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일들과 또 하루 밤새 글을 쓰면서 무리한 탓인지 조금 몸이 무거워 오늘은 종일 잤습니다. 몸이 무거우니 마음도 다소 그러하지만,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십자가 앞에선 감사할 것 뿐, 의지를 발휘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원망과 불평을 하나님께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이 땅의 삶은 언제나 수고롭기 마련이고 결국은 썩고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 수고로운 생에서 영원한 행복의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하여야 합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부르고 축복을 가져오지만, 원망과 불평은 우리를 물려고 다가오는 불뱀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감사하십시요.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바요, 축복을 부르는 지혜로운 것입니다.
오늘은 앞글에 이어, 예언과 음성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적용할 것인가를 이어서 논하여 봅니다.
앞에서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에 관하여 이러한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언과 음성에는 틀릴 가능성이 많으므로 반드시 분별하여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 부분적으로 오며, 또 늘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리고 본래 예언의 기능은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 대하여 점괘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안위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현실적인 삶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다루실 수도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에 대하여 실제적인 삶에 적용의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물론 우리의 매사에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여야 합니다.
잠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지만 아브라함의 예처럼, 하나님께서 매일 혹은 매사에 분명한 방법으로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인생의 큰 길목에서 간간 말씀하시거나 어떤 큰 줄기적인 흐름의 말씀을 하시지 우리를 로봇처럼 매사에 일일이 명령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구약시대와 달리 성령께서 내주내재 하시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사안의 선택 시, 그것이 영에 속한 것인지 육에 속한 것인지를 구별하게 하실 뿐, 구체적으로 일일이 명하시는 경우는 흔한 일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어떤 원칙이 없는바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시는 경우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실제적인 방법의 첫째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께 묻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나 혹은 은사자 등을 통하여 어떤 수준이나 수위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것을 반드시 면밀히 영분별 하여 잘 걸려내고 판단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각 개인이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지어야 하겠지요. 영분별이 되지 않고 스스로도 구별이 애매한 경우에는 그 음성에 너무 의존적인 결정을 하면 아니 되겠지요.
두 번째는 이제는 우리 자신의 영역과 몫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수준에서 주어지면, 그리고 그것이 영분별을 통하여 스스로 참이라고 내적 확증이 주어지면, 그 말씀의 주어진 수위 안에서 이제는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과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만약 아무런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경륜과 세상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지성과 이성과 판단력과 분별과 지혜 등을 활용하여 스스로 길을 찾고 선택해야 합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하여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던 아니던 “주체성”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의 예언 등에 의존하는 예언 지상주의는 반드시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주체성을 가지고 영분별 하여야 하며, 예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안을 두루 살펴, 그러한 것들은 참고로 할 뿐, 결국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짓고 판단하는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오류의 가능성이 적지 않게 내포되어 있고, 또 극히 부분적으로 올 때가 많은데, 우리 생의 그 복잡한 현안들을 부분적으로 주어지는 예언으로 해결하려다 보면 분명한 길을 찾기도 쉽지 않거니와 오류의 가능성 때문에 반드시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예언은 안위하고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영적인 일을 위한 것이 본래이지, 우리의 현실적인 삶의 영역인 취업이나 이사나 등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 본질적으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삶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이성과 지성과 판단력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주셨기에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범사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기에 항상 하나님 안에서 분별하여 행하려 애를 써야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마다 아주 구체적인 행위지침적 응답을 기대하다보면 그렇게 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큰 인생의 길목에서 간간 개입하시거나 혹은 큰 줄기의 영적 흐름이나 영육간의 분별수준의 말씀이나 감동, 그것도 분별하여 취사선택 하여야 하는 것을 알아 분별하여 받아들이고,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의 삶의 대부분의 것들은 말씀해 주신 수위 안에서나 혹은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지식과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뜻을 살피는 마음자세로, 자신이 주도적으로 책임지고 결정짓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치 점괘를 구하듯, 예언 등의 은사를 그렇게 이해하여 예언 지상주의로 살아가시다보면 반드시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온전하지 못함 때문에 예언은 많은 경우 틀립니다. 그리고 아주 부분적으로 오는 것으로 전체를 다 파악하려다보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이나 하나님의 음성 등은 다소 신중하게 분별하여 받아 들여야 하는 영감 있는 설교나 권면 정도로 이해하시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서 확증을 받은 후에 주체성을 가지고 행하시고 모든 일의 결과나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합니다. 나중에 은사자 등을 탓하여 보았자 아무런 길도 없습니다.
셋째,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고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님의 모든 가르치심이나 지혜를 그대로 다 인지할 수 있다면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제자인 12보다는 사도바울을 선택하여 성경을 많이 기록하게 하시고, 더 영향력 있게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였으며, 언변에 능한 지혜롭고 지식 등에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지식과 지혜나 인품이나 달란트 등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곱 집사를 선택할 때, 성령만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선택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반론적 차원에서 성령이나 하나님의 은사는 영의 일, 곧 영혼구원의 일과 관련된 것들을 위하여 주신 것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지성과 이성과 판단력과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가령 성령님께서 누군가에게 교회를 개척하라는 음성을 주셨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중에 교회를 개척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영역 안에서도 그 다음은 우리가 지혜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은 다 조건부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두 가지의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도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령 “내가 너를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 쓰겠다”라고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러면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며 기도와 말씀에 성실하여야 하며, 전도자로서의 삶을 감당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배우는 등 자신의 노력도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조건을 다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대부분의 예언은 성취가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어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방향성 등의 제시인 경우가 많으며, 한편 이렇게 조건부이기에 더욱 분별하고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나 성도님들을 보면, 기도는 많이 하여서 성령의 은사나 나타남은 많은데, 말씀이나 영적 지식이 부족하여, 안수하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기도 하는 이런 우를 범하지요. 이처럼 우리 스스로의 지혜로움도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동역의 관계이며, 또 기계적이며 고정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미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에 저절로 굴러 들어왔습니까? 아니지요.
이미 하나님께서 너희 손에 붙였다하는 적군을 앞에 두고서라도, 자신의 병사들과 백성들의 안녕을 위하여 파수꾼을 세웠을 것이고, 실제적인 싸움을 위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수위 안에서 전략 회의를 하고, 군대를 편성하고, 군사훈련도 하였겠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동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에만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한 채 그것에만 마냥 의존하는 것은, 동역자인 우리가 해야 할 몫을 하지 않는 게으른 것이며, 그리하면 절대적 의미의 예언이 아닌 조건부적 일반적인 예언은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예언의 성취를 누리지도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어려움에 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어버이와 자녀가 서로 대화를 통하여 뜻을 바꾸고 조정해 나가기도 하듯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그러한 것입니다.
가령 서원 등을 한 경우는 구약시대는 무조건 지켜야 했지만, 신약시대는 그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셨는지 조금은 책임 있게 살펴야 하겠지만, 다른 부분은 아버지와 자녀로써 기도를 통하여 서로 나누며 뜻을 조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코 절대적 의미나 절대적 완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예언을, 절대적 신탁으로 받아들여 쇠사슬처럼 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가령 소명 차원의 예언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정말 그러하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서든지 그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적으로 부리시지 않으시기에 반드시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자신의 혼적 의식 상태를 모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 안에 깊은 자발적 소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실상 정답은 자신이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어떤 기본적인 공식이나 원칙이 없어서 적는 저도 그러하지만, 읽는 여러분도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론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과 더불어 나누고 싶은 말씀을 간략히 요약적 말씀을 드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언은 실제생활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므로 실제적인 생활의 세세한 모든 것들을 예언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분별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식과 판단력과 지혜로 주체적으로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둘째, 예언의 말씀이 주어지는 경우에도 오류가 많으므로 반드시 분별하여야 하고, 또 부분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주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예언에만 의존하여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고로 하며 다양한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예언에만 의존하는 예언 지상주의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세상의 삶은 하나님께 속한 영의 영역, 우리에게 속한 자유 의지적 영역인 지혜, 지식, 판단, 이해력 등의 영역, 사단의 영역,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 물질계와도 복잡하게 얽히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잘 분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자신도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만이 아닌 지혜 또한 충만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올바른 말씀의 길을 제시하셨을지라도, 자신이 어리석게 행하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물질의 축복을 주셨는데, 분별력 없이 마구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증권에 투자하거나 하는 경우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지요.
넷째, 사람의 삶이란 너무나도 복잡한 것들이 서로 얽혀있다. 그 많고 복잡한 요인과 변수들의 삶을 간단한 예언 등으로 풀려하면 안됩니다. 때로는 부분적 예언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 상담을 나누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다섯째, 사람이 살아가다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한 동안 어쩌면 긴긴 시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힘들고 고되니 하루 속히 아니 분초를 다투어 벗어나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 고난에서 순식간에 벗어날 무슨 묘책을 구하는 마음으로 신앙상담에 응하거나 은사, 예언 상담에 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비책은 아주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의 경우가 아니면 없습니다.
한동안 지속될 수 있는 이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신앙적인 삶인지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이미 성경에 넉넉히 설명되어져 있는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이미 자신도 압니다. 다만 영적인 사람과 함께 다시 나눔으로써 새 힘과 소망을 얻게 되지요. 그러한 마음으로 상담에 응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여섯째, 자신이 듣고 싶은 예언적 상담이나 조언만 가려듣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예언만 듣습니다. 아합왕이 그러하다가 망하였지요.
실제로 소명적 부분에 대하여 신앙상담을 해 온다면, 그리고 자기 스스로 “소명 있다”라는 답을 원하는 분이라면, “아니라”고 말하면 기분 상해하고, 그 사람의 말은 무시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해 주는 사람 말만 따라갑니다.
그런 마음이면 예언적 중보 상담자를 찾아갈 필요도 없이 그냥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므로 가려들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참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진실한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많은 은사 상담자들이 침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이 열려 감각이 깨어나면 그냥 마주보고 앉아 있어도 그 사람의 인품이나 됨됨이나 말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자신이 가려들을지 그러한 부분도 대부분 분별이 됩니다. 받을 마음 자세가 보이지 않으면 말을 해봐야 서로 거리감만 생길 뿐 유익함이 없기에 많은 경우 그냥 침묵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한다면, 자신의 생각은 내려놓는 진실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름 쉽지 않을 글을 애써 적어보았는데, 최종 결론적으로 말씀을 한 번 더 간단히 정리 기록해 봅니다.
우리의 생은 너무도 복잡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서 정리를 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정리되면 그 사람과 관계하던 모든 거래처 등에 이런저런 변화가 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가정에 물질적 어려움이 오게 되면, 그 자녀들이 다니던 학원 등에도 여파가 미치고, 또 다른 곳.. 이처럼 우리의 삶이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기도하여 하나님 편에서는 처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지요.
가령 한 사람의 기도를 듣고 그를 취업시키려면 한 일자리를 만드시거나 한 사람을 퇴사시켜야 하고, 그 일자리를 만드시려면 또 어떤 다양한 일을 하나님은 하셔야 하며, 또 퇴사시키는 그 사람과 도미노처럼 얽힌 모든 사람들과 문제들을 하나님은 재조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 사단의 나라, 우리의 자유 의지적 주권적 영역, 사람사이의 관계, 조상의 신앙의 덕이나 죄의 삯, 자연계와의 관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요인과 변수가 서로 얽혀서 돌아가는 이 세상의 삶.
그러한 우리의 복잡하고 얽힌 삶을 오류의 여지도 많고, 또 아주 부분적으로 오는 예언에만 의존하려는 샤머니즘적 문화에 젖은 예언 지상 주의적 신앙생활은 반드시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또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음성을 듣게 되는 오류가 큽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예언이나 음성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시면 안 됩니다. 신중하게 분별하여야 하고, 지금의 여러 가지 상황을 잘 고려, 여러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최종의 결론은 지혜롭게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최종적으로 판단, 결정하는 주체적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예언적 중보 상담을 해 오신다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비책이나 묘수를 구하는 마음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오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그 사람의 일생이나 온 재산이 걸린 문제를 예언자도 오류의 가능성을 안고, 어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침을 주기는 부담스럽고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어떤 정해진 원칙이 없는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바, 아주 이따금 히스기야 왕처럼 극적으로 어떤 위기에서 벗어나게나 혹은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실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경우는 아주 희귀하겠지요.
그러므로 어려우면 그 가운데서 잘 아는 일반적인 성경적인 원론에 따라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자신과 가족들의 지혜를 모아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잘 분별하여 인내하며 헤쳐 나가는 것이 옳은 것이고, 혹여 상담을 한다면 무슨 비책을 바라는 마음이 아닌 그러한 부분에 대한 말씀 안에서 새로운 소망과 도전을 얻기 원하는 마음으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숱한 어려움의 이유를 우리가 다 잘 알 수 없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우리의 죄이며, 또 지혜롭게 살아가지 못하면 그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므로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말씀 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래도 어려움을 덜 겪는 삶이겠지요.
그리고 징계로 인한 고난이던지, 아니면 영적 성숙이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고난이던지, 우리가 행할 길의 일반적 원론의 길은 똑 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성찰하여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 애쓰는 것이지요. 그리고 욥처럼 끝내 인내하며 하나님을 바라고 믿으며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행하심은 한편 수수께끼, 그러므로 한편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를 나름 애써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기 위하여 애써 기록해 보았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공식처럼 해답을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예언 지상주의의 위험성은 아실 것입니다. 말씀을 헤아려 잘 살펴 분별력있게 살아가시며 아니 그래도 어려움이 적지 않은 우리네 생, 스스로의 영적 지식의 부족과 지혜의 부족함으로 자초하는 어려움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평안하십시요. 샬롬.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