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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은사 각론] 지식의 말씀과 빛 계열 은사들

초록 등불 2012. 5. 15. 18:39

  

  [은사 각론] 지식의 말씀과 빛 계열 은사들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성령께서“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계시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교회를 개척하고 금요 기도회 시간에 예배를 인도하면서 기도회가 마치면 다소 깊어가는 저녁시간이지만 어떤 가정에 가서 전도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묻지도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제 속에서 마치 라디오를 켜 놓은 듯 선연하게 들려오는 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집에 가지 마라. 집엔 아무도 없다”


묻지도 않았는데 들려와 신기하기도 해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그 집을 확인 차 다니러 간적이 있습니다. 가보니 들려온 음성대로 다소 깊어가는 밤중인데도 집의 문은 굳게 닫혔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실에 대하여 우리의 오감이 아닌 초자연적인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알게 하는 것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가령 성경 속에서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에게 많은 남편이 있었다는 것과, 나다나엘에 대하여 하신 말씀 등이 그러한 은사에 해당하지요.


요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런데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부분적인 의미에서의 예언의 은사와는 다소 구별이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부분적인 의미에서의 예언이라 함은 본래 예언의 은사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알아내고 밝혀내거나 미래의 일을 알아 맞추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안위하고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그런데 예언의 한 기능에 어떤 숨은 일이나 사실에 대하여서도 알게 됨을 또한 성경을 말씀하고 있지요.


고전14: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고전14: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그러므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는 다소 구별이 모호한 중첩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지식의 말씀의 영역이던 예언의 은사의 영역이던, 성령은 초자연적인 통로로 우리에게 어떤 사실이나 숨겨진 일들을 알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어떤 숨겨진 사실이나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빛의 성질에 속하는 은사들로는 통변의 은사, 예언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그리고 영분별의 은사도 이에 속하겠지요. 그 중에서 깊은 영분별의 은사는 한편 영안을 열어주셔야 하는 색다른 부분이 있어야 하기에 제외하고 나면, 통변, 예언, 지식, 지혜의 말씀은 결국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모두 관련된 은사들이지요.


포괄적이라 함은 단순히 음성 형태의 계시뿐만 아니라 꿈과 환상 등을 모두 포함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어쨌거나 통변, 예언, 지식, 지혜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바탕을 둔 은사이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잘 되면 모두 열리는 은사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물론 통변의 은사는 기초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그 바탕에 두고 있기에 그 영역이 더하여야 하겠지만, 예언과 지식, 지혜의 말씀도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서 많이 역사합니다. 물론 그러하지 아니하고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쨌거나 빛 계열의 은사는 결국 하나님의 음성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영적인 신호를 감지해 내는 능력과 관계가 되는데, 경험하여 보면 이는 영의 성장과 영적 감각의 깨어남과 많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 다루었듯이 인간은 본래 무엇을 학습하고 교육받고 배워서 아는 것보다는 초자연적인 본성적 능력으로 그냥 많은 것들을 알게 되는 존재였습니다. 제가 전적으로 그렇게 확정짓지 않는 것은 태초 창조될 당시의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절대적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철새가 하나의 항법장치나 나침반이 없이 북극에서 남극까지 정확하게 공전과 자전을 하는 지구 위의 궤도를 날아 이동하듯이, 선악과나무 곧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까지는 사람도 본래는 학습과 지식과 이성과 경험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초월적 본성의 능력으로 초자연적으로 어떤 것을 알고 감지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식의 나무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저 차원적인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판단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지요.


항법장치 하나 없이 수천 킬로미터를 정확하게 이동하는 철새의 본성적 능력에 비하여, 온갖 항법장치와 나침반과 레이더와 관제소의 도움을 받아야만 몇 백 킬로미터도 겨우 이동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까? 태양 전자파동 등으로 전파방해 등을 받으면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겠지요.


이처럼 인간이 지식과 이성으로 이룬 과학문명은 대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모래성이요, 멸망의 바벨탑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어리석음에도 미치지 못하고, 초자연적인 본성적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연계의 한 미물의 지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고전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나무, 곧 선악과나무를 무너뜨리시고 본성의 나무, 곧 당신의 말씀의 세계로 우리가 들어오기를 원하시는데, 그래서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미려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어쨌거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영혼이 거듭나고, 물과 피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이 성장하면서 그 영적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잃어버렸던 본성적 영의 능력이 회복되어져 갑니다. 그것이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은사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이 성장하고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 은사라면, 영이 성장하고 감각이 깨어나면 모두 동일한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데, 성경은 성령이 그 뜻대로 행하시는 부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영이 성장하고 그 감각이나 잃어버렸던 능력이 회복되어지는 것과 은사는 분명히 연관성이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경건한 생활로 그 영이 성장하고 감각이 깨어나면, 소위 우리가 직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점점 자신도 놀랄 정도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바라보거나 생각만 하여도, 그 사람에 대한 여러 정보들이 그냥 알아지고 느껴집니다. 정말 경건하게 말씀대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인지, 기도와 말씀의 생활에 충실한지 아닌지, 삶이 평강과 평탄함에 있는지 우환과 굴곡의 상태에 있는지, 물질적 누리는 상태가 부요한지 어려운지, 지금의 심리적 상태는 어떠한지, 말을 하면 건성으로 듣는지 진심으로 듣는지 등 다양한 정보들이 그냥 직관적으로 많이 알아져버립니다.


전혀 보지도 아니하고 듣지도 아니한 사람이라도 생각만 하여도 성격 등 다양한 것들이 다소 그냥 알아지고 읽혀집니다. 거룩하고 정결한 삶으로 영이 더욱 성장하고 깨끗해질수록 더욱 세밀하고 그리고 깊고 정확하게 읽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의 은사와 영의 성장이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비롯한 빛 계열의 은사는 영의 성장과 영적 감각의 깨어남과 다소 더 깊은 관련성이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과 다르신 부분은 한편 아주 인격적이시라는 것입니다. 한편이라 함은 하나님은 본질이 영이시기에 인격이라는 말이 어쩌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 영이신 하나님의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낸 관념의 하나님에 가깝습니다.


가나안을 칠 때 하나님은 때로 짐승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도 어린아이며 심지어 갓 난 핏덩이 아이까지도 모조리 죽이시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구약의 제사는 그야말로 피냄새 진동하는 도살장과도 같았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인격적인 하나님과는 거리가 다소 멀지요. 하나님의 본질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배우고 경험하고 알아가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행하심은 때로 우리의 눈에는 잔혹해 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깊은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만들어내고 생각하는 인격적인 하나님보다 훨씬 깊고 높은 도덕율과 지혜와 신성이 어려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글은 그 부분에 대한 글이 아니니 그것은 이쯤에서 마름합니다.


어쨌거나 한편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인격, 곧 우리를 배려하심이 있는데,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역사할 때 그러한 면을 보게 됩니다.


가령 점을 치는 귀신이 들린 무당들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막무가내로 사람들의 숨은 잘못과 비리를 밝혀버립니다. 그것은 귀신은 인격이라는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람들을 괴롭히고 도적질하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시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덮어 주시거나 가려주십니다. 하지만 가끔 그 베일을 벗기셔서 그 마음에 숨은 죄악이나 행동을 보게 하십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은 그 죄악을 밝혀내셔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에 결코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용서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려는 깊은 사랑이 숨어 있는 것이지요.


저는 아직 실제사역을 많이 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다양한 영적 사역을 한 경험이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마치 환자를 많이 경험하지 않은 임상경험이 적은 의사와도 같지요. 그래서 실제적으로 각 은사와 관련지어서 경험의 다양한 예를 들어서 설명 드리기는 아직은 경험이 많이 부족합니다.


영적 거장들의 다양한 책을 보면 각 상황에 맞는 기막힌 간증 등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물론 능력의 깊음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분들은 수천 아니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그 와중에 간증거리가 될 이런저런 다양한 영적경험들을 많이 경험하였기 때문에 풀어놓을 수 있는 실제적 이야기가 많은 것이지요.


제게도 건강도 회복시켜 주시고 다양한 사람들을 향하여 사역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주시면 더욱 적절한 실제적 간증으로 여러분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 드릴 수 있겠지요.


작은 영적 임상적 경험이지만, 가끔 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작동하면, 그 사람의 마음에 숨긴 죄악이나 행동이 선연하게 보이고 느껴지고 알아집니다. 경험해보면 한편 신기합니다. 선연하게 그 사람이 무슨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지가 느껴지고 알아집니다.


이 때는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숨은 죄악을 드러내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영역으로 나아오게 잘 인도하고 중보 하라는 차원에서 알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럴 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담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스스로 그러한 부분들을 하나의 민망함이나 부끄러움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저 앞에 고백하게 만들고, 함께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나누며, 빛과 진리의 삶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주 안에서 사랑으로 설득합니다.


이 때는 반드시 힘드시더라도 가능하면 영적 지도자의 권면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차원이시기도 하시지만, 일종의 징계가 임박하였다는 경종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는 예언이던지 이러한 지식의 은사가 역사할 때던지, 어떤 영적 사역의 영역이던지 절대로 직설적으로 사역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정보에는 저의 영적인 상태나 우리의 부족함에 기인한 오류가 필연적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나 사단이 끼어들 여지가 다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려 분별하여 정확하게 받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살피면서 해야 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특별이 예언 사역의 경우 절대로 직설적으로 사역하시면 안 됩니다. 평생을 예언사역을 하신 영적 거장들의 책도 제가 몇 권 주도면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한 분들도 예언이나 모든 것들에 오류나 실수가 있을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경험이나 다소 그러한 부분에 은사가 깊다는 분들도 만나보고 나누어 본 결과 분명히 오류와 실수와 틀린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직설적으로 사역을 하면 안된다는 확신과 저만의 지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직설적으로 영적 사역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영적인 삶에 대한 보편적인 수준의 예언은 다소 그렇게 하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와 직결된 것이나 생의 전체가 걸린 소명 등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과연 자신의 생이나 자신의 자녀의 생이 걸린 경우에도 그렇게 직설적으로 느낌이 오는대로 즉흥적으로 하실까요?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저는 제가 영 안에서 분별하고 기도하면서 받은 것들을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어가면서 분별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도 제가 받은 것을 절대시 하지는 않습니다.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니까요. 반드시 분별하고 조심스럽게 걸음걸음 살피면서 저도 분별하고 피 상담자도 분별하게 유도하면서, 제가 직설적으로 결론을 유도해 주기보다 자신이 스스로 어떻게 행해여야 할지를 알고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유도합니다.


제가 경험하고 다양한 책들을 살펴 분별한 바, 건전하고 바른 영적 사역을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로 인한 후유증이나 문제가 적습니다. 이러한 영적 사역에 대한 분별과 지식이 부족하여서 한 동안 한국 교회에서 은사, 특별히 예언으로 인하여 숱한 문제가 있어왔었던 것입니다. 영적 지식이 많이 알려져 다소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직설적인 예언사역과 예언을 절대시하는 고정관념 속에서 은사자나 상담자나 모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카페 어떤 분의 댓글을 보니 이런 글이 있더군요. “예언을 받으려 가면 받을 때는 기분이 좋고 힘이 나는데, 실상 돌아오면 별로 현실적인 문제해결에는 막연하고 실제적 도움이 되는 경우가 별로 없더라”. 또 어떤 분과의 대화 속에서도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언은 일반적으로 어떤 미래의 일어날 사건이나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현실적인 문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보편적인 의미에서 어쩌면 예언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일종의 설교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설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서 영육간에 복을 받고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이지요.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내가 너를 세계적인 종으로 삼겠다”라고 예언을 받았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세계적인 종이 될까요? 대부분 아닙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며 내가 이르는 말에 순종하면 이고, 둘째는 너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예언은 성취되는 것보다는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성으로 위의 두 조건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수준으로 성취시켜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일종의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젼으로 생각하시면 가장 적절합니다.


물론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희귀합니다. 대부분의 예언은 위와 같은 예언의 경우에 속합니다.


그리고 예언이 많은 경우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예언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영역, 현실적인 문제라고 하여도 그것의 영적인 원인의 클 줄기를 다루지, 무속신앙에서 이러면 풀리고 저러면 풀리고 식의 현실적인 행동지침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문제는 예언지상주의로 나가다보면 반드시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를 위해서 이성과 지성과 판단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적인 부분을 통한 영적인 큰 줄기, 그리고 우리의 이성과 지성과 판단력을 통한 분별력 등을 동원하여 총체적으로 풀어가야 하지, 수도 없이 많은 것들과 얽히고설킨 우리의 복잡한 현실의 삶이 예언 하나만으로 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래의 샤머니즘적 문화와 그리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다가오면 속히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예언 지상주의로 흘러서, 때로는 꼭 무속인에게 하듯이 그릇된 은사자에게 돈을 갖다 바치기도 하면서 점점 더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예언 지상주의로 흐르지 마십시요. 예언은 결코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근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그 상황을 한 순간에 풀 수 있는 무슨 족집게 행동지침 등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적 은사는 영의 일과 영적인 삶의 방향, 가령 어려운 환경 속에 처하였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이가의 줄기를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무슨 뾰족한 묘수를 찾게 하는 것이 보편적인 의미에서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아주 드물게 예외나 특수한 역사하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팔렸습니다. 그러면 예언이나 지식이나 지혜의 말씀 등의 은사 자에게 찾아가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요셉은 속히 그 환경에서 벗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갈 묘수의 해답을 듣고 싶겠지만, 제대로 된 그리고 일반적인 은사자의 입에서는 이러한 예언이나 권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억울하고 어려운 환경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십시요.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선한 뜻이 계시겠지요”


묘수를 찾았다면 요셉은 다소 실망하겠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예언은 정확한 것이고 실상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묘수를 찾기에 이런 예언에는 실망을 하고 말지요. 이처럼 예언은 어떤 묘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옳은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본질은 아니지만 한 부분인 현실적인 문제의 경우 예언은 시간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오기에, 요셉의 경우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네요”라던가, 애굽의 총리가 될 시즘이 임박한 경우라면 “이제 죄수의 몸을 벗어나 존귀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라는 부분적인 예언이 올 수도 있겠지요.


고전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그 상황을 지금 빨리 벗어날 묘수를 찾고, 또 부분적으로 오는 예언을 완전히 그리고 우리의 전생을 한꺼번에 다 알고 싶은 것처럼 접근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의 생과 미래란 운명적인 것이 아닌데, 다 듣고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예언에 대해서 실망하고, 또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릇된 은사자를 만나 어려움을 겪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이나 지혜의 말씀 등의 은사를 활용할 때는, 상담자도 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어야 하거니와 은사자는 필히 깊은 지식과 지침을 알아서, 상담에 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래서 저의 경우는 절대로 직설적으로 사역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직관으로 혹은 깊은 기도 속에서 분별되어져 온 것을 상담을 통하여 제대로 받은 것인지, 또 틀린 것은 없는지 분별하며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감히 버리고, 상담과 대화 속에서도 참된 것을 서로가 확증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조심스럽게 나눕니다.


특별히 현실적인 문제의 어려움이나 특히 생의 전체가 달린 소명 등의 문제를 다룰 때는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직설적으로 사역을 하면 안 되는 것은 은사나 영의 일들의 오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시는 분들은, 그냥 풀어놓으면 그것을 분별과 걸러냄 없이 다 수용할 가능성이 많기에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영 안에서 10가지 분별 된 것 중 아홉 가지가 맞고 한 가지가 틀린 경우는 은사를 경험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상당히 영적으로 제대로 받고 정확히 분별한 경우인데도, 상담자는 틀린 부분이 직설적으로 흘러나와 버리면 그것 하나 때문에 받아 들여야 할 아홉 가지마저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직설적으로 사역을 해서 다행히 그것이 다 맞으면 “정말 정확하고 분별이 정확한 분이네”라는 칭찬 앞에서 사역자 편에서는 어쩌면 자기 만족감은 갖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만족감을 위해서 오류가 섞여 들여갈 경우 상담자가 입을 피해는 생각하지 않는 배려 없는 사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결코 오류 없이 항상 100% 정확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읽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직설적인 사역은 상당한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상태가 늘 시간에 따라 변하듯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도 늘 요동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다소 정확하게 영적인 것들이 분별되다가도 때로는 어두워져 오류의 영역이 확대되기도 합니다.


어떤 세계적인 예언자가 집회를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푼 기대를 안고 그 집회를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구나 지인이나 주최 측에서도 많은 기대를 하였지요. 하지만 그 집회는 완전 실패였습니다.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의 나타나심이 없는 그런 예언집회, 그냥 일반적인 설교의 집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 시간 이후 친구들과 지인들이 다소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 분을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자, 그 예언자는 담담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자네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네. 예언은 내가 하는 줄 아는가? 하나님께서 그 시간 역사하시지 않으면 그냥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늙은이일세”라고 대답하며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채 그날 역사하시지 않은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고 순복하는 모습을 보였답니다. 하나님은 가끔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이렇게도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앞에서 이모저모 살펴본 것처럼,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비롯하여 모든 빛 계열의 은사들도 이렇게 정말 신중하게 접근하고 절대시 하면 안 되며 분별하며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된 은사사역이 되고 은사사역의 부작용이 적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영적 지식이 피차 부족하여 은사 사역, 가령 신유 사역을 하면서 사람을 때려서 멍들게도 하고, 축사 사역을 하면서 사람의 눈을 압박하여 터지게도 하고, 심지어 죽게도 만들고, 그리고 예언 등이 숱한 부작용과 문제를 일으켰지요. 이제는 절대로 그렇게 듣지도 그리고 사역도 하지 마십시요.


물론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이 성령께서 아주 강력하고 불같이 역사하실 때에는 이렇게 차분히 하기가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절대시는 하지 마시고 반드시 분별은 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는 이러한 영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그날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영이 성장하고 그 감각이 조금 깨어나도, 성령께서 여시면 그 사람의 중심과 내면의 실상이 다 적나라하게 보이는데, 숨겨진 마음의 비밀과 죄악이 때로 보이고 드러나는데, 우리의 아무리 깊은 곳에 숨겨놓은 비밀의 방이라도 다 뚫어보시는 불꽃같은 그분의 눈을 마주하는 날 어찌 우리의 살아온 날들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영성집회를 인도하다보면 가끔 주님이 이러한 감각을 열어주시는데, 가령 담배나 술을 드시는 분들이 오시면, 아무리 양치질을 하시고 냄새를 다 제거하고 오셔도, 영으로 담배 냄새 등이 납니다. 어느 정도 감지를 하고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직설적으로 “담배 피우시죠?”라고 하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게 혹 담배를 피우신다면 끊으셔야겠네요”라고 말씀을 드리곤 하지요.


그렇다면 저의 숨겨진 어두운 부분은 그분들의 영적 감각 레이다 망에 걸리지 않을까요?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이모저모 유익을 위하여 서로 가려주시면 안 드러나겠지만, 영성집회는 영적으로 다양하게 열린 분들도 많이 오시는 바, 이러한 곳에는 숨김이라는 것이 없겠구나 저의 작은 경험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이지요.


가령 교회에서 기도 등의 경건한 삶에 애쓰셔서 영적 감각이나 은사가 활성화된 분들은, 단에 서신 목회자님을 바라보는 순간, 바로 영적 상태와 다양한 것들이 즉시로 읽혀져 버립니다. 아무리 경건의 모양을 내려고 하여도 삶의 진실한 경건이 없음과 능력이 없음을 알아버립니다. 아무리 그 시간만큼 단에 올라가 급작스레 기도하고 설교를 큰 목소리로 외쳐대어도 회칠한 무덤인 것이 읽혀져 버립니다. 이처럼 영의 세계는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눅12: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정말 주님께서 영의 세계와 감각을 조금 열어주신 후 경험해보니, 영의 세계에서는 가식와 위선과 외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그 속과 본질이 다 보이시니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이지요.


마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여러분도 영적 감각이 깨어나면 죄악 가운데 살아가며 그 속에 더러운 것이 가득한 사람을 육적 의식이 아닌 영적 의식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영적 답답함과 눌림이 느껴지고, 때로는 구역질이 올라오려 합니다.


오류의 가능성이 있기에 절대적으로 스스로도 절대시 하지는 못하지만, 영이 성장하고 감각이 깨어나고 섬세해져 갈수록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생각만하여도 이런저런 영적인 상태들이 드러납니다.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도 인터넷 속이나 텔레비전 속의 인물에 대해서도 다 느껴집니다. 다만 오류의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지요.


저는 가끔 이러한 의미에서 오류의 범주가 있음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더군요. 가령 오류가 없이 절대적 완전함으로 늘 읽혀진다면, 우리 타락한 본성 상 정죄와 판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으니까요. 오류의 범주가 분명히 있기에 그렇게 늘 단정짓지는 않게 되는 것이지요.


또 한편 감사한 것은 내 삶에 부족함이 있음에 대해서입니다. 내 삶에 부족함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금하신 정죄와 판단의 오류에 제가 빠질 수 있겠지만, 저 역시 많은 허물과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기에 넉넉히 이해하고 도리어 자신을 살피며, 그 사람의 연약함과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게 되는 유익함이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우리의 영이 생명을 얻고 성장하고 감각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이와 같이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드러나고 밝혀지는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솔하고 솔직하게 됩니다. 아무리 외식하고 꾸미고 위선적 행동을 하려해도 다 알게 된다는 것을 아니, 진솔하고 솔직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도 실상 이러한 것이지요.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 앞에서 솔직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며, 또한 자신의 부족함 안에서 서로의 허물을 서로 덮어주고 이해해 주고 기도해 주는 성숙한 모습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죄를 짓기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꼭 필요함을 알아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리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주심을 알아 더욱 겸손하고 진솔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감이 필요하겠지요.


결단코 자신의 삶의 어두운 영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피하여 숨고 도망가면 안됩니다. 그리하면 점점 더 어두운 세계로 떨어져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어두움과 어두움에 속한 일들이 다가오고 생겨나게 되니까요. 늘 솔직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중심으로 빛 계열의 은사인 예언 등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활용함이 건전하고 바른 것인가를 보편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썩고 죽을 은사 안에서도 많은 것들이 다 드러나는 바, 불꽃같은 주님의 눈 앞에서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지요? 늘 경건한 두려움으로 죄와 불의를 버리고 의와 진리의 삶을 애쓰는 우리 모두면 좋겠습니다. 평안하십시요. 샬롬.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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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정빛 생명수와 불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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