경우, 예언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지, 특별히 예언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적지 않게 보게 되고, 저 또한 동일한 설명을 수도 없이 하여야 하는 바, 이 부분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하여 봅니다.


잘 살펴 읽어 보시고, 예언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지 혜안을 얻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해 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오늘의 이 말씀 또한 절대적인 어떤 영적인 원리나 법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어떤 절대적인 원리나 법칙은 없는 듯 합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원론의 수준에서 이해해 주십시요.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나 지식,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경험하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지, 또 들은 경험들은 많이들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많은 경우 자기 스스로도 정말 순도 100%의 확신과 신뢰가 오던가요?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는 때로 본인 스스로는 분명하게 확증이 되지만, 많은 경우는 그런 것 같다는 표현이 정확하지요.


단정적으로 말씀드려 하나님의 음성을 100% 완전무결, 틀림없는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신뢰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많은 분들이 음성을 듣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완전하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한 것이지요.


저의 경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기록할 때는 들은 바 음성이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오류가 아니라고 판단될 때, 그렇게 표현하여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실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는 정말로 그리고 아주 신중해 집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을 오류 없이 순도100%의 정확도를 가지고 듣지 못하느냐 하면, 그것은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우리의 영적 상태가 결코 완전하기 어렵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하나님과 영이 교통하는 신호, 곧 음성을 우리의 혼이 또한 정확하게 읽어오는데 우리 생각, 사단의 생각 등 다소의 오류가 섞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논하자만 글이 너무도 길어지고, 오늘의 주제는 이 것이 아니기에 이 부분은 이렇게 정리만 하고 넘어갑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신이 간절하게 바라는 어떤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은 거의 자신의 바람대로 듣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망이 너무도 간절하기 때문에 분별하여 걸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소망의 내적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사안의 경우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러 사람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 사람이라 함은 그래야 오류의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위의 이유로 우리는 수학 공식이나 물리학적 공리처럼 하나의 전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오류 없이 언제나 완전하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모세나 어떤 선지자들은 늘 정확하게 들었잖아요?”라고 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제 경험에 반추해 볼 때 특별하게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에 성령의 깊고 강력한 역사 속에서 더 깊고 세밀하고 정확한 확률로 들었을 뿐, 그들도 다소 분별하는 과정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분별된 것들이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사료됩니다.


세계적인 예언자로 알려진 누군가라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상태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정확하게 들을 때가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오류없이 언제나 완전하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이란 어떤 방법으로 전해져 오는가요? 그것은 때로 음성이요, 때로 환상이며, 때로 꿈이며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오지요.


그리고 통변이나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의 계열들은 결국 한 줄기,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관련된 은사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에 누구도 항상 정확하게 들을 수 없다면, 통변, 예언, 지식, 지혜의 말씀의 그 모든 은사에도 오류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두 번째 전제에 도달하게 되지요.


또한 하나님의 음성의 부류에 꿈이나 환상도 포함되므로, 그러한 것들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도 부차적으로 얻게 되지요. 실제로 지난 시한부 종말론에서 집단적으로 그러한 오류의 환상을 온 무리들이 함께 보고 더욱 그렇게 미혹되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이단에 미혹되는 사람들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영의 영적 현상이나 환상 등에 이끌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것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영적인 세계에서 오는 모든 것들이나 현상은 필연적으로 반드시 분별을 하여야 한다는 너무나도 중요한 영적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음성이던, 현상이던, 능력이던지 모두 다 영분별을 하여야 합니다.


고전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음성은 그렇다 치고, 실제로 예언이나 어떤 현상이나 능력이 실제로 정확하게 맞거나 나타나는 경우도 그렇게 해야 하나요? 물론입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불이 땅에 떨어지게 하는 능력을 행하는 경우라도 영분별을 하여야 합니다.


신13: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신13: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신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계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계13: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계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계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영의 세계는 들어가면 갈수록 정말로 혼미하고 분별이 필수적인 위험한 곳임을 알게 됩니다. 수많은 천사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단과 귀신들도 다 영들이기 때문에 영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정말로 성령의 역사와 흡사하나 그 열매와 결국은 사망과 압박과 곤고인 유사한 미혹의 영들이 너무도 많기에, 영분별은 영적인 세계와 그 모든 일들에 필수적입니다. 간첩이 가장 간첩이 아닌 것처럼 하듯이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우리를 미혹합니다. 영의 세계에서 영분별은 필수요, 절대적이요, 생명줄과도 같습니다.


고후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자, 그런데 우리의 이전의 예언의 현실은 어떠했는지요? 예언자도 스스로의 예언을 절대화하여,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말씀, 곧 신탁처럼 전하고, 또 듣는 사람들도 전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예언 한마디에 온 삶과 생이 흔들리고 낭패를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관련되어 두 가지 원인,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신의 영적 상태와 또 자신의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 오가는 음성을 혼이 인지하는 과정에서의 있을 수밖에 없는 오류를 언급했지만, 다른 은사자를 통하여 듣고자 할 때는 한 가지 어려움이 더 생기는 것이지요. 그 은사자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스스로 분간의 어려움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일에는 너무도 오류의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극단적 종말론에 심취하여 인생과 가정과 재산을 망치고 날린 사람이 허다하고, 이단에 미혹되어 온 생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죽음에 이른 숱한 사람들이 있듯이, 신앙의 세계도 잘못 믿거나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그러므로 첫째 이것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요. “음성이나 예언이나 꿈이나 환상이나 능력이나 그 모든 영적인 것은 반드시 분별하여야 하고, 절대시하면 안된다!!”


자, 그리고 두 번째 이것을 분명하게 기억 하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셨고 우리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또한 세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상식과 이성과 지식과 세상의 지혜와 다섯 가지 감각 등을 주셨으며, 매일매일 일일이 사사건건 기계적으로 명령하시고 움직이시려고 하지 않으신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냥 쉽게 성경을 지나치지만, 우리가 아브라함이 되어 보면 문득 처음 만난 어떤 알지 못하던 신인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에게도 고민과 생각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된 어떤 내적 동기가 있었겠지요.


어쨌거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이 어떤 전능하신 분의 분명한 명령과 뜻이 있는 것을 내적으로 확신하게 되고, 오늘 날처럼 간단히 이사할 수 있는 그런 시대적 상황이 아닌데도 가족과 종, 가축 등 적지 않았을 무리와 함께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라고 목적지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루, 이틀, 삼일 아브라함은 답답했을 것입니다. “떠나라”고만 말씀하시지, 오늘은 어디로, 내일은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매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 답답함과 하나님을 향한 물음표를 가지고 들려오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판단력과 분별력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며 스스로 길을 찾아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그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그곳에 그가 이르렀을 때 보이지 않던 하나님께서 홀연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후손들에게 주겠다”라고 말씀을 하지요 (창12:7).


물론 성경을 보면 떠나라 한 1절과 가나안에 도착하여 나타나신 말씀하신 것은 7절로 6절 밖에 차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보면 그것이 간단한 시간이었을까요? 제가 성서지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알 수 없지만 말이나 노새, 그리고 도보로 이동하던 시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한참 동안 침묵하신 것입니다.


이후 가나안에 흉년이 들게 되고 아브라함은 인내하지 못하고 그만 애굽으로 내려가지요. 오늘날의 우리가 보면 분명 잘못 선택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침묵하시며 아브라함의 판단과 선택을 지켜보시지요. 그러나 그가 위기에 처하자 한편 구원은 해 주셨지요.


글을 더 진행하기 전에 여기서 중요하게 집고 넘어가고 싶은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어떤 길에서 혹은 시간에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도 하시지만, 많은 경우는 침묵하시며 우리의 상식과 판단과 지혜에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고 그렇게 조정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큰 줄기의 흐름에서 개입하시기도 하시지만 많은 경우는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샤머니즘적 무속신앙, 곧 점치는 샤머니즘적 전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이렇게 마치 점을 치듯 모든 일들과 물음에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고 점괘를 주실 듯 생각하고, 은사 중 예언의 은사를 그러한 도구로 잘못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상담을 해 오시는 분들 중 대부분의 분들이 이러한 물음으로 접근을 해 오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거나 할 때는 항상 물었고 하나님은 응답해 주셨잖아요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란 국가의 운명이 달린 엄청난 중대사입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내일 행선지가 어디냐고 물어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민족적인 거대사입니다.


물론 결국은 큰일이던 작은 일이던 대답을 하시고 안하시고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침묵하실 때도 엄청 많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을 더 논하기 전에 아브라함의 경우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글이 너무 길 것 같아 다소 약식으로 논하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후손을 주시고 그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알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고는 후손을 속히 주시기는커녕 말씀도 없으시고 침묵하시고 애간장만 태우셨습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강산이 변하고도 넘는 시간 하나님은 후손의 약속을 실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생각에 아마도 다른 여인의 몸을 통해서라도 주실 것이라는 의미였나 보다라고 기다리다 지쳐 인간적으로 관점으로 생각하고,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훗날의 재앙과 재난과 전쟁의 불씨를 그만 낳고 맙니다.


오늘날의 저 중동의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과 전쟁과 화약고는 아브라함이 온전히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한 까닭이지요. 이 때에도 하나님은 훗날의 불씨를 아시면서도 개입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지요.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큰 인생의 대목에서 간간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하시지만, 또한 많은 시간과 일들과 길들은 우리에게 맡겨두신다는 것입니다. 침묵하시고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샤머니즘적 무속신앙, 곧 점치는 샤머니즘적 전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이렇게 마치 점을 치듯 모든 일들과 물음에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고 점괘를 주실 듯 생각하고, 은사 중 예언의 은사를 그러한 도구로 잘못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상담을 해 오시는 분들 중 대부분의 분들이 이러한 방식과 기대로 상담을 해 오십니다.  이런 식의 대답을 기대하시는 듯 합니다.


마치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한 말이라도 다 듣고 알았듯이, 다니엘이 왕이 꾼 꿈을 말하지 않아도 그 꿈의 내용도 알고 그 해석까지 알아서 해 주었듯이, 시원하게 모든 영적, 현실적 상황을 알아서, 정확하게 행동할 것을 알려주실 것을 기대하는 듯 합니다. 물론 극한의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는 저라도 심정이 그렇게 되지요.


왕하6:12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지만 엘리사에게 역사한 경우는 한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였으며, 다니엘의 경우도 특별한 경우, 물론 그러한 특별한 역사가 오늘날에도 있지만, 저나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모두 그렇게 시원한 답을 듣고 싶지만,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사가 마치 간단한 수학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얽혀 돌아가는 것이 아니지요. 영계인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우리의 주권적인 고유한 자유 의지적 부분, 그리고 조상의 신앙의 덕과 죄의 삯, 자신이 속한 현상계의 여러 부분들, 곧 나라, 민족, 이웃, 나아가 동식물, 물, 바람 등과의 자연계의 만물과도 얽히고 얽혀 돌아가는 것이지요. 자신이 사는 동네의 물이 오염된 곳이라면 그로 말미암아 병을 얻지도 않습니까? 우리의 생은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한없는 변수들로 얽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모든 부분을 다 읽어내어서 분명하고 명료하게 정답지를 내어줄 수 있는 예언자나 은사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으시거니와, 아브라함의 예처럼 하나님도 결코 그렇게 우리를 로봇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말씀하시고 조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답답하게 힘들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큰 경륜 안에서 때로 생의 큰 길목에서 이따금 말씀을 하시기도 하시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시는 경우에도 부분적으로나 어떤 영적 큰 줄기만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고전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또 예언에 관한 글이 아니니 이 부분도 생략하지만, 예언의 은사의 본질적 기능은 사실상 점을 치듯 현재의 문제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언의 은사의 본질은 “안위하고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현실적인 영역의 문제를 지식의 은사와 함께 다룬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요. 본질은 영의 세계에 속한 영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속종교에서 세속적인 점을 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강력한 예언의 은사나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가지고 계셨지만, 현실적인 육의 문제들의 원인이나 해결책을 거의 다루어 주신 적이 없습니다. 병이 왜 들었는지, 귀신이 왜 들었는지 이유 등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요. 유산 문제로 상담을 해 오는 청년에게 그냥 탐심을 물리치라는 교훈 밖에 주시지 않으셨지요.


그냥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의 모든 동기는 표적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지요. 이처럼 모든 은사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영적인 은사 등은 영적인 문제나 상태 등을 다루기 위한 것이며, 이 세상의 삶의 영역은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지식과 판단력 등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지 아니하고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으로만 점을 치고 점괘를 받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성이나 지성이나 판단력 등은 주실 이유가 없으시고, 아마도 집집마다 예언자가 있어도 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기계적인 로봇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므로 영적인 은사는 영적인 영역, 우리의 이성과 지성과 판단력은 현실적인 삶의 영역위해서 기본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삶의 영역은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자신의 이성과 지성과 판단력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주체성을 가지지 못하고, 대학 진학이나 직장 문제, 결혼 문제, 이사 등 매사마다 무당이나 점집들이 돈벌이를 위하여, 사주, 궁합, 길일, 직장, 운세 등을 모든 것을 봐 준다는 식의 샤머니즘적 방식으로 예언의 은사를 이해하고 예언 지상주의로 가다보면 반드시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현실의 삶이란 것이 영적인 영역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얽혀서 돌아가고, 모든 현상계의 일 뒤에는 물질계, 혼계, 영계가 얽혀서 돌아가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스라엘 백성의 배도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에 임할 무서운 재앙을 예언하셨고, 구약의 선지자들도 현실의 어려움이나 일어날 많은 일들에 대하여 많은 예언을 하였었지요.


하지만 그러한 예언들도 대부분 현실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영적인 원인이나 영적 줄기를 위한 것이지,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처럼 오직 오직 현상계의 일만을 위하여 현상계의 일을 말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요.


지금까지의 대략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첫째,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이나 모든 영적인 것들에는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분별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절대시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끔 생의 큰 줄기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기도 하시지만, 많은 시간 때로는 지치도록 침묵도 하신다. 이럴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분별하며 살아가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셋째, 예언 등은 어떤 사안에 대하여 완전하고 온전하게 오는 것 보다는 시간에 따라 부분적으로 단편적으로 시간에 따라 온다. 그러므로 예언 등으로 모든 것을 풀려하면 안된다.


넷째, 본래 영적인 은사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것보다는 영적인 부분을 다루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본래 예언의 은사란 본질적으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며, 개인적인 어떤 구체적인 사항이나 미래적인 부분에 대하여 점괘를 구하듯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섯째, 하지만 현실의 삶이 영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기에 현실적 삶의 영적인 부분의 진단으로 줄기적 차원의 예언이나 지식의 은사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어떤 정해진 원칙이 없기 때문에 아주 간헐적으로는 구체적인 말씀이 올 수도 있다.


대략 이렇게 개략적으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의 어려움 속에서 너무나도 답답은 한대 어떻게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과 뜻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가며 어려움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헤쳐 나가야 할까요?


(이 부분에 대한 글은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오늘 글은 무슨 분명한 방향제시가 없는 약간 혼돈스러운 부분도 없잖아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과 하나님의 행하심 자체가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막연하나마 어떤 방향성이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방향제시적인 틀의 글은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샬롬)


잠4: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잠4: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잠4: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잠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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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정빛 생명수와 불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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